"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스피노자와 '사과나무' 격언의 비밀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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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스피노자 하면 바로 떠오르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스피노자는 이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명언이라는 것은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이상한 전설입니다. 전설이 그 전에도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서의 형태로 등장한 것은 경향신문에서입니다.

1966년 7월 경향신문의 <여적>이라는 단평란에 최초로 스피노자의 사과나무 전설이 실립니다.

"모름지기 값싼 상혼(商魂)에만 사는 사람들, “내일 세계가 무너지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어야겠다”고 한 스피노자의 밀을 일생 동안 한번쯤은 되씹어보라."

5년 후 1971년 중앙일보의 사설에서 스피노자의 명언이라며 같은 문장을 소개함으로써 스피노자의 사과나무 명언 전설은 기정사실화되었습니다. 오직 한국에서만 말이죠.

외국에서 이 격언은 종교개혁의 선구자 마틴 루터가 남긴 것으로 통합니다. 구글 검색창에 'martin luther'를 치면 곧바로 자동검색어로 'apple tree quote'가 뒤따라 붙습니다.

martinluther.jpg

실제로 마틴 루터가 살았던 장소에는 이 문구가 기념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마틴 루터의 유언으로도 알려져 있고, 마틴 루터의 묘비명이라고도 하지요. 둘 다 아닙니다. 이 격언은 마틴 루터가 아이제나흐라는 곳에서 청소년기를 보낼 때 일기장에 적은 내용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도 전설이기는 마찬가지이죠. 그런 일기장은 발견된 적이 없습니다. 유일한 출처라는 일기장은 존재하지 않고, 이후로도 루터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도 기록한 적도 없습니다. 더욱이 그는 사과나무를 심어본 적도 길러본 적도 없습니다.

루터의 조국 독일을 위시한 외국인들은 이 말이 루터의 문장이라고 철썩같이 믿습니다. 특히나 격언은 그와 이름이 같은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영어로 옮겨 말하며 영어권에서도 유명해졌습니다. 되도록 입에 담고플 만큼 멋진 문장인 것은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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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최초의 출처는 어디인가? 역시 독일입니다.

사과나무 격언은 1944년 10월 5일 독일 헤센 주의 목회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비밀 신문에 처음 등장합니다. 헤센의 목사 칼 로츠의 기고문에서죠. 로츠 목사는 '고백교회'의 일원이었습니다. 고백교회는 히틀러에 부역할 것을 거부하고 나치즘에 저항적인 목회자들이 결성한 신앙의 연대입니다. 당연히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었지요.

로츠 목사는 동지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자며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민족은 지금 매우 급박한 상황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보내는 이 글은 절대로 훼손되지 않습니다. 루터의 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그렇다면 적어도 로츠 목사와 그의 동지들은,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사과나무 격언이 루터의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왜 이렇게 믿었을까요? 역시 루터가 한 말이 맞는 걸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멋진 인용입니다. 비록 내일 나치에 탄압받아 죽을지라도 오늘 신의 뜻에 따라 살자는 뜻으로 사용했으니 말입니다.

로츠와 그의 동지들 역시 별다른 근거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마틴 루터가 남긴 격언으로 알고 있었을 뿐이지요. 암담한 현실과 루터에 대한 존경심이 결합해 탄생한 전설인지, 전부터 유럽 혹은 독일인들이 그리 알고 있었는지는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루터는 이 말을 했을 수도, 안 했을 수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스피노자의 격언은 결단코 아니라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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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이야기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저녁 되세요^^

재밌게 읽었습니다 ~

와.. 지금까지 스피노자인줄 알았는데,
사실 혹시 뜻도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게 아닐까..하는 음모론도 제기해봅니다 +_+ㅎㅎㅎ

재밌는 내용이네요 ^^ 종종 들러야겠어요 남은주말 안녕히 ^^ 새해복많이 받으세요. 맞팔갈까요~ ㅋ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그리고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멋진 말이라고 생각해요. 어느 시점에 오면 사실 그 얘길 누가했건 중요하지 않게 될 것 같아요.
저도 이 말을 참 좋아하는데, 제가 현재까지 느끼는 이 말의 의미는,
우리 인류가 멸종하더라도, 또 심지어 지구가 반쪽이 나더라도, 내가 그나마 죽기전, 전 우주에 한가지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할 수 있다면, 바로 나무 한그루 심어 이것이 죽지않고, 혹시 다시 새 생명의 원천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고 죽겠다는 멋진 의지로 받아들여집니다.
지금 46억년 역사에서 우리 인류가 산 것은 불과 10만년 정도 뿐이 안되지만 그 인류가 탄생하기까지 수많은 박테리아가, 식물들이, 다른 동물들이 있어왔다는 걸 믿고, 그 믿음을 사과나무하나에 실어넣는거죠. 바깥에 나무를 보고 가끔 저 나무와 내가 분명 공통의 무엇을 갖고 있을거라고 대입하게 되는 경우가 있쟎아요. 우리는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 공동체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다시한번 각인하게 되네요.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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