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마누엘 카스텔과의 대담 02 - 스페인에서 『도시 문제』까지 / 투쟁하는 젊은 사회학자 (1957-1972)

in #kr6 years ago

 /*--  Géraldine Pfliger와 Manuel Castells의 대담(2006 출간)을 번역해서 연재합니다.
2010년 경 한국어로 번역 출간 예정이었지만 현재 잠정 중단된 상태입니다. 강의 및 세미나에서 이 책을 같이 봐야 할 상황이 많아서 번역된 부분 중 일부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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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번 부분은 제1장 카스텔의 지적생애 관련 부분입니다. 

그 중 68년 5월과 관련된 2, 3 절을 올립니다. --*/ 



도시에서 네트워크로 : 카스텔과의 대담』 (2006)

제랄딘 플리제 (번역: 임동근)


 1. 스페인에서 『도시 문제』까지 / 투쟁하는 젊은 사회학자 (1957-1972)   


마누엘 카스텔의 젊은 시절은 매우 지적이고 전투적이었다. 세 번의 대 사회투쟁과 두 번의 정치적 망명. 18살, 바르셀로나 대학에서 그는 프랑코 체제에 반대하는 무정부주의 저항캠프에 참여한다. 경찰수배 중 그는 프랑스로 망명한다. 그는 파리에서 연구를 재개하며 알랭 투렌Alain Touraine 지도로 박사논문을 쓴다. 1966년 낭테르 대학의 신규 학과의 조교를 하면서 무정부주의와 자유주의 학생들과 가까워진다. 그는 그의 학생이었던 다니엘 콩방디Daniel Cohn-Bendit와 함께 1968년 5월 운동의 주요 활동가 중 하나가 되었다. 6월 프랑스에서 추방되어 그는 칠레 산티아고에 있는 라틴아메리카 사회과학과(FLASCO)의 강사로 초청된다. 여기서 그는 마을의 대중운동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도시사회운동을 처음 접하게 된다. 포블라도레스Pobladores의 발전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때론 그들 편에 참가하기도 한다. 1968-1972년 마누엘 카스텔은 무장투쟁의 위협을 부추기는 좌파 그룹들의 폭발과 아옌데Allende 정부의 정치적 곤궁을 현장에서 관찰한다. 그는 1973년 개입된 피노체트의 쿠데타의 맹아들을 잠시 보게 된다. 

젊은 카스텔의 정치적 참여의 동기와 토대는 무엇이었을까? 무정부주의, 맑스주의, 혁명의 시도 등 다양한 이데올로기적 영향들은 무엇이었을까? 정치적 참여, 젊은 도시사회학자로서의 교육, 직업으로서의 강사, 이들을 어떻게 조절했을까?  


 1.1 첫 번째 투쟁들 / 프랑코 체제의 스페인   


...

 1.2 프랑스 망명과 파리 사회학으로의 진입   


프랑스로의 첫 망명은 어떻게 진행되었습니까? 


1962년 스페인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정치경찰이 내가 혁명가 지도자 중 한명이었었고, 곧 스페인에서 무장투쟁을 시작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쓰긴 했었죠! 우린 한 번도 총을 본 적이 없었지만 말이에요. 나는 체포, 투옥, 고문에서 벗어난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경찰은 프랑스에 20세가 되는 순간 추방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국경으로 가는 길은 요상했습니다. 스페인 전역에 내 인상착의가 있었죠. 난 조직도 없었기에 친구들에게 부탁했습니다. 내 여사촌의 무정부주의자였던 약혼자가 나를 도와주겠다고 말했습니다. 페리피냥에 사는 프랑스 무정부주의자 커플이 탈출을 도와줬습니다. 그들은 아이 둘 동반의 24시간 체류허가를 받고 스페인에 들어왔습니다. 아이 중 한 아이는 14살이었죠. 그 아이를 프랑스에 남겨두고 스페인에 들어와서는 나를 14살 아이로 위장하여 프랑스로 들어갔습니다. 난 20살이었지만 겉보기는 16살쯤으로 보였기에, 짧은 바지를 입고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에 들어올 때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후 신분증 없이 기차를 탔고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파리에서는 누가 마중 나왔습니까? 활동가 집단들을 만나셨나요? 


난 노동자 조직원이었던 스페인 무정부주의자였던 옛 노동자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석공이었습니다. 그가 나를 도와 망명자 사무실로 데려갔습니다. 난 그와 함께 건물 공사장에서 일을 시작하고자 했고, 3주 후에 그 사람이 나에게 말하더군요. “이봐, 너 때문에 내가 잘리게 생겼다. 건물에는 노동자들이 있는 것처럼, 넌 머리 쓰는 것 같은 쓸모없는 일을 찾아봐라. 너 정말 꽝이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는 날 많이 도와줬습니다. 그 사람 덕분에 정치 망명자를 위한 장학금을 받았고 대학에 등록할 수 있었습니다. 매우 관대하게도 스페인에서의 법학과 경제과학 4학년 과정이수를 프랑스 2학년까지 마친 것으로 인정해줬습니다. 2년을 더 공부했고 법학과 정치경제학 세부전공으로 1964년 졸업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내 약혼녀가 프랑스에 왔고 아이를 하나 낳았습니다. 내 나이 21살이었고, 딸과 아내가 있는 나는 무직이었죠. 정치적으로는 14개 집단으로 나눠진 어찌 보면 약간 미친 조직에 참가하고 있었습니다. 파리에서의 그 집단은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어갔고 난 계속 하길 거부했습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아갑니다. 난 거기서 정말 일을 하고자 진지해졌고 그러면서 난 사회학자가 되었습니다.   


