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과 나(2) - Here, I stand for you

in #kr11 months ago (edited)

 신해철과 나(2) - Here, I stand for you

1. 중학교 3학년 겨울, 딱히 공부할 의지도 없이 독서실을 다니던 때, 독서실에 앉아 워크맨에 걸어둔 음악을 들으며 만화책만 보던 때, 넥스트의 앨범들만 사기에도 돈이 모자랐다. 1집에서 4집은 다 샀는데, 문제는 '넥스트 싱글'이었다. 싱글이라는 개념을 나도 음반집 주인도 잘 모르던 시절이라, Here, I stand for you와 아리랑 두 곡만 들어있는 테이프를 다른 테이프와 비슷한 가격에 팔았다. 그러다 보니 다른 앨범에 비해 순번이 좀 밀렸지만, 너무 듣고 싶었고, 너무 가지고 싶었다.

2. 독서실에서 가깝던 일산 마두역 이마트, 아마 3층이었던 것 같은 음반사에서 넥스트 싱글을 만지작거리다, 그냥 코트 주머니에 집어 넣었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얼굴이 빨개졌다. 아저씨를 힐끔 보았는데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나와서 계단으로 간 뒤엔 부리나케 뛰어 도망갔다. 독서실로 가서 노래를 들었는데, 장중한 시작과 Promise... 라는 읊조림 순간부터 닭살이 돋았다. 하루 종일 Here, I stand for you를 반복해 들었던 때, 행복했는지 아니면 자책감에 시달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3. 간이 커진 나는 다시 음반사로 향했다. 이번에는 신해철이 담당한 ‘정글스토리’ 앨범을 ‘뽀려’ 오는 것이 목표였다. 한참을 들여다보다 정글스토리 테이프를 코트에 넣었다. 아저씨를 보았는데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가려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 코트 깃을 세게 움켜쥐었다. “야, 너 주머니 까봐”, 음반사 사장님이었다.

난 너를 알아 볼수 있어, 단 한 순간에
<N.EX.T - ‘Here, I stand for you’ 중에서>

4. “경찰서로 갈까, 부모님에게 이야기할까. 너 집 전화번호 뭐야” 처음으로 도둑질을 들킨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너 전에도 훔쳤지? 지난번에 보고 또 올줄 알았어” 아저씨의 말은 귀로 지나갔고, 머릿속으로는 어떻게든 부모님에게 들키지 않고 해결할 방법이 무엇인지만 생각했다. “죄송해요, 진짜 이번이 두 개째에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무릎을 꿇고 빌자 눈물이 터져나왔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저씨는 “반성문 써와, 어떻게 써오는지 보고 결정할거야. 학생증 내놔.”라고 말했다.

5. 반성문을 써오라는 순간 나는 마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나는 읽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반성문의 달인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내내 반성문으로 위기를 모면해온 나는 나의 반성문 작성법을 ‘변증법적 반성문론’으로 이미 체계화시켜 두었다. 정- 단지 듣고 싶은 음반을 들었을 뿐인데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싶었다 / 반-그러나 걸려서 야단을 맞았다 / 합-이 야단을 통해 내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고, 앞으로는 다시 이런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내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준 사장님께 감사드린다. 큰 도둑놈이 될지도 모르는 나를 막아주신 생명의 은인이다 운운.... 이 변증법적 반성문은 읽는 이를 자연스럽게 몰입시켜 감동을 이끌어내는 장점이 있었지만, 단점도 있었는데, 바로 쓰는 내가 먼저 속아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점이었다.

(출처: 한국일보, 그런데 20년 넘게 흐른 지금도 반성문 쓰는 직업을 가질줄은 몰랐다..)

6. 어두운 독서실에 앉아 반성문을 쓰는 두어 시간 동안 엄청나게 눈물을 흘렸다. 정말로 도둑놈이 된 것 같은 내 인생이 비참했고, 이렇게 적발해 준 아저씨에게 감사했다. 다시는 도둑질을 하지 않겠다고 수십번 다짐한 반성문에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글 중간에는 당연히 이렇게 썼다.

‘앞으로 저는 저를 지켜 가겠습니다. 언젠가 만날 사장님을 위해’
- N.EX.T - ‘Here, I stand for you’를 일부 수정

사장님은 눈이 퉁퉁 부어 나타난 나의 반성문을 보고 본인도 눈가가 벌개졌고, 나는 거기서 다시 잘못을 빌고 다시는 도둑질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나는 그 뒤로, 누구의 물건도 도둑질하지 않았다.

7. 신해철은 나를 도둑질로 빠져들게 한 에덴동산의 사과였고, 마왕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확고한 도덕적인 규준을 세우게 해 준 교주였다. 일산 마두역 이마트 3층 음반사 아저씨와의 약속, 그 뒤 내가 안 훔친 음반까지도 돈을 물어내기 위해 아이들의 그림을 그려주고, 깜지를 대신 써주고, 반성문을 대신 써준 헌신, 수많은 ‘뽀리는’아이들 사이에서 굳이 적발된 운명, 그리고 신해철에 대한 나의 사랑. 나는 이 낱말들을 아직 믿는다. 영원히.

약속, 헌신, 운명, 영원... 그리고 사랑
이 낱말들을 난 아직 믿습니다, 영원히
<N.EX.T - ‘Here, I stand for you’ 중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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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반성문의 달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