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습작] #1 이발소 할머니 (상)

in #kr8 years ago (edited)


엄마는 연신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귀밑으로 내린다. 뜨거운 태양은 바람 한점 없는 디긋자의 건물로 둘러 싸인 동사무소 앞마당에 쉴틈없이 쏟아진다. 줄서서 모인 사람들의 머리를 이글이글 태우려고 작정한 모양이다. 순서가 되자 엄마는 몇가지 확인을 거친후 쌀자루와 보릿자루를 받아 들고 시장 입구까지 잰 걸음으로 달리듯 간다.

아직 학교에 입학 하기 전인 나는 언니와 오빠가 학교에 간 뒤 엄마의 치마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껌딱지였다. 그날 아침도 흰색 블라우스와 곤색 플레어스커트를 차려입고 씨쓰루 여름 자켓을 걸치시는 엄마를 보고 어디 좋은 구경이라도 가나 따라 나선 것이 화근이었다.

시장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한번 크게 몰아쉰 엄마는 쌀자루에서 쌀을 절반쯤 꺼내 여러 가지 식재료들과 바꾸기 시작한다. 아직 포기가 내려 않지 않은 내 머리만한 배추통와 무우 하나, 두부 세모, 큼지막한 노란 단무지 그리고 고등어 두손까지 비닐봉지에 차곡차곡 담아선 엄마는 한숨 돌리지도 않고 바삐 집으로 향한다. 이게 뭐람. 뾰루퉁해진 나는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얻어 먹을 요량으로 발뒷꿈치를 바닥에 찍찍 그으면서 걸음을 최대한 늦춰보지만 뭐가 그리 바쁜지 엄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기기만 한다. 이게 뭐야. 다시는 따라오지 않겠어.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쌀자루에서 다시 절반을 덜고 시장에서 가지고 온 식재료들을 장바구니에 모아 담기 시작한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엄마 옆에서 1미터도 떨어지지 않고 일거수일투족을 살핀다. 엄마는 땀에 젖어 마른 몸을 드러나게 해준 씨쓰루 자켓을 벗어 놓고 시원한 물을 벌컥벌컥 한사발 드시고는 바구니를 들고 또 집을 나선다. 나는 마치 위치 센서가 달린 로봇처럼 또 엄마 오른쪽 옆구리 쪽으로 달려가 껌딱지처럼 붙는다.

골목길을 따라 내려오다 삼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꺽는 순간 나는 또 후회가 밀려온다. 아뿔싸. 또 잘못 따라왔군. 구부러진 길을 쭉 따라 가다 보면 뒷산으로 올라가는 초입에 다 쓰러져가는 작은 이발소 건물이 나온다. 그리고 그곳에는 벙어리 할머니가 혼자 산다. 아뿔싸. 

할머니는 멀리서도 엄마를 알아봤는지 연신 손을 흔들고 방실거리며 한걸음에 달려나온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나는 얼른 엄마 치마 뒤로 숨는다. 

"이거 오늘 동사무소에서 받아온 쌀하고 보리야. 시장가서 고등어로 바꿨으니 얼른 구워 먹어. 김치도 담그고 응?"
"어버어버버"
"아고 덥다 나 간다!"
"어 어버!"

할머니는 얼른 크게 손짓을 하더니 냉큼 이발소 뒤로 사라졌다 나타난다. 그리고는 엄청 큰 함박미소와 함께 분홍색 사탕을 나에게 불쑥 내민다. 아뿔사. 또.
나는 엄마 치맛자락을 왼손으로 꼭 쥐고 물끄러니 엄마를 쳐다본다. 엄마는 고갯짓으로 얼른 받으라 신호를 줬지만 나는 더욱 엄마뒤에 꼭꼭 숨는다. 결국 엄마가 사탕을 받아서 나에게 넘겨주고 나는 풀이 죽어 손바닥만 물끄러미 바라본다. 엄마는 내편이 아니야. 오늘은 일진이 엄청 좋지 않아.
끈적끈적 질감도 싫지만 몇번을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진분홍색 사탕 색소는 아이들과 공주 놀이 할때 입술에 살짝 대였다 우아하게 입술을 내밀때 말고는 아주 쓸모 없는 물건이다. 이걸 어떡해 먹으라는 거지. 할머니는 연신 웃으며 멀어져 가는 엄마와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손바닥에 무슨 벌레라도 앉은 것처럼 뚫어져라 쳐다보며 발걸음을 옮기던 나는 문득 이발소께를 돌아본다.