당신의 박사논문을 지도하게 될 알랭 투렌을 만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어느 날 누군가 말하더군요. “너 말야, 노동계급과 산업사회학을 공부할 수 있는 분야가 하나 있어. 너라면 이 주제에 대한 연구 장학금을 딸 수 있다.” 난 노동자 투쟁과, 아스튀리Astruies 광부들, 정치 파업이 급증하고 모두 혁명가였던 그들에 대한 논문을 쓰고 싶었습니다. 

난 노동자계급을 연구하는 사람을 찾았고, 투렌을 알게 되었습니다. 난 그를 보러 갔고, 전혀 그를 알지 못하지만 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날 도와줄 수 있습니까? 계급투쟁에 대한 논문을 쓸 수 있으면서 돈을 받을 수 있는, 당신이 ‘산업사회학’이라 부르는 뭔가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정말인가요?” 그가 막 웃음을 터뜨리더군요. “결론적으로 딱 그런 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사회학자가 되고자 한다면야 가능합니다.” 그는 내가 완전히 미쳤다고 생각했음에 틀림없지만, 나를 받아들여줬습니다. 난 법과 경제학에서 사회학으로 들어갔습니다.   


1968년 이전의 프랑스 대학은 당신이 겪었던 바르셀로나 대학과 비교했을 때 비슷한 점이 있었습니까? 68이전의 대학은 관료적이었습니다. 어떻게 그 세계에서 커나가셨나요? 


1962년에서 64년까지 팡테옹에 있던 파리-아사스 학교에서 법학과 경제학 3,4학년을 다녔습니다. 난 시간을 들여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정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난 시험 전 한 달 동안 복사물을 만들었고, 불어로 된 복사물들을 외우기 위해 하루에 15시간 동안 공부했습니다. 언제나 좋은 학점을 받았습니다. 학교에 붙어있지는 않았습니다. 스페인에서와 달랐던 점은 당시에 교수들이 치마를 입고 가르쳤다는 겁니다. 검은색 치마와 빨간 조끼. 난 매우 재미있는 교수 두 명을 발견했습니다. 그들 수업에 들어갔죠. 정치경제학의 앙리 바르톨리Henri Bartoli와 경제사상사의 앙리 드니Henri Denis였습니다. 다른 과목도 정말 잘 배웠습니다. 상법, 공법, 헌법. 프랑스의 사회보장법 전부를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인상 깊었던 또 다른 점은 프랑스 대학의 위계화였습니다. 교수, 보조선생(조교수), 보조원(조교). 또한 실질적인 작업들도 빠뜨릴 수 없겠군요. 보조원들은 정말로 학생을 통제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에게 지금껏 남아있는 방법론을 준 사람들은 그들입니다. 무슨 제안서이던 간에 서론 하나, 본론 두 부분, 결론 하나. 추론의 형식화, 그 개념들의 구조화, 수사법은 내 학문에 있어서 정통 프랑스적 문화의 수혜를 받은 것입니다. 이는 사고가 매우 탈구조화되는 영미권에 있을 때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대학 벤치에서의 토론운동이 발전했다고 느꼈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유일한 토론들은 알제리전쟁과 그 여파에 대한 논쟁이 대학 밖에서, 카르티에 라탱에서 있었습니다. 대학 안에서의 토론은 1966년, 베트남 전쟁 시기, 낭테르에서 시작된 것이었고, 난 당시 낭테르에서 보조선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62년에서 64년까지는 (대학 내 토론 문화는) 없었습니다. 여전히 높은 강단에서 볼 수 있었던 훌륭한 교수들이 있었던, 엘리트적이고, 전통적이고, 아주 잘 조직된 대학이었습니다. 바르톨리 교수는 나에게 매우 친절했었는데, 그는 스페인에서 망명했다는 사실 하나로 나를 매우 감동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일종의 낭만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당신은 곧 투렌을 만났습니다. 당신의 박사논문은 왜 당신이 원했던 계급투쟁이 아니라 파리권 산업기업입지에 대한 논문이 되었습니까? 


맨 처음, 투렌에게 아스튀리의 광부들에 대한 논문을 쓰고 싶다고, 그 외에는 관심 없다고 말했습니다. 투렌은 내가 직업 없이 공부하는 아내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 투렌은 산업기업입지 연구를 위해 파리 레지옹 지구의 주요 연구 계약을 했습니다. 이 주제는 극도로 그를 피곤하게 했었지만, 그는 연구실을 위해 돈이 필요했었죠. 그는 통계를 아는 학생을 찾고 있었고, 경제학을 내가 했었기 때문에, 사회학과 학생들 대부분보다는 제가 이 일에 적합했습니다. 투렌이 내게 EPHE(고등연구실무학교)의 연구원으로 바로 채용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산업기업 입지에 대한 논문을 쓰고, 아내와 아이를 키우기에도 좋은 급여를 받을 겁니다. 정말 좋은 일입니다.” 

난 그럴 수 없다고 답했죠. 그가 말하길, “왜죠? 정말 훌륭한 기회입니다. 또한 도시사회학은 아직 프랑스에 없는 분야이고, 앞으로 중요해지는 분야입니다. 현재 도시사회학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좀 더 생각해보라고 말했고, 난 일주일 후 거절하면서 난 아스튀리 노동자 계급에 대한 논문을 쓰고 싶다고, 자본가 계급에 종사하고 파리 지역 노동자를 착취하는 연구는 수행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혁명을 하게 될 때면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을 기업들의 입지 전략은 웃기는 것이라고 말했죠. 투렌은 나에게 그럴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들어보세요. 난 당신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당신은 아내와 딸이 있고요. 자 문제는 이렇게 갈리겠군요. 당신이 도시사회학자가 되고, 지금 바로 이 논문을 쓰고, 산업 사회학 연구소 연구원이 되든지, 아니면 지금 내가 당신을 문에서 배웅하고, 당신은 장학금을 놓치는 것이든지.” 내가 도시사회학자가 된 건 이런 거였습니다. 난 알랭 투렌의 사회학 제자가 되어야했습니다. 


