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이성의 시대 : Subaltern은 왜 말할 수 없는가

in #kr8 years ago (edited)

안녕하세요, JOHN입니다.


1. Subaltern(:서발턴) 연구

  • Subaltern은 하위주체라고도 부르는데, 지배계층의 헤게모니에 종속되거나 접근이 배제됐던 존재들을 일컫는다. 이 단어는 안토니오 그람시에 의해 제시됐지만, 노동자나 여성, 피식민지인 등 여러 주변부적인 부류로 개념이 확대된 것은 구하나 스피박의 공헌이 크다.
  • Subaltern이란 말이 여러 주변부적인 대상을 포섭하는 것은 단일한 의미와 고정된 맥락에 한정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음을 뜻한다. 한편으로는 'Subaltern'이란 용어에는 이렇게 한 묶음으로 집단을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사람들의 반성적 사고가 깃들어 있다. 각 개별적인 사람들이 비정규직, 실업자, 여성, 장애인 등의 이름으로 규정되는 순간 어쩌면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에 갇혀버리고 만다. Subaltern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그 각자가 편협한 이론의 틀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개별적 고통과 경험, 그리고 역사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 개인들을 왜곡된 이론적 잣대나 다른 지배권력 및 담론으로 설명하거나 재현하려 할 때, 그들은 말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1) Subaltern 연구의 목표

  • Subaltern 연구라는 것은 구체적이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Subaltern에게 가해지는 어떤 시선의 폭력이나 문제를 비판하고 해체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노동자나 장애인, 외국인노동자 등을 떠올려 보자. 대개 이들을 생각할 때면 그렇게 좋지 않은 느낌을 받고, 이 우중충한 느낌을 갖고서 그들을 대하게 된다. 예컨대, 가난, 후진성, 무능력, 심지어는 더러움 등의 이미지 말이다. 그리고는 그들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배제시키거나, 우리와 동질적인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기도 한다. 이러한 시선과 권력의 문제를 Subaltern 연구는 비판하면서, 배제시켰던 Subaltern들이 결국 우리와 같은 경험의 주체라는 것을 재현하는 것(Re-Presentation)을 꿈꾼다.

  • 구체적으로 Subaltern 연구의 목표는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목표 1) Subaltern을 자율적이고 독자적으로 설 수 없게 하는 지배담론의 기능과 그 지배효과를 분석.
    목표 2) 지배담론이 Subaltern들을 하나의 권력관계 속에 넣음으로써 원천적으로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그 침묵성, 하나의 리얼리티로 존재할 수 없고 단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게 만드는 부재성, 그리고 같은 인간 존재라는 것을 배제시키는 배제성 등을 가진 지배담론 속에서 Subaltern의 재현을 발견하는 것.
    목표 3) 지배담론의 모순과 틈새에서 분명히 존재하고 있는 Subaltern을 재현시킴으로써, 헤게모니적인 지배의 완성을 지연 및 균열시키는 저항적 차이로서의 Subaltern의 처소를 구축하는 것.

  • 이 연구를 통해서 Subaltern들은 지배 헤게모니를 행사하며 자신들과 대립되는 지배집단의 영향을 받는 존재이긴 하지만, 분명히 자신의 삶을 영위하려는 삶의 의지, 욕망과 권리 등이 있는 존재임을 입증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Subaltern 연구는 탈(脫)식민주의 또는 탈(脫)지배적인 비판(critique)으로서 어느 지역에서나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권력들 혹은 그 권력의 시선에 대한 비판적 포지션으로서 시사점을 줄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Subaltern들이 기존의 지배집단과는 다른 새로운 역사의 주체가 되는 장을 마련했다고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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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ccupy Wall : 왜 중심은 99%가 아니고 1%가 되어야 하는가!

여담 : Subaltern들이 기존의 지배집단과 다른 새로운 역사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한 번 생각해보자. 다른 나라도 물론 그렇겠지만, 우리나라의 역사교육은 역사의 주체 혹은 서술중심이 주로 지배 엘리트를 중심으로 하는 방식이다. 왕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고려시대의 귀족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 그런데 이 역사 속에는 백정의 역사, 추노의 역사, 궁녀의 역사, 광대의 역사 이런 것들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엘리트 중심의 역사가 민족적 자긍심을 제고하거나, 한 나라의 중심세력인 지도층이 어떻게 나라를 발전시키고 통일시키며 이끌어 갔는지 설명하면서 국가적인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런데 마치 이것이 우리 역사의 모든 것이고, 그 속에서 매 순간 존재해왔던 Subaltern들을 배제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우리의 시각이 교육의 수준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가정하면, 엘리트 중심의 역사교육 속에서 주입된 우리의 시각이 어쩌면 Subaltern을 볼 수 없게 만드는 하나의 구조적 문제와 연관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2) Subaltern은 왜 말할 수 없는가