금방이라도 내려 앉을것 같은 슬레이트 지붕과 바람이라도 불면 풀풀 날아오르는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하얀 페인트 가루, 예전엔 유리창이었겠지만 지금은 반은 신문지로 덮여 있는 유리틀로 둘러쌓인 벽, 그리고 이발소였던것으로 짐작하게 해주는 대형 선반과 큰 거울이 있던 자리는 세월의 흔적만 남기고 있다. 작은 문을 하나 열면 살림방이 나오는데, 엄청나게 작아 소꿉놀이하기 딱 좋을 아궁이와 양은솥단지가 놓여 있다. 어린애가 누워도 꽉 찰것 같은 코딱지만한 방이 제법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알수 없는 쾌쾌한 공기때문에 근처에만 가도 나는 코를 쥐고 뒷걸음질 치곤 했다. 

이발소 건물과 그 일대의 땅은 아빠가 오래전에 매입하여 빈땅으로 두고 있었는데, 다른 건물은 다 철거했지만 유일하게 이발소 하나만 남아있다. 벙어리 할머니가 들어와서 살게 된건 엄마때문이라 했다. 지금까지 철거도 안하고 있는 것도 엄마의 고집때문이라고 했다. 아빠는 늘 그게 마뜩치 않아 했지만 엄마는 할머니 혼자 처리하지 못하는 행정관련 일을 도와주고 사람들과 소통의 다리가 되어주고 그 더운날 기초생활보호자를 대상으로 한 물품 수령을 대신 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날밤 나는 꿈을 꾸었다.

혼자 산밑까지 걸어올라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발소 건물이 나타난다. 그리고 주변은 모두 시퍼런 물로 바뀐다. 어느새 나타났는지 벙어리 할머니는 분홍색 사탕을 내게 내밀며 큰소리로 웃는다. 하얀색 회오리 무늬가 내 얼굴 반만큼이나 큰 사탕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회오리 무늬는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할머니도 돌고 이발소도 돌고 시퍼런 물은 어느새 소용돌이가 되어 내 주변에 높게 치솟는다. 사탕을 들고 있던 할머니의 손은 갑자기 길어지고 손톱도 길게 말려올라간다. 회오리 분홍 사탕은 나를 집어삼킬듯 입을 크게 벌리며 점점커지고 있다. 나는 또 갑자기 퍼프 소매가 달린 블라우스와 멜빵 원피스를 입은 도로시가 되어 이발소 문한쪽을 움켜지고 간신히 집안으로 들어선다. 문이 쾅 닫히면서 잠이 깬다. 울고 싶어 진다. 낮에 마당 한켠에 묻어 놓은 분홍 사탕이 생각 난다. 개미들아~ 얼른 그 사탕을 다 먹어주렴.

동네에 잔치라도 있는 날이면 엄마는 이발소 할머니를 데리고 다니셨다. 나도 나지만 동네 아주머니들도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뭐하러 또 데려왔느냐라고 대놓고 눈을 흘기는 아주머니도 있었지만 엄마는 모른체 했고 그런걸 아는지 모르는지 할머니는 연신 방글거렸다.

그러던 어느날이다. 그날도 언니가 숙제한다고 펼쳐 놓은 공책에 낙서를 해서 엄청 구박당한 후에 (나는 숙제를 도와주려고 했던 것뿐이었다.) 따뜻한 아랫목에 배를 깔고 누워 언니가 작년에 쓰다 버린 국어 노트에 열심히 글자를 그려가고 있을때다. (나는 취학전에 글자를 배워본 적은 없었지만 글씨를 엄청 잘 썼다고 한다.)

다급하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중간중간 이상한 비명같은게 들리는걸 보니 아무래도 벙어리 할머니가 온것 같다. 할머니는 아빠를 아주 무서워서 해서 웬만하면 우리집에는 찾아오지 않는데 무슨 일일까. 대문을 열어본 우리는 할머니의 행색에 너무도 깜짝 놀란다. 그렇지 않아도 허름한 셔츠는 목이 다 늘어나 가슴께로 흘러내려 빨간 내복이 다 보인다. 몸빼 바지 밑으로 드러난 맨발은 흙투성이고 머리엔 검불과 진흙이 잔뜩 묻어 있다. 아. 소매자락과 목언저리엔 핏자국도 얼핏 보이는것 같다. 