파리지역 산업 입지라는 이 연구와 관련해서 처음에는 어떻게 접근하셨나요? 


전 정말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기업입지론의 통계 분석부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난 기술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고도 기술을 가진 기업들은 다른 기업들과는 전혀 다른 입지 행태를 보인다는 것을, 공간의 사회적 가치화와 근대성이라는 이미지 생산의 기준과 연결된 행태를 보인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전 그 때 이미 파리 레지옹의 남서부와 플라토 드 사클레Plateau de Saclay에서 프랑스의 첨단 기업들의 미래 공간을 파악했습니다. 내 박사논문은 곧 『산업공간의 사회학』[1975b]이라는 제목으로 산업기업 사회학의 작은 책으로 출간되게 되었습니다. 내가 20여년이 지난 후 실리콘 밸리를 관찰했을 때, 프랑스에서 관찰했던 것들이 기억났습니다만, 그 리듬은 엄청나게 빨랐습니다. 1980년대에 난, 예전 60년대에 시작했지만 이후 사회운동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방치했었던 분석들을 다시 한 것입니다.   


당신은 박사 논문을 정말 빨리 썼습니다. 2년만에요. 


네. 2년 안에 끝냈죠. 그러나 논문을 다 쓴 무렵, 24살 때, 투렌은 이미 1966-67년 낭테르 대학의 연구보조원으로 임명했습니다. 사람들이 내가 파리 대학의 보조원 중 가장 젊다고 말했었습니다.   


논문심사위원은 누구였죠? 도시사회학자가 있었나요? 


네, 있었습니다. 르페브르, 투렌, 지리학자이며 당시 가장 유명했던 도시지리학자인 장 바스티에Jean Bastié가 있었습니다. 낭테르 사회학과는 정말 꿈만 같았습니다. 투렌이 학과장이었고, 다른 교수들은 앙리 르페브르, 미셸 크로지에Michel Crozier, 페르난도 카르도소Fernando H. Cardoso가 있었습니다. 정말 대단했죠! 바로 이 과의 보조원으로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와 도시사회학과 관련해 흥미로운 작업을 했던 앙리 레이몽Henri Raymond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난 페르난도 카르도소와 절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앙리 르페브르와 앙리 레이몽과 함께 하는 도시사회학이라는 작은 장(場, milieu)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호의 문제, 사람의 인식 등을 다루는 이 도시학은 나에겐 관심이 없었습니다. 난 생산력, 입지의 논리, 정책 등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난 좀 더 정치적인 사회학을 원했습니다. 게다가 아주 급속히, 난 경험 연구에 빠져들었고, 난 지식인 대가가 되고 싶어 하는 프랑스 연구자들과는 단절하고 싶었습니다. 난 매우 훌륭한 방법론 교육을 받았는데, 왜냐하면 EHE(고등연구학교)가 통계분석, 인터뷰, 설문작성법 등을 박사과정 학생들에게 가르쳐주는 고급과정 방법론 수업을 개설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가르치는 것과 같은 사회학 기초 방법론이 중요했었습니다. 당시에 프랑스 어디에서도 가르치지 않았던 파리 속의 미국사회학이었습니다. 우린 우리식으로 봤을 때 연구할 줄 모르는 지식인들, 수다 떨고 철학자처럼 글 쓰는 사람들이었던 부르디외Bourdieu나 르페브르와 단절하고 싶었습니다. 아주 전투적으로, 난 철학과 반대되는 경험연구를 원했습니다.   


파리 사회학 분야에서 당신은 어떻게 변해갔습니까? 예를 들면 조르쥐 귀르비치Georges Gurvitch, 조르쥐 프리드만Georges Friedmann, 앙리 망드라스Henri Mendras와 같은 연구자들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사회학 1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난 그들을 잘 모릅니다. 왜냐하면 난 경제학과 법학과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난 파리에서 사회학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사회학과 교육보다 현장연구가 더 흥미로웠습니다. 나는 방법론에서는 충분히 능력이 있었습니다. 국가박사의 첫 번째 내 프로젝트는 당시 내가 가장 흥미롭게 봤던 프랑스 사회학자였던 레이몽 부동Raymond Boudon과 함께 한 수학프로젝트였듯이 말이죠. 그에게는 내가 좋아하는 명쾌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난 CES(사회학연구센터)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고, 망드라스도 읽지 않았고, 그와 접하지도 않았습니다. 파리에서 사회학은 세 개의 전혀 다른 세상이 있었습니다. 난 거의 잘 모르는 망드라스와 얽힌 CNRS(프랑스 국립 과학연구센터의 세상, 대학의 세상, EHE의 세상. 대학에서는 귀르비치와 레이몽 아롱 간의 대립이 지배했습니다. 귀르비치는 그만이 이해하는 이론을 발명했죠. 그는 늘 경험연구를 매우 강조했습니다만, 아주 복잡했습니다. 토론에서 레비스트로스가 귀르비치는 결코 접근을 꿈 꿀 수도 없는 경험 자료들을 바란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소르본의 모든 학생들이 귀르비치의 연구계획에 고문당하고 있었습니다. 반대편인 레이몽 아롱은 보다 지적이었지만, 동시에 나에겐 흥미가 없었던 정말 보수적인 학자였습니다. 