  • Subaltern은 왜 말할 수 없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기 전에 한 소설을 소개하려 한다. 하인리히 뵐(Heinrich Boll)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라는 책이다. 이 책은 '폭력은 왜 발생하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라는 부제를 갖고 있다. 거칠게 요약하면 이 책은 신문(최대발행부수를 자랑하는 '차이퉁')이 저지르는 인권유린과 왜곡보도 등으로 인해 명예를 훼손당한 한 여성이 기자를 총으로 쏴 죽이는 얘기다. 사실 누군가의 명예가 실추되어 나타나는 폭력과 살인은 우리 삶에서 종종 나타나는 사건들이다. 문제는 차이퉁지는 사람들의 관념에 영향을 미치는 지배집단이고, 그 지배집단의 폭력에 희생당하는 카타리나 블룸은 그저 나약한 개인에 불과하다. 차이퉁 지는 카타리나 블룸을 도덕관념이나 인간성 등이 전혀 없는 냉혈한으로 묘사하고, 그녀의 가족에 관한 내밀한 정보마저 서슴지 않고 보도함으로써 철저히 파괴한다. 더욱 문제인 것은 그 기사를 독일의 대다수 국민들이 본다는 것인데, 이제 블룸을 모르지만 그 기사를 보는 사람들은 차이퉁지와 같은 시각을 가진 집단으로 묶이게 된다. 이런 구조적 상황에서 블룸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은 원천적으로 차단당할 수밖에 없다. 오직 폭력을 제외하고는!

  • 스피박(Spivak)은 'Subaltern은 왜 말할 수 없는가?'라고 물었다. 사실 이 질문은 Subaltern은 말할 수 없는 존재라는 회의적인 답변이다. 카타리나 블룸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라. 그들은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설령 말을 하더라도 그것이 해석하는 타자의 시각과 언어에 의해 지워지고 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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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샘 성폭행 피해자'나 '서지현 검사'에게 "왜 이제 와서 폭로해?"라며 대가성을 묻거나, "그녀들도 즐긴 거 아니야?"라고 소리치는 폭력은 너무도 오리엔탈리즘적이다. 이 폭력엔 권력과 집단이 있을뿐 사람이 없다. 왜 이들이 말할 수 없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 Subaltern이 말할 수 없게 되는 문제는 타자의 시선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요소들도 관련이 있다. 실패한 신(The God that Failed)의 에세이로 대신 설명해보겠다. 수만 평이나 되는 장원이 펼쳐져 있고, 그 속에는 군주와 수많은 소작농들이 어울려가고 있다. 근데 어느 날 군주가 직접 다스리던 정치체제에서 공화정으로 바뀌며 시민들은 투표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 자립권은 생기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경제적으로 종속된 상태에서 착취당할 수밖에 없고 또 동시에 생존을 위해 누군가를 투표하도록 강요된 상태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자들은 형식적으로 자유를 지껄이는 웃기는 상황이 진정 민주적인 자유라고 말할 수 있는가. Subaltern이 말할 수 없게 되고, 원천적으로 침묵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구조적인 문제와 가장 관련이 있는 것이다.

2. 중심 없는 공동체를 위해

  • Joseph Conrad의 The Heart of Darkness라는 소설의 주인공, '말로'는 콩고의 오지에 있는 선주민들이 모두 '괴물'일 것이라 예상했지만 그들이 자신과 다름없는 '인간'인 것을 발견하고 당황한다. 말로가 상상한 괴물들은 제국주의가 만들어 낸 환상일 뿐이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속해 있는 집단적 성향으로 개인을 바라보는 독단적이고 맹목적인 시각을 지양해야 한다. 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무수한 인간적 모습을 보지 못하거나 혹은 일부러 보지 않는 것은 끊임없는 권력관계의 재생산을 낳는다.

  • 이처럼 Subaltern 문제가 보여주는 것은, 집단에 지나치게 집중하게 되면 개인이 가진 다양한 인간적 특성들을 존중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상상과 편견 혹은 신화에 의해 인간을 파편화하게 된다. 집단의 권력은 개인들을 집단에 순응하도록 길들이기 쉽고, 동시에 하나의 경향성을 가진 집단의 시각으로 개인의 무수한 특성들을 단순화하거나 지워버리기 쉽다. 내가 원하는 사회는 각자의 개성들이 녹아 있으면서도 조화롭게 존중되는 중심 없는 공동체다.

  • 지배권력이 주입하는 잘못된 인식에서 벗어나 중심이 없는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어 갈지에 관한 몇 가지 덕목을 생각해보자(조금 유치할 수도 있으니 감안해주길:<).