엄마는 얼른 언니와 나를 이웃집에 가라 하고 아빠를 오빠방에 가서 자라고 한다. 나는 이웃집 가기전에 안방 문틈으로 몰래 들여다본다. 할머니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며 죄지은 사람처럼 웅크려 있고 엄마는 뭐에 화가 났는지 씩씩거리면서도 할머니 등을 쓸어준다. 엄마는 곧 따뜻한 물을 커다란 플라스틱 다라이에 받아와 더러워지고 찟겨진 옷을 벗기고 가만히 할머니를 들어가게 한다. 할머니의 눈물은 그칠줄 모른다. 뭐라 말하고 싶은게 있긴 한거 같은데 도무지 뭐라 하는지 더욱 알아들을수가 없다.

다음날 아침에 엄마와 할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옆집 아주머니께 신신당부를 했음에도 밤새 소문이 난건지 마을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린다. 동네 못된 청년이 술을 먹고 못된짓을 했다느니 도박에 빠진 아들이 찾아와 행패를 부렸다느니. 아무도 진상을 알려고도 알수도 없다. 오직 할머니와 할머니 통역관인 엄마만 알수 있으리라.

그날 이후로 나는 할머니를 더이상 만날수 없었다. 이발소 건물은 금새 철거가 되고 집터만 덩그러니 남아 있고 분홍 사탕은 전설속으로 사라졌고 나는 더이상 도로시 꿈을 꾸지 않게 되었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고 "비밀의 다락방"에서 성장의 고통을 겪고 있는 사이 엄마도 많이 아프셨나 보다. 진통제를 달고 사셨고 식사도 잘 못하셨고 자주 병원에 다니셨다.

이후 시간이 꽤나 더 흘러 할머니를 다시 만난건 엄마의 장례식날이었다.

다음편에 계속 - 

-  다른 이야기 (비밀의 다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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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짱맨이 스윽 지나갑니다^^
즐거운 스티밋 라이프!

감사합니다. 러브 스팀잇!

엄청 슬픈 전개가 될것같아요 ㅠㅠ

아직 안 썼는데 너무 슬프게는 안 쓸께요. 벌써 눈물이 또르르 ㅋ

재미있네요. 잘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감사합니다. 굿밤 되세요.

뭔가 찡한 느낌이 있네요...정많던 엄마의 죽음도 굉장히 충격적이고...생각만해도 눈물이 핑 도는데..또 엄마의 장례식에서 다시 만난 할머니라...다음편 매우 기대됩니다!

오~ 너무 슬프지는 않게 할머니 이야기해드릴께요. 기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200스파 달성 첫 보팅하러 왔습니다!!
슬픈분위기 예상되지만, 다음 편이 기대되는 글이네요

조금은 심파일수도 있겠지만 최대한 배제해볼게요 200 스파 축하드려요. 저 오늘 파워업했어요 ㅎㅎ

완전 몰입해서 읽었어요! 현기증 나니까 다음편 빨리 올려주세요..

아놔! 왜 하이디님만 보면 웃음이 나지요ㅋㅋ 너무 애정하는거 아냐욧!

마지막 줄이 가슴을 후벼파네요. 다음 편은 큰 용기를 내서 봐야 할 듯...ㅠㅠ

좋은 표현 감사합니다. 즉석에서 쓴 글이라 앞으로 어찌 될런지는 그날 컨디션에 따라서...

스팀잇 소설가 한 분 탄생인가요?ㅎㅎ
1000 스팀 파워업 기념 이벤트로 50% 보팅해드렸습니다.

자전적 소설이라고 해두죠. 소설가는 아니고요 ㅋ 그냥 재미로 한번 써봤습니다. 1000 파워업 축하드려요. 멋지십니다. 보팅도 감사하고요!

마지막 문장을 읽고 잠시 가슴이 먹먹해서 다음 편으로 바로 넘어가지 못했네요. 세밀한 묘사 덕분에 어머니와 함께 시장을 다니는 아이의 모습, 허름한 이발소 건물의 모습이 머릿속에 잘 그려졌어요. 저도 비슷한 건물, 장터에 갔던 기억도 나고요. 저도 어제 오즈의 마법사 얘기를 잠깐 써서 도로시가 반가웠어요. 어릴 적에 정말로 좋아했던 책이라 그만큼 감정 이입이 더 되네요. 불안한 마음으로 다음 편 읽으러 갑니다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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