나는 EHE의 세상에 속했습니다. 투렌을 경유해서 그곳에 들어간 겁니다. 난 투렌과 논문 쓰면서 사회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5명의 EN(고등사범학교) 학생들과 함께하는 EN의 매우 폐쇄적인 작은 세미나를 조직했고, 내가 거기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때를 통해 난 사회학 이론들을 처음부터 정말 잘 교육받았습니다. 대가들의 연구를 심도 깊게 공부하고, 현재의 거대 사조들을 정리하고, 정말 많이 치고받았습니다. 

아무도 투렌을 몰랐지만, 그는 그의 학생들을 돌보고 바꾸고 했습니다. EHE는 외국과의 ‘핵심 지적 협력’으로 간주된 엘리트의 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낭테르 대학은 투렌이 1966-69년 사회학과 책임자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EHE의 분교로 여겨졌습니다. 곧 모든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투렌, 카르도소, 등등. 이 당시의 프랑스 사회학은 투렌, 부르디외, 크로지에 주변에 만들어진 매우 독립적인 유인축으로 구성되었었습니다. 하지만 난 언제나 지적인 말싸움들을 싫어했고, 내 평생 정치적이고 학술적인 싸움에 참여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난 연구책임자 자리를 피해 다녔는데, 왜냐하면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이 줄어들기 때문이었습니다.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기술, 프로그램, 정보화 등이 초기단계였을 때였는데, 구체적으로 당신의 작업은 어떠했습니까? 


계량분석기술은 사실상 초기단계였었고, 아니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지도한 것이 아니라 1960년대 내가 수업을 듣던 EHE 방법론 세미나에서, 우리는 천공카드로 컴퓨터 작업을 했습니다. 이 거대한 기계실에서 우리는 밤을 꼴딱 샜고, 나 또한 몇몇 프로그램 기초들을 배웠습니다. 우리에겐 이것이 매우 중요했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 세상을 파악하기 위한 모든 가능성들을 탐구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컴퓨터가 고장 났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미국에서 공부한 유고슬라브 동료가 있었는데, 그가 말하더군요. “있잖아요, 우리 컴퓨터 없이 요인분석으로 이거 할 수 있거든요!” 그러고는 그가 우리에게 보여줬습니다. 우리는 로가리듬 용 종이를 갖고 와서 그림을 그리고 투명한 종이 세장을 창문에다 붙인 다음, 일치되는 축들의 좌표값들을 찾아냈습니다. 우린 투명종이에 회귀분석도 했죠. 그 순간 난 통계 메커니즘을 잘 이해하게 되었고, 내가 완벽히 구사할 수 있는 기술이기 때문에, 이후 살면서 요인분석을 무수히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나는 인터뷰 기술을 내 모든 학생들에게 매우 빨리 가르쳤습니다. 설문지를 만들고, 인터뷰 진행에 대해서 얘기합니다. 매우 전술적으로, 하지만 조작은 하지 않는 것,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다양한 기술들, 그 한계들, 등등을 말입니다.   


낭테르에서 당신의 수업은 어떠했습니까? 학생들의 사회학적 프로필은 어떠했나요? 


낭테르 대학은 일종의 빈민촌 중에서도 빈민촌으로, 교실은 가건물로 지어진 끔직한 곳이었습니다. 우리는 복사기도 없이 가르쳤고, 학생은 마당에 앉아야만 했습니다. 학생들만 놓고 보면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낭테르 대학의 학군은 인근 빈민촌 학생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16구의 부유층 자제들이었습니다. 낭테르는 핵심적인 공산당 시정부가 집권한 빈민촌 옆에 있던, 개 같은 환경 속의 망가진 대학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문 및 사회과학대학의 사회학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은 뇌일리-쉬르-센느와 16구의 부자동네에서 온 학생들이었습니다. 사회학은 특히 여자들이 많았습니다. 여학생들은 정말 모델 같았고, 옷을 잘 입고 다녔습니다. 이후 그들은 빈민촌인 옆 동네에 살던 가난한 알제리인들에게 영향을 받아 좌파가 되었습니다. 

나는 교과과정의 중심에 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낭테르에 도착했던 첫 해부터 난 박사과정을 가르쳤으며, 보통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학생들에게 방법론 수업을 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지나고 언젠가 사람들이 나에게 학부생들을 대상으로 몇몇 방법론 수업을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그 때가 바로 학생 콩-방디Cohn-Bendit를 만났을 때입니다.   


1.3 낭테르에서 바리케이드까지/ 1968년 5월 운동   


낭테르 대학에서 1966-67년은 어떻게 지나갔나요? 당신은 1968 운동의 전조들을 보았습니까? 


두 가지 것이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하나는, 베트남 전쟁으로 팽창하는 정치화의 기운 속에 있었습니다. 전쟁은 좌파 학생들의 저항을 강화시켰고, 이는 알제리 전쟁시 발발했던 저항들과, 제3세계와의 보다 큰 연대를 위한 운동들에서 이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낭테르 대학에서는 알랭 크리빈Alain Krivine과 혁명공산주의단의 전투적 활동가들과 함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매우 활발했습니다. 난 종종 그들과 논쟁했습니다. 크리빈은 낭테르 소속이 아니라 소르본에 있었지만, 매우 좋은 친구였습니다. 그는 비록 트로츠키주의자였지만 정말 괜찮았고, 아주 교조적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베트남과 관련해서 학생운동의 핵심이 되었던 베트남 위원회가 있었습니다. 이후 바로 트로츠키에 편향된 베트남 위원회와 ‘밑으로부터’라 불리던 마오주의 위원회로 분리되었습니다. 왜냐하면 1966년 문화혁명이 중국에서 발발했고, 프랑스 학생들에게서 어떤 환상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자유발언운동’Free Speech Movement과도 같은 표현의 자유와 성해방과 관련된 운동이 있었습니다. 이는 이데올로기적이라기보다는 무정부주의적인 운동이었는데, 주로 사람과 개인의 표현에 의존했던 운동입니다.