  • 1) 거부 : 기본적인 사고는 잘못된 집단화와 일반화를 거부하는 것이다. 가령 우리가 초등학생 때부터 무지개를 그릴 때, 모든 스펙트럼의 경계를 분명히 그리고는 각 경계 사이를 단 7개의 색깔로 채워 넣는다. 그런데 스펙트럼은 하나의 색깔로 구분할 수 없는 무수한 색의 집합이다. 다시 말해 구분기준이란 정말로 모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색은 노르스름하고, 어떤 색은 푸르스름하다'라며 타자를 부분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결코 타자의 무한함을 담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당연하고도 보편적인 차이에 대한 이해의 결핍이 지배담론 및 권력과 결탁해서 이항대립적으로 대상을 타자화하고, 심지어 위계화함으로써 차별과 배제의 원리를 만든다. 그리고는 Subaltern을 만든다.

  • 2) 윤리적 개별성: 윤리적 개별성은 사회구조상 희생될 수밖에 없는 존재, 즉 Subaltern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존중하려는 노력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그들과 제도적 장치를 넘어서는 '내밀한 만남'을 가지라는 것이다. "장애인의 날이니까 그날 하루 그들을 존중하고 인정해야지" 혹은 "인종차별은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니 하지 말아야지" 등의 제도적이고 사회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정말 개인적이고 내밀한 만남을 갖는 것이다. 개인과 개인 간의 '직접적인 만남'에서 생겨나는 책임과 의무, 그것에 바탕을 둔 윤리성이 먼저 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이란 바로 노력이다. 그것은 매우 세세하게 상대방에 귀 기울이는 것이며, 양쪽의 마음이 변하는 것이고, 순간적으로나마 실천될 수 있는 윤리적 개별성의 실현 가능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집단적 노력이 법, 생산관계, 교육체제, 그리고 의료체제를 바꾸게 될 것이다. (중략) 윤리적 개별성이란 비밀스런 만남이라고 불릴 수 있다. 이것은 양쪽으로부터 반응이 있는 경우 가능해진다.” - Gayatri Chakravorty Spivak

  • 3) 무거움의 해체와 가벼움의 지향 : 인류의 역사엔 근대성을 강조하는 무거운 시대가 있었다. 지금은 그 시대를 벗어나려고 하는 과도기 정도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무거운 시대에 추구했던 지나친 강박관념, 예를 들어 복잡하고 비중심적인 개체들을 A라는 이름으로 분류하고, 또는 B라는 중심이나 기준으로 얽매이게 하고, 또는 C라는 이름으로 단순히 통합시켜버리는 이런 강박관념들을 이제 거부해야 한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표현하면, "취향 존중 좀 합시다" 정도인 것 같다. 그저 개인이 갖는 욕망을 존중하고, 다양하고 개별적인 관념들을 자유롭게 용인하는 가벼움을 지향하자. 복잡하지만 다원적인 중심으로 회귀하는 것은 차이를 인식하는 올바른 방법이고, 또 지금까지 오랜 역사 속에서 Subaltern들에게 가해졌던 구조적인 폭력을 지우는 길이다.

  • 집단의 힘을 줄이고, 개인을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 해법들은 개인적인 것이고 인식론적이다. 그래서 보완적으로 필요한 것이 바로 연대(Solidarity)다. 나는 부끄러운 사회에 묻는다: 안녕들하십니까?에서 지금처럼 안녕치 못한 사회에서는 운동이 필요하다고 했다. Subaltern의 권리와 힘을 복권시키려는 참된 집단행동은 사회를 이롭고 공정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Subaltern들의 처우를 개선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격려하며 힘을 줄 수 있다.

  • 4) 연대 : 개인적으로 이룰 수 없지만 사회적으로 중요하고 또 변화가 필요한 것들은 반드시 집단을 구성해서 말을 해야 한다. 집단을 구성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비단 효율적이고, 사회적 변화에 대해 근본적 변화를 촉구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 자체가 사회를 구성한 목적이자, 동시에 의무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고쳐져야 할 문제가 있는 사회에서 개인들이 주체적으로 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민주적인 의식의 죽음이고 휴머니즘의 상실이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주체적으로 형성할 힘을 상실하는 상황'으로 이어지고 말 것이다.

나치는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기에 침묵했다.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에 침묵했다.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기에 침묵했다.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 Martin Niemller

  •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과 다름을 용인할 줄 아는 ‘차이’의 힘이다. 이것은 우리 주변의 Subaltern에게 말을 걸어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집단의 이름으로 가해졌던 개인에 대한 폭력을 치유하고, 개인과 개인의 윤리적 관계를 정립하게 하는 인간적 노력의 씨앗이기 때문이다.

  • 도덕적으로 보다 향상된 사회를 갈망하는 지성인이자, 진보적 인간으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한 내면적 갈망이 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좋겠다. 왜 Subaltern은 말할 수 없는지, 그리고 그들이 말할 수 있게 하려면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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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리스팀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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