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발상 005 | 맛은 감정일까, 나의 소울푸드

in #kr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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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만에 다시 찾은 군산 여행에서 박대와 멸치, 무말랭이, 건새우 같은 식재료들을 잔뜩 사 가지고 왔는데, 그 틈에 늙은 호박이 끼어 있었다. 크고 둥그런 늙은 호박이 더 맛이 좋지만, 깎고 자르기가 번거로워 기다란 늙은 호박을 골랐다. 똑같이 늙은 호박이라도 기다란 늙은 호박은 어딘가 조금 덜 구수한 맛이지만, 그런대로 비슷한 맛을 낸다.

늙은 호박으로 만드는 요리는 꿀호박 아니면 호박죽 둘 중 하나다. 어릴 땐 감기에 걸리거나 몸이 안 좋으면 엄마가 보양식처럼 꿀호박을 만들어 주셨다. 호박에 꿀을 넣고 끓이는 것이 요리 과정의 전부이지만, 은근한 불에 물을 살짝 넣고 끓이면서 호박에서 수분이 나와 자박자박해지는 것을 기다려야 하기에 조금은 번거롭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해 먹어 본 것 같지만, 언제나 엄마의 손을 거쳐 그 꿀맛을 맛보는 것 밖에 안 해봤다.

아무튼 그렇게 호박을 집으로 가져와 뭘 해 먹을까 고민하다 호박죽을 해 먹기로 했다. 호박을 썰어 물을 살짝 넣고 끓이다가 미리 불려두었던 찹쌀과 꿀을 넣고 계속 끓인다. 저어가면서 물을 조금씩 부어주어 바닥이 들러붙지 않게 하기 위해 나름 공을 들여야 한다. 첫맛은 역시 그 크고 둥그런 늙은 호박이 아니라서 맛이 좀 가벼운가 싶었는데, 두 번째 맛은 조금 더 깊은 듯했고, 먹으면 먹을수록 내가 만든 이 음식에 빠져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음식은 어릴 때부터 나의 소울푸드였는데 왜 난 그걸 지금 깨달았지? 싶은 생각에 이 글을 쓴다.






할머니와 이모할머니


나는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살았다. 나의 입맛은 전적으로 할머니를 참 많이 닮았다. 자두나 포도 같은 맛이 신 과일을 좋아했고, 옥수수 귀신이었다. 어릴 땐 할머니를 따라 삶은 계란을 간장에 찍어먹는 걸 즐겼고,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마늘빵은 지금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빵 중에 하나다.

할머니가 정확히 몇 남매였는지는 모르지만 7-9남매 사이 정도로 추측될 정도로 형제자매가 많았고, 그중 맏이셨다는 것만 알고 있다. 그래서 할머니의 동생분들이 인사를 드리러 종종 우리집에 오시곤 했다. 그때마다 바리바리 싸 오신 떡이나 한과, 곶감은 전부다 내 간식이었다. 그중에 특별히 한 이모할머니는 직접 만든 건포도가 들어간 식빵과 호박죽을 자주 해다 주셨다. 그 호박죽은 할머니들이 어릴 때 맛보던 것인지 이모할머니의 레시피인지는 잘 모르지만, 나에겐 '이모할머니의 호박죽'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그 호박죽은 파는 호박죽과는 달랐다. 가장 큰 특징은 찹쌀을 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찹쌀이 밥알 떠다니듯 호박과 어우러져있어 먹을 때 느껴지는 그 식감이 별미다. 내가 맛본 호박죽은 그것이 전부라서 어른이 되고 우연히 수프처럼 고운 호박죽을 맛보고 무척이나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단호박으로 만들어서 그런가 쉽게 물리고 뻑뻑하고 한마디로 맛없었다. 늙은 호박은 단호박보다 밀도는 덜한데 깊고 구수한 맛이 있어서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 김치나 깍두기와 함께 곁들어서 먹으면 끊임없이 들어가는 그런 음식이 내겐 이모할머니의 호박죽이다.






맛을 느낀다는 건


내가 그 호박죽을 좋아해서 엄마는 이모할머니의 레시피를 따라 자주 만들어주곤 했다. 이제는 엄마의 레시피가 되었고, 나도 스스로 만들어 먹을 줄 알게 되었다. 뜨끈하게 데워서 호박죽 한 그릇을 먹는데, 이영자를 따라 맛 표현을 해보고 싶은 욕구가 솟구쳐 오른다. 달달하고 구수한 호박의 뜨끈한 기운이 온몸에 흐르는 혈관 사이사이로 스며들어 보양식이 따로 필요 없고 그 자체로 감기몸살 약인 그런 맛이라고.

맛을 느낀다는 건 나의 입맛을 형성한 어릴 적 강렬한 추억과 몸이 기억하는 익숙함, 지금의 내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는 위안이 더해지는 복합적인 순간인 것 같다. 달고 매운 자극적인 쾌락보다는 심심하지만, 더 은근하고 오래가는 경험이고 그리워하게 되는 감정이다.

맛은 감각이라기보다는 감정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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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에 따라 맛이 달라지기도 하니 감정이라고 할수도 있겠네요.

맛에는 정말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

p님 호박죽을 하실 수 있으시군요! 대단해요 저도 곱게 갈아버린 죽보다는 찹쌀이 느껴지는 호박죽이 더 좋아요-

맛은 경험이고 입맛은 경험의 축적이기에 단지 감각의 영역이 아니라 주관적 감정의 총체가 맞다고 생각해요. 맛있다는 말 뒤로 얼마나 다양한 의미가 각자에게 숨겨져 있을까요 제게 맛은 그리움의 의미가 큰 것 같아요

고물님 정말 맛에는 우리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음식으로 추억을 곱씹어보기도 하고 또 위로를 받기도 하고요. :)

밀도 덜한 호박죽은 오히려 제가 알던 죽과 다르네요. 단호박으로 만든 죽은 진짜 금방 물리던데, 이모할머님 호박죽 맛이 궁금합니다. 비슷하게라도 한번 만들어볼까 싶네요. :)

꼭 늙은 호박이어야 합니다. 단호박은 단맛이 단박에 느껴지지만 쉽게 물리는 것 같아요. 늙은 호박은 정 반대에요. 맛이 은근해서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것 같아요. 늙은 호박 홍보대사가 되었네요. ㅎ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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