 1968년 5월 운동은 사실상 1968년 3월 22일에 시작했습니다. 낭테르 기숙사에서 남학생들이 여학생들 방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요구하는 낭테르 학생들의 항의로 상징되었던 성해방 운동에서 출발한 것이죠. 당시까지만 해도 오직 여학생들만 남학생들 방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교육부 장관이 방문했을 때, 당시 해방운동 지도자였던 콩-방디가 장관에게 이 조치들에 대해 항의했습니다. 장관이 아주 유머있게 콩-방디에게 대답했습니다. “정말 그렇게 성욕이 강하면, 내가 지금 막 개장한 이 수영장에 들어가요.” 콩-방디가 답하길 “당신은 파시스트군요, 장관님.” 그러자 장관이 그를 대학에서 추방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며칠 후 경찰이 그를 추방하기 위해 왔을 때가 3월 22일이었고, 그 때 두 가지 것이 얽혔습니다. 베트남 위원회의 시위가 있었고, 동시에 콩-방디 퇴학을 반대하는 개인해방 운동의 학생들 시위가 낭테르 대학에서 있었습니다. 경찰이 캠퍼스에 들어오고, 학생들이 이들과 싸우면서 대학의 치안경찰(CRS)을 쫓아냈습니다. 그 때부터 운동이 급진적이었고, 이것이 3월 22일 운동이 되었습니다. 점차 대학을 점거하기 시작했습니다. 

3월 말에는 교육부가 낭테르 대학의 가장 보수적인 사회학 교수였던 프랑스와 부리코François Bourricaud에게, 이 운동이 대학 외부로 확장될 위험을 파악하기 위해, 낭테르 학생운동에 대한 연구를 의뢰했습니다. 1968년 5월 2일 연구 보고서가 교육부에 제출되었습니다. 최종결론은 이 운동이 사회에 퍼질 어떤 일도 없을 것이다. 5월 3일 카르티에 라탱에서 첫 번째 바리케이드가 쳐졌습니다!   


당신은 프랑스에 도착해서 1968년까지 개인적으로 정치적 개입을 하셨습니까? 당신은 정치적으로 무슨 활동을 하셨습니까? 


1964년까지 2년 동안 스페인 망명 집단에 계속 참여했습니다. 이 집단은 트로츠키주의가 되었고, 나는 내 연구에만 집중하였습니다. 1967년 난 이미 낭테르 대학의 연구보조원이었고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들끓는 것들을 보았습니다. 난 베트남 위원회에 참여했습니다. 이후 콩-방디가 그의 팀과 함께 발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콩-방디는 사회학과 내 학생들 중 하나였으며, 스페인 출신 망명자였던 난, 충분히 정치화된 사회학과 젊은 선생이었기 때문에 그와 의견교환이 있었고, 그들과 매우 가까웠습니다. 그 후 1968년 3월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을 때, 난 그 운동에 참여했고, 처음부터 개입했던 몇 안 되는 선생 중에 하나였습니다. 콩-방디가 지도자였고, 난 주도적 역할을 하는 10명의 전투적 활동가에 속했습니다. 또한 5월 운동에 전적으로 참여했고, 낭테르와 소르본 대학을 점거했으며 평의회들에 참가했고, 틈틈이 동료 선생들인 르페브르와 투렌을 평의회들에 데려왔습니다. 투렌은 바리케이드에 왔었습니다. 당연히 그는 매우 활동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운동의 막바지, 저항의 마지막 순간이었던 6월 7일, 플랭Flins의 르노 공장 마지막 집회에 참가했습니다. 시위는 점차 힘들어졌고 폭력적이었으며, CRS가 진압했고 난 결국 체포되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나의 추방을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매우 친절하게도 날 스페인으로 추방하고자 했고, 스페인 정부는 매우 즐거워 할 일이었죠. 그리고 투렌은 정말 놀라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네바로 추방 장소를 바꾸어 냈습니다. 이때가 내 생애 최초로 비행기를 탔을 때입니다. 파리-제네바 비행기. 난 15일간의 체류권을 가졌고 15일 안에 무슨 방안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 때 유네스코가 칠레에서 6달 동안의 교사직을 제공했습니다.   


다시 프랑스 얘기로 돌아옵시다. 개인적으로, 개념들 측면에서, 1968년 5월 운동에서 당신은 무슨 일을 했습니까? 당신은 무슨 이야기를 했었고 다른 지도자들과 당신은 무슨 차이점이 있었습니까? 


내가 한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정말 무언가를 했던 사람은 콩-방디였습니다. 그는 ‘권력을 가지면 안 된다, 권력은 해체되어야만 한다’와 같은 동의가 형성되지 않았던 급진적인 이야기들을 했습니다. 그 땐 정말 순수한 무정부주의적인 이야기였고, 내가 했던 유일한 것은 이 논의들을 권력 구조 전체에 적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난 언제나 권력을 쟁취하는 것에도, 선거를 하자는 것에도 반대했던 사람들 편이었습니다. 35년이 지난 후 보니, 그것은 68 운동의 힘이었던 겁니다. 목표는 권력을 잡는 것이 아니라 생각들을 북돋는 것, 말 그대로 진정한 문화혁명이었습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주제들은 젊은 노동자들의 조건, 이민자들의 보호, 제3세계와의 연대 촉진, 인권이었습니다. 난 스페인 이민자 노동자들과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 난 잘 들어간 겁니다.  


