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급실 에세이 3. 오늘 하루도 다이나믹하다

in #kr6 years ago

지금은 새벽 3시이다. 이쯤 되니까 응급실을 방문하는 환자의 발걸음도 뜸해져서 약간 숨을 돌릴 여유가 생긴다. 전일 저녁 8시부터 근무를 시작했는데 1시간에 4~5명씩 환자가 밀려오느라 정신없이 진료하다보니 어느 새 이 시간이 되었다.

#. 77세 여자
할머니 한 분이 저 멀리 전라도의 도시에서 야심한 밤에 오셨다. 이 병원에는 심하지 않은 질환으로 서너 차례 외래에 왔던 게 전부이다. (= 병원을 오래 다니던 중증 환자가 아니라는 뜻 = 입원이 안 된다는 뜻). 할머니는 3~4일전부터 열이 나고 숨이 차서 인근 병원에서 폐렴 진단을 받고 입원치료를 했는데 호전이 없어서 효심 가득한 아드님이 할머니를 고쳐드리고자 연락도 없이 머나먼 전라도의 도시에서 서울까지 앰뷸런스를 타고 환자를 데리고 왔다. (이송한 운전기사한테 물어보니 2시간 30분 걸렸단다. 얼마나 과속했으면 전라도에서 여기까지 그게 가능한 걸까. F1 드라이버로 데뷔하셔도 손색이 없겠다 ㅎㅎㅎ)

응급실에서 피검사도 하고 CT 도 찍었는데 그냥 단순한 폐렴이다. 호흡기내과와 상의했지만 역시나 병실이 없단다. 그래서 효심 가득한 아드님께 현재 병실이 없는 상태라 아쉽지만 전원을 가야한다고 설명했더니 불같이 화를 낸다. 할머니를 고쳐드리고자 머나먼 곳에서 왔는데 그냥 보내는 게 어디 있냐며.

환자와 보호자의 심정이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물리적으로 병실이 없는 것을 어떻게 하나. 여기서부터 뫼비우스의 띠 같은 대화가 이어진다.

나 : 할머니가 의학적으로 입원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지금 병실이 없는 상태입니다. 저희가 입원하여 항생제 치료가 가능한 병원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보호자 : 이 병원을 믿고 왔는데 그냥 나가라고 하는 게 어딨습니까. 응급실에서라도 치료받게 해주세요.
나 : 응급실은 환자 급성기 치료 후 계획을 세우면 입원이나 퇴원을 결정해야 하고 현재 병실이 없으므로 입원이 어렵습니다.
보호자 : 그러니까 입원은 아니더라도 응급실에서라도 치료받게 해주세요

계속 반복이다..... 환자는 전국에서 몰려들지만 물리적으로 병실은 없다. 나라고 환자를 쫓아내는 게 즐거워서 이럴까. 환자도 의사도 행복하지 않은 밤이다.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이 문제가 많다.

#. 81세 남자
할아버지가 숨이 차서 오셨다. 아까 위에서 얘기한 할머니의 옆옆 자리에 누워계신다. 이 분은 Idiopathic pulmonary fibrosis (특발성 폐섬유화증)을 앓고 계셔 10년간 이 병원 호흡기내과에서 치료 중인 환자이다. 이번에도 숨이 차서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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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교과서에 나올 법한 사진이다. 피검사를 했는데 다행히 염증 수치도 괜찮고 발열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CT 는 찍어보아야 한다. 원체 어려운 질환이라 이것만 가지고 환자의 상태를 판단하기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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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적인 폐조직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숨이 안 찬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호흡기내과와 상의했지만 역시나 병실이 없단다. 이 환자도 전원을 가셔야 한다.

이 쯤 되면 느끼는 게 한 가지 있다. 이 병원에 입원하려면 운이 엄청 좋아야 한다. 환자가 응급실에 왔을 때 본인의 진단명이 입원할 수 있을 만큼 중하거나 정말 운이 좋게 성별에 맞는 병실이 남아있거나. 그래서 나는 환자가 입원하는 것을 "팔자" 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하면 "운명" 정도가 적당하겠다......

입원할 팔자면 경환이어도 입원하고 입원 못 할 팔자면 아무리 중증 질환이어도 입원이 안 된다.
뭔가 의료 시스템이 잘못 된 것 같다. (2)

#. 59세 남자
환자가 비명을 지르며 응급실에 내원했다. 농담이 아니라 응급실이 떠나갈 정도로 소리지른다는 게 허풍이 아니다.

환자 : 나 죽네 !!!!!! 나 죽어 !!!!! 빨리 좀 살려줘요~~~~~!!
나 : 어디가 아파서 오셨나요 ??
환자 : 소변을 못 보겠어요~~~~. 빨리 좀 살려줘요 !!!!!

