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과 나(1) - 해에게서 소년에게

in #kr3 years ago (edited)

신해철과 나(1) - 해에게서 소년에게

1. 82년생인 나에게, 신해철은 큰 존재가 아니었다. 라디오에서 저음으로 이야기를 하던 이상한 아저씨, 거꾸로 들으면 ‘내가 얄리를 죽였어’라는 말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던 ‘날아라 병아리’를 만든 사람 정도로 기억했다. 나의 영웅들은 잼과 노이즈, 그 다음엔 서태지와 듀스, 그 다음에는 HOT였다.

2. 90년대 중반, 다가올 IMF를 무의식적으로 깨닫기라도 한 듯, 사회는 이상할 정도로 자신감에 넘쳐 있었다. 너도 나도 이스트팩이나 잔스포트 가방에 태극기 딱지를 붙여 두고 다녔고, '우리의 콜라'인 815 콜라가 나왔으며, 일본 펜을 쓰면 친구들에게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세상에 가장 반항적일 것 같은 기세로 욕설을 뱉어내는 아이돌의 곡 이름이 ‘애국심’이던 시대였다. 그리고 ‘우리 기술로 만든, 로봇 애니메이션’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연일 뉴스를 장식했고, 중학교 3학년이던 나와 내 찌질한 오타쿠 친구들은 그 애니메이션, ‘라젠카’의 모든 것들을 스크랩하고 손꼽아 기다렸다.

3. ‘라젠카’의 OST를 신해철이, 정확히는 신해철의 밴드였던 ‘넥스트’가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출시날을 기다려 앨범을 샀다. 연주곡이던 첫 곡, 좋은 줄은 몰라도 음향이, 사운드가 지금까지 내가 들었던 음악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좀 너무 시끄러운 것은 아닐까, 싶었지만 귀를 잡아끄는 것이 있었다. 솔직히 ‘라젠카’에 대한 의무감 때문에 일부러 들었던 것도 있는 것 같다. 그렇게 몇 번을 들은 뒤, 나는 넥스트의 다른 앨범을 사러 모아둔 용돈 전체를 들고 음반사에 갔다.

4. 막상 ‘라젠카’가 어땠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오직 넥스트의 노래 뿐이었다. 싸움 잘하는 친구들에게 주눅들고, 부모님에게 혼이 나고, 공부는 하기 싫은데, 막연히 삼국지의 영웅들이나 나폴레옹을 동경하던 아이에게, 새로운 영웅이 생겼던 것이다.

보자기를 하나 목에 메고 골목을 뛰며 슈퍼맨이 되던 그때와
책상과 필통안에 붙은 머리 긴 록 스타와 위인들의 사진들
<N.EX.T - 'The Hero>

5. 넥스트의 앨범을 모두 사 모으고,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들은 뒤 다시 테이프를 사서 그 테이프까지 늘어난 뒤에는, 차라리 이게 쌀 것 같아서 시디로 사서 수도 없이 들었다. 뒤늦게 신해철을 알게 된 사춘기 중학생의 모든 시간에 그의 노래가 있었다. 오락실을 갔다가 어머니에게 들킬 까 황급히 달려가던 시간에도, 좋아하던 아이에게 쓰던 편지 한 구석에도, 공부는 안 하고 낙서만 끄적이던 노트의 앞장에도, 신해철과 넥스트의 노래가사가 있었다.

너의 꿈을 비웃는 자는 애써 상대하지마
변명하려 입을 열지마, 그저 웃어 버리는 거야
<N.EX.T - '해에게서 소년에게>

6. 그렇게, 신(해)철에게서, 소년에게, 음악이, 메시지가, 그리고 마음이, 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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잼이 엄청 오래된 그룹 같은데 신해철 형님보다 뒤였다는 데 잠깜 흠짓 했습니다.
그런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저에게는 91 또는 92년에 있었던 환경 콘서트의 넥스트 노래가 참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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