 68 운동의 학생들과 전투가들 속에서 여성주의자들은 어땠습니까? 


당시에 여성주의자들은 잘 안보였습니다. 그녀들은 전투적 친구들이 사회를 위해 요구하는 것들을 바로 그 친구들에게 적용하면서, 개인의 평등과 자유를 주창하면서 여성주의자들이 되어간 겁니다. 그녀들은 68 운동 속의 성차별주의를 비판하면서 여성주의자가 된 것이죠. 사실상 여성들은 어디서나 있었고, 운동 내부에서는 노동의 성적 분화를 완벽하게 재생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그녀들이 여성주의적 생각들을 발전시켜나갔습니다. 

방금 전 당신의 질문으로 돌아오면, 난 다니엘 콩-방디만큼 운동에 기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운동의 지도자이자 이데올로그였습니다. 예를 들어 난 세르쥐 쥘리Serge July와 매우 가까웠고, 그는 매우 지적이었으며, 말도 잘했습니다. 하지만 난 그가 68 운동의 사상과 정말 결합되진 않았을지 모른다고, 그는 참여하고 따라가기만 했다고 내가 말한다 해도, 그는 동의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건 정말 기이했던 집합적 창조물이었고, 난 정말 엄청난 것을 배웠습니다. 또한 나 자신의 문화적 혁명을 진행한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내 일생과 내 모든 연구에 영향을 준 경험이었습니다. 난 이 사건들이 전 사회에 걸쳐 뿌리 깊게 영향을 줬다고, 오늘날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많은 가치들이 5월 운동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정권당국 보다 개인이 먼저라는 생각, 여성주의, 소비사회 비판, 정당은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는 생각. 1968년 5월은 정당에 대한 심오한 비판, 특히 좌파의 정치관료에 대한 비판의 기회였습니다. 

또한, 1968년 5월에 공산당 같은 다른 좌파정당들의 자리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물론 정당들이 각자 과오를 범했지만, 젊은 세대의 머릿속에 전통적인 좌파정치는 1968년 5월부로 죽은 겁니다. 예를 들어 8월 22일 운동 때 낭테르 대학을 점거하고 5월이 되었을 때는 기억합니다. 이 운동의 학생들은 바리케이드에 있었습니다. 틈틈이 낭테르에 잠자러 돌아왔죠. 주기적으로 공산주의자 학생들이 문 앞에서 기다렸고, 돌아오는 학생들에게 학생들이 작성한 선언문의 소부르주와지 측면을 비판하는 유인물을 나눠줬습니다. 길에서 이틀 밤과 하루 종일을 보내며, 경찰과 싸우고, 혁명을 하고 돌아오는 학생들을, 공산주의자 학생들은 소부르주와지 취급을 한 겁니다. 하루는 운동의 전투가들이 이런 행동들에 질려버렸고 공산주의자 학생들과 싸웠습니다. 바로 여기서 난 젊은 세대들이 완전히 공산주의와 깨져버리는 방식을 보았습니다. 

나에게는 1968년 5월 운동은 이런 겁니다. 민족주의, 공산주의, 조합주의적 좌파, 각각 민족, 정당, 조직된 노동자 계급을 보호했던 이런 좌파에서 또 다른 좌파로, 문화적 변화, 개인의 자유, 선도하는 역량들에 가치를 두는 좌파로 넘어가는 순간을 보여주는 겁니다. 1968년 5월부터 이런 변화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고 전통적 좌파 모델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운동은 반자본주의적인 것만큼이나 반공산주의였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수많은 주제들이 사회당에 의해 채택되었고, 사회당은 이 젊은 세대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정치기구였습니다. 사회당은 1968년에 나왔던 대부분의 주제들을 통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새로 구축된 겁니다. ‘리베라시옹’ 저널 또한 1968년 3월 22일의 자유주의적인 분위기를 잘 보여주며, 현재의 정치와 언론 분야에서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유일한 저널이고 합니다.   


자유주의적인 이 학생운동과 전통적인 노동자 운동 간에는 무슨 관계가 있었습니까? 


난 늘 마오주의자들이 깃발을 들고 선두에 앉아있었던 큰 시위를 기억합니다. 그들이 말했죠. “학생들의 떨리는 손에서부터 노동자 계급은 혁명의 깃발을 가져갈 때가 왔다.” 이 관점에서, 마오주의자의 선언은 절대적으로 정형화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반조합주의, 반관료주의였지만 노동자편이었습니다. “우리, 학생들은 노동자들을 해방시킬 것이다!” 우리는 봉기한 젊은 노동자들, 이주자들과 서로 관계를 맺고자 노력했었지만, 조합들은 거의 우리의 적들이었습니다. 

반대로, 전체적인 운동의 차원에서 공산당뿐만 아니라 조합들도 참여했습니다. 학생운동 옆에 일련의 요구투쟁들이 있었습니다. 조합들이 당시 그들의 요구들을 던지는데 학생운동을 이용한 것이고, 정치정당들은 선거를 요구하며 드골의 붕괴를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1968년의 총파업과 학생운동은 별개였던 겁니다. 사람들을 이점을 종종 잊어버려요.   