요폐 (urinary retention) 라고 불리는 소변을 못 보는 상태다. 노년의 남성에게 전립선 비대증이 있으면 흔하게 생길 수 있는 질환이다. 누구나 소변을 오래 참아본 기억이 있겠지만 소변을 보고 싶은데 못 보게 되면 정말 미칠 것 같다. 환자의 소리 지르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빨리 소변줄을 넣도록 지시했다.

소변줄이 들어간 이후 환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해졌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르다는 게 확인되는 순간이다). 소변줄을 넣고 무려 700ml 의 소변이 나왔다. 우유팩 1개에 가까운 소변이 들어있었으니 소리 지를 만도 하다. 보통 500ml 이상으로 방광이 늘어나면 방광 손상이 있을 수 있어서 신장에 무리는 없는 지 피검사를 해봐야 한다. 그래서 피검사와 소변검사를 지시했다.

어라. 근데 결과가 이상하다. 염증을 나타내는 수치 (CRP) 가 무려 28mg/dL 이다. 그리고 소변에서도 염증 수치가 발견된다. 원래는 그냥 소변줄만 꼽고 신장 수치 정상이면 퇴원시키려고 했는데 복부 CT 를 찍기로 했다.

1.jpg

화살표 친 곳은 양쪽 신장 주변으로 약간 물이 찬 듯한 모습이다. (마음의 눈을 크게 뜨면 볼 수 있다. ㅎㅎ) 방광이 막혀서 요관이 늘어나면 생길 수 있는 현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CT 를 넘기다 보니 염증을 유발한 병변이 발견되었다.

20180515_025239.jpg

저기는 전립선이 있는 곳이다. 그런데 전립선 안으로 농양 (abscess) 가 보인다. 이 환자의 진단명은 전립선 농양이었다. 방광에 모인 소변이 요도를 따라 음경을 통해 나와야 하는데 전립성이 요도를 압박하면서 요관이 막혀서 소변을 못 본 것이었다. 가끔 환자의 증상이 왜 생겼는지 검사를 통해 발견하면 탐정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재미있기는 하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생각해야만 하는 것은 전립선에 염증이 왜 생겼냐는 것이다. 보통 남성은 여성과 달리 해부학적인 구조가 달라서 방광염 같은 요로계 감염이 잘 안 생긴다. 그치만 이 환자는 왜 생겼을까. 그 해답을 다음 CT 에서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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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마음의 눈을 뜨고 찾아보면 음경 주변으로 링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아마도 음경확대시술 같은 것을 예전에 받으면서 보형물을 넣은 것 같다. 타인의 성생활에 큰 관심은 없지만 아마도 추정컨데 보형물을 넣을만큼 성에 관심이 있으니 성병에 걸려서 전립선염이 생겼고 그것이 진행해서 전립선 농양까지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이 환자는 비뇨기과로 입원하여 항생제 치료 및 필요 시 농양제거를 받아야 호전이 될 것 같다.

힘들기도 하고 환자나 보호자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다운되기도 하지만 가끔씩 신기한 케이스를 구경하면 나름의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오늘도 응급실의 밤은 깊어만 간다. 항상 바라는 것은 오늘 밤도 무사히 근무를 넘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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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자세히 써주시다니.. 덕분에 잘 배우고 갑니다. 종종 들리겠습니다. : )

감사합니다ㅡ도움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고생 많으시네요. 올려 주시는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수 많은 대기 환자를 혼자 감당하던 응급실 의사를 한 시간 넘게 기다리고서야 진료 받을 수 있었던 경험이 있답니다. 당시 제 혈압은 220/110 이었죠. 무슨 전압도 아니고 제 혈압이 그렇게 높게 올라갈 줄 몰랐답니다.

그 때 의사의 얼굴 표정이 기억납니다. "응급 아니십니다. 검사 좀 해보죠" 라고 담담하게 이야기 하던 표정이요.

수 많은 환자에 치여 숨 못 쉬는 의사가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랍니다.

네ㅡ이게 참 저희가 생각하기에도 안타까운 문제입니다ㅠ
모든 문제는 자원의 분배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선진국처럼 자원이 유복하여 인력도 장비도 충분하면 의료인과 환자 모두 쾌적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의 제한된 자원 속에서는 이 수준이 한계인 것 같습니다

의학드라마 같네요.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자주 올려보겠습니다ㅡ감사합니다^^

힘들기도 하고 환자나 보호자에게 안 좋은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다운되기도 하지만 가끔씩 신기한 케이스를 구경하면 나름의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좋은 글들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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