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도구의 감각

in #kr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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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과 스마트폰이 기록할 수 있는 모든 기능을 제공한다고 할지라도 노트와 펜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의미 없는 끄적임과 일목요연한 계획표가 순서 없이 뒤섞여 고스란히 시간의 흔적으로 남는다. 이곳에 남기는 글들도 전부 노트에 적었던 생각의 기록들을 정리하고 엮어서 풀어나간 것들이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것들을 키워드로 적을 때도 있고, 하나의 문장으로 풀어서 적어 놓을 때도 있다. 형태를 알 수 없는 미완성의 도형일 때도 있다.

기억하기 위해서라면 스마트폰의 메모도 꽤 괜찮은 기능을 하지만, 쓰는 순간의 감각은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생각을 정리하게 해 주고 그 자체로 감성을 충족시켜 준다. 쓰는 행위가 새로운 생각을 연이어 쓰게 만드는 셈이다.

내가 문구 덕후인 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그리 다양한 문구를 사모으지도 많이 알고 있지도 못하다. 다만, 한동안 자주 입는 옷을 교복이라 부르듯 나에게 찰떡같이 잘 맞는 문구를 만나면 그것이 한동안 나의 교복이 되어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의 펜이나 노트를 고집하거나 질릴 때까지 쓰지는 않는다. 가끔 집안의 구조를 바꾸면 새로운 기분이 드는 것처럼 기분에 따라 가끔씩 바꾸어 사용하는 것이 좋다. 새로운 프레임과 질감을 지닌 노트에 새로운 펜을 쓰는 것이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감각 1. 홀더 펜슬


연필인 듯 연필 아닌 연필 같은 그것의 정체는 바로 홀더 펜슬. 겉모습은 샤프 같고 그 안에는 두툼한 연필심이 들어있다. 코이누어 제품인데, 나무 대신 홀더가 심을 잡고 있는 것과도 같은 느낌이라 '홀더'라는 이름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단점이 아주 많은 녀석인데, 사용감이 약간 무겁고 쓰다가 끝이 뭉툭해져도 일반적인 연필깎이로 깎을 수 없다. 물론 내가 가진 팔로미노 연필깎이가 심을 따로 깎을 수도 있긴 하지만, 굳이 그런 도전을 해보지는 않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날로그적인 느낌을 뿜어내는 물건이기 때문에 왠지 모르게 그 모습 그대로 사용해야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필기하는 노트에 연필심이 번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 편이라 작은 스케치북에 끄적일 때 주로 사용한다. 어떻게 해도 그림과 친해지지 않는 나는 스케치북에도 결국엔 그림이 아닌 낙서나 필기에 가까운 것들을 그려 넣고 있다. 그래도 글처럼 꾹꾹 눌러쓰지 않고 스케치하듯 무언가를 끄적일 때 이 홀더 펜슬을 애용한다. 어쩌면 그저 멍 때리고 싶을 때 찾게 되는 도구가 아닌가 싶다.




감각 2. 볼펜


가장 많이 쓰는 도구는 바로 볼펜이다. 부드럽게 흘리듯 필기하기 좋은 볼펜은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쉽게 꺼내 쓰는데, 낙서를 하든 회의 내용을 적든 어떤 상황에도 참 실용적이다. 제트스트림 애용자였던 나는 순전히 펜코의 외모에 빠져 갈아타게 되었는데, 작고 가볍고 곡선인 데다가 색이 참 마음에 든다. 모던하면서도 레트로 한 느낌이 볼 때마다 만족스럽다. 내가 선호하던 심에 비해 조금 더 두꺼운 편이라서 이 볼펜을 쓰면 조금 더 필기체로 날리듯 쓰게 되는 느낌이 있다.