무정부적 자유주의에 영향을 받은 학생운동들은 그들의 용어로 혁명을 시도할 야망이 전혀 없었습니까? 


언젠가 난 거의 혁명의 순간을 마주했습니다. 증권거래소가 점거되고 불에 타들어갔었던 거대한 시위가 있었습니다. 파리시 경찰서 또한 공격받고 불에 탔었습니다. 그 땐 정말 중요한 순간이었고, 난 당시 운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권력을 잡으려는 음모도 의도도 없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순간 어떻게 제도기구들이, 그들의 허상 속에서, 혁명을 구성하는지, 중앙공무원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는지를 보았습니다. 또한 어쩌다 두 명의 프랑스 무정부주의자 옆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냥총을 갖고 있었고 서로 이렇게 말을 주고받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린 혁명을 한다! 그런데, 동지, 우리 어디로 가지?”   


그들은 바스티유를 점령하고 싶었던 것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하지만 우린 이미 증권거래소를 점령했습니다. 어느 순간 체제가 자기 자신의 위기를 생산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순간이 있었습니다. 아무도 권력의 중심을 공격하길 원하거나 공격할 수 없었던 반면, 공공기관들은 충격에 휩싸였고 몇몇 공무원들은 도망갔습니다.   


당신 입장에선, 1968년 5월이 사상들idées의 측면에서 여전히 유지된다고 보십니까? 


나에겐 1968년 시위가 사상들의 특출한 물질적 권력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상들의 권력을 말할 수 있습니다만 그들 눈 아래 구체적으로 살고 있는 것, 이는 정말 특출한 것입니다! 사상들은 그들의 길을 만들었고, 사회는 다르게 사유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한 달 반 동안 기능을 멈추었습니다. 우린 사상들이 진보를 만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이전과 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때 정치들, 전통적인 의미의 정치들은 달라졌습니다. 공산주의자들도 그랬고, 사회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으며, 드골은 정치적으로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는 사회의 새로운 열망과의 이 격차에 결코 문 닫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드골은 군대나 국가의 힘으로 질서를 재건할 수 있음을 깨달았지만, 그의 말처럼 그의 정책적 방향을 붕괴시키는 이 “혼돈”에서 나오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후 긴 시간을 거치며, 1968년 5월은 수십 년 동안 생태학, 여성, 평등, 인권 등, 사회의 가치들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오늘날 좌파뿐만 아니라 모든 우파정당들도 이 새로운 가치들에 따름을 보여줘야 합니다. 캘리포니아에서처럼 프랑스도 이 새로운 가치들이 출현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인간 권리들과 개인 자유와 관련된 새로운 사상들은 프랑스 사회운동에서 나온 것입니다. 노예제와 반대하며 보다 기초적이었던 시민권과 관련된 미국 남부의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던 캘리포니아에서, 대학교내 시위는 낭테르에서 보던 것과 매우 유사한 것이었습니다. 베트남 전쟁 반대, 평화주의, 사람의 자유. 이 시위들 또한 미국 사회에 자유주의적인 새로운 가치를 퍼뜨리는데 기여했습니다.   


1968년 5월 이전과 이후, 당신은 이미 사회운동 연구를 시작했었습니까? 


1968년 이전에 그럴 기회는 없었습니다. 내가 도시사회학 연구를 시작하도록 투렌은 사회운동과 관련된 나의 관심을 멀리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내 논문 이후, 1968년 이후 난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고, 사회운동 연구를 착수했습니다. 1968년 말 칠레에서 라틴아메리카 발전의 사회학 및 경제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1969년 몬트리올에서 보조교수가 되었고, 도시구조와 도시사회운동이라는 두 가지 주제로 도시사회학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도시사회학에서 발표한 중요했던 첫 번째 논문이 1970년 국제사회학대회에 제출되었는데, 제목이 내 기억에는 「사회운동의 경험연구를 위한 이론적 제안」이었습니다. 이런 교류가 『도시 문제』[1972]의 사회운동과 관련된 부분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난 1968년 5월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난 연구를 위해 정치적 실천을 재료로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참여관찰을 할 의도는 없었나요? 


전혀 없었습니다. 난 5월 운동에 대하여 한 번도 쓴 적이 없습니다. 난 그걸 원하지 않았고, 전투적 활동가들이 의식이 있었고, 내가 연구 작업을 착수하고, 내가 거기에 개입했을 때만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1977-79년 난 마드리드 거리운동에 유기적으로 결합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운동들은 정말 감동적이어서 난 이 주제에 대하여 연구를 했었습니다. 난 그들에게 설명했고, 그들은 전적으로 내 의도들을 알았습니다. 난 참여관찰이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운동하는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성찰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를 제외하고는 난 이 둘을 섞지 않았습니다. 물론 개념들은 유지되고 우리 머릿속에서 이들을 구별할 수 없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1968년 이후의 대학과 관련해서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우선, 내 기억에 사회학 연구 발전에 끼친 1968년 5월의 악효과를 이야기했던 CNRS 사회학자 앙리 망드라스Henri Mendras에 대하여 물어보고 싶습니다.  

“예전에 우리가 만들려고 했던 모든 것들은 ... 이 격동에 다 사라졌다. 혁명은 낭테르 사회학과의 문제였기 때문에, 투렌은 콩-방디의 선생이었기 때문에, 사회학은 의심스러워 졌고, 반면 우리가 존경을 받고 정당성을 인정받는 것이 상당히 어려워졌다.”(망드라스, 1995, p. 168) 

이런 강한 비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프랑스 사회학은 사회와 기관들 속에 자리잡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투렌은 사회학자로서 사회학의 세상 속에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콜레쥬드프랑스Collège de France에 못 들어갔다면 그것 때문일 겁니다. 프랑스 사회학은 극단적으로 보수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늘 1968년 5월 운동에 참여한 투렌과 르페브르를 생각하지만, 절대 대다수의 사회학자들, 망드라스, CNRS의 사회학연구소(CES), 공산주의 사회학자들은 5월 운동에 반대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콩-방디에 반대했고, 소부르주아적이고 미숙한 행동이라고 운동을 폄하했습니다. 그리고 난 그런 세상 속에 있었던 거죠. 

난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정치권력은 일반적으로 사회학과 반대편입니다. 왜냐하면 사회학이 아주 무능하거나, 아주 비판적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거꾸로 사회학의 최전선에 있던 지식인들, 예를 들면 투렌 같은 사람들은 권력이 아니라 사회학 기관들에 의해 폄하되었습니다.   


계속 앙리 망드라스(1995)에 따르면, 그는 소르본의 레이몽 아롱의 연구보조원이었던 앙드레 글뤽스만André Glucksmann과 관련해서, 극도로 마오주의적인 집단들, 1968년 이후 대학의 파괴를 주도하기까지 했던, 그 집단들의 과격함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망드라스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인용합니다.(Hamon et Rotman in Mendras, 1995, p. 168)  

“뱅센느 대학이 개설된 이래, 항의의 가녀린 꽃이 찾아왔다. 정치적 혼란의 싸움에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만연했다. 앙리 베버Henri Weber, 철학과 보조원이 합리적 좌파론을 대변한다. ... 50여명의 뱅센느 적군이 돌레Dollé와 글뤽스만을 따라, 앙리 베버가 강의를 하던 방에 쳐들어온다. 『붉은 소책자』를 찢는 위협을 가하며 하나씩 일어간다. “붉은 중국 앞에 엎드려라!” 조용한 돌레가 토론에 개입하지만 글뤽스만이 이를 막는다. “장-폴, 무너지게 놔둬. 그 머리는 1940년부터 안돌아가.” 베버 창백해진다. “‘늙은이’의 암살자가 환영이 트로츠키주의자를 성가시게 하나봐.”그는 글뤽스만에게 얘기한다. “데데, 넌 불행한 웃긴 놈이야. 넌 쓸데없는 걸 이 무식한 어린놈들에게 가르치는 구나. 하지만 넌 조용하네, 너 보조 선생. 네가 대학을 파괴할 수 있단다. 넌 언제나 도망가는구나!””  

당신은 무정부주의에 영향을 받으셨고, 마오주의 운동과 가까우셨을 겁니다. 당신은 68 이후의 이 혼란과 급진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실제로 글뤽스만, 이후엔 ‘인민의 총익’이라 불리는 사람들, 플로레타리아 좌파, 등, 무정부주의적 마오주의 분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중국의 문화혁명을 프랑스에 이식하고자 했고, 따라서 대학과 모든 지적 기관들을 파괴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아주 순진했었지, 아주 폭력적이진 않았습니다. 

내 생각에는 이 움직임은 아주 짧았었습니다. 이후 곧 이런 생각들은 급진적 자유주의 논의로 빠져갔고, 이 사람들은 1970년대 말 ‘신철학자’Nouveaux philosophes의 사조에 기초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앙드레 글뤽스만, 장-폴 돌레, 혹은 베르나르-앙리 레비, 모두 급진 마오주의 사조에서 나왔던 이들이 우파 지식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좌파를 비판하다가 우파를 방어하는 쪽으로 돌아섰습니다. 68년 5월 운동은 정말,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또 다른 좌파를 탄생시킨 겁니다. 

개인적으로 난 거기에 절대 참여하지 않았고, 게다가 ‘신철학자’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프랑스 우파의 이데올로기 기초로 남아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음에도 불구하구요. 

뱅센느 대학과 관련해선 매우 총명했던 에드가 포르가 환상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모든 좌파들을 하나의 캠퍼스에 몰아놓고 서로 싸우게 놔두자. 사실상 뱅센느는 동물원 같았고, 다양한 종의 동물들이 서로 잡아먹은 겁니다. 난 늘 뱅센느의 생각에 반대했습니다. 뱅센느는 대학을 바꾸기 위해 사회에서 떠난 것입니다. 낭테르는 이와는 완전히 반대였습니다. 낭테르는 사회를 바꾸기 위해 대학에서 나온 것이었죠. 따라서 결국은, 아주 조합주의적이었습니다. 뱅센느는 대학의 모든 좌파들을 이데올로기적이고 개인적인 바이스etau 속에 갇혀버리게 만든 비상한 작업이었습니다.   


1.4 칠레 망명 / 마을운동 연구에서 혁명의 시도까지   

...

참고문헌 

  • Avalos, Raymond (1992). Le Chili. Paris : PUF. 
  • Bourdieu, Pierre (2004). Esquisse pour une auto-analyse. Paris : Raisons d'Agir Editions. 
  • Hamon, Hervé et Rotman, Patrick (1995). Génération. Paris : Le Seuil. 
  • Guisnel, Jean (1999). Libération. La biographie. Paris : La Découverte. 
  • Mendras, Henri (1995). Comment devenir sociologue. Souvenirs d'un vieux mandarin. Arles : Actes Sud. 
  • Stébé, Jean-Marc (2001). Architecture, urbanistique et société. Hommage à Henri Raymond. Paris : L'Harmattan. 
  • Thomas, Hugh (1985). La Guerre d'Espagne. Juillet 1936-Mars 1939. Paris : Robert Laf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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