또 하나 애용하는 펜은 헝가리 브랜드 ico의 70이라는 펜이다. 짙은 녹색과 아이보리, 노크 부분의 빨강은 완벽하게 70년대 레트로를 완성해낸다. 이 보다 더 레트로 한 볼펜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역시나 디자인 하나 보고 사서 쓰게 되었다. 사실 사는 순간에 잠시 망설였었는데, 이유는 잉크가 파란색 뿐이었기 때문이다. 검은색에 익숙하던 나는 약간은 촌스러워 보이는 그 파란색 잉크가 왠지 사도 잘 안 쓰게 될 것 같다고 예상했지만, 막상 노란색 노트 종이와 색의 조합이 맘에 들어 자주 쓰고 있다.




감각 3. 중성펜


아무리 볼펜이 좋아도 가끔 질릴 때가 있다. 뭔가 마음이 흐릿하고 답답할 땐 볼펜의 굵고 부드러운 질감마저 둔탁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0.38의 선명한 노크식 시그노 중성펜은 정신 차리고 싶을 때 혹은 선명해지고 싶을 때 찾게 된다. 좀 더 날카롭게 계획들이나 생각들을 써 내려가야 할 때 새카만 잉크들은 마음 정리에도 어느 정도 도움을 준다.

볼펜이 주 사용품이라면 중성펜은 보조인 셈인데, 생각보다 보조가 더 많이 쓰일 때도 있다. 생각해 보니, 예전엔 이런 펜을 더 많이 사용했다. 좀 더 바짝 정신을 차리고 회의를 해야 할 일이 많았다 보니, 선택하게 되는 도구들도 자연스럽게 그에 알맞은 성향들을 고르게 되었던 것 같다. 그 많은 시간이 겹겹이 싸여 지금의 내가 되었지만, 지나간 시간들에 조금 더 유연할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늘 생각한다.




감각 4. 네임펜


네임펜은 언제 샀는지도 모르게 하나쯤은 늘 구비되어 있지만, 그다지 자주 필요하지는 않은 저렴하고 일상적이면서도 특별하지 않은 펜이다. 집에서 보다는 회사에서 더 열심으로 썼던 기억이다. 이 도구를 찾게 되는 때는 어딘가에 무언가를 써붙일 때 잘 보이라고 매직처럼 사용했던 것 같다. 매직은 너무 굵고 그러니까. 네임펜을 쓸 때 어떤 다른 어여쁜 문구들을 쓸 때의 만족감 같은 것을 느끼지는 않았다. 철저히 실용을 위한 도구일 뿐.

그러다 어느 날 문득, 기록을 위한 '쓰기'가 아닌, 그저 가만히 있지 못해 끄적여보게 되었는데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저 하얀 건 종이요 까만 건 글씨라는 정도의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타들어갈 듯 답답한 마음을 옮겨보았다. 아무런 목적 없이 쓰는 행위 속에서 신기하게도 글감이 종종 나오기도 했는데, 이 글 역시 네임펜에서 시작되었다.

이렇게 쓰는 것에 따라 나오는 생각이 다르고 기분이 전환되기도 하는데, 쓰는 도구가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감각을 주제로 글을 써보면 어떨까? 하고 정리해보기 시작하다 여기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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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에 펜으로 쓰는 습관은 창의적인 머리를 만들어주죠. ㅎㅎㅎ 저는 약한 힘으로도 써지는 플러스펜(?)을 좋아합니다. ㅎㅎㅎ

플러스펜도 쓱쓱 잘 써져서 뭔가를 떠올리기에 좋은 것 같아요. :)

ㅎㅎㅎ 옥스포드 노트에 파란색 글씨. 저도 좋아하는 조합!

조합이 좋죠! ㅎㅎ

저는 예전에 펜 정말 좋아해서 잘 써지는 펜 있으면 필요 없어도 막 사고 만연필도 사고 그랬거든요. 근데 요즘엔 정말이지 글씨를 쓸일이 별로 없다보니 만연필은 방치되어 잉크가 다 말라 비틀어졌더라고여. ㅠ

전 만년필은 특유의 느낌이 좋긴한데 가지고 다니면서 막 쓰기가 불편해서 잘 안쓰게 되더라구요. ㅎㅎ 다 각자에게 맞는 도구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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