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라이트 : 온전한 자신을 이뤄가는 길

in #kr7 years ago (edited)

문라이트를 봤다. 이 영화는 한 흑인 소년의 성장기를 다루고 있다. 이 흑인 소년을 둘러싼 환경은 공감이 어려울 정도로 비극적이다. 나는 이 소년에게 당면한 절망을 알 수 없기에 감히 동정할 수 없었다. 그 절망은 바다가 대지를 감싸안고 밀고 당기 듯 보편적으로, 동시적으로 세계에 편재하나 또한 그 절망은 개별적인 것이어서 내 자신의 숙명을 겨우 짊어지고 비틀거리는 나로서는 가엾은 흑인 아이와 함께 시름할 수 없었다. 결국 고통을 견디는 것은 각자의 몫이지 않던가. 고독한 일이다. 


영화의 연출은 포스터의 얼굴처럼, 한 대상을 세가지 객체로 분리하였다. 

 1 리틀

리틀은 무기력하다. 이 남자아이는 마약에 찌든 창녀의 아들이다. 아빠는 없고 엄마는 자신의 절망을 감당하기도 버겁다. 리틀이란 별명은 성호르몬의 불균형으로 성기가 작은데서 비롯되었다. 친구들의 괴롭힘과 엄마의 방관 앞에 마주선 리틀은 너무 어리다. 무기력은 어린 아이의 성질이다. 무기력하지 못한 아이는 이미 아이라 할 수 없다. 아이에게는 이름이 있다. 부모와 친구가, 선생님이 불러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이름이 가진 의미를 알지 못한다. 

자신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야할 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리틀을 돌봐주던 후안이란 사내는 파도가 대지를 밀고 당기는 바다에서, 개인의 중심성과 주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의 어린 시절이 황량하나, 언젠가 내가 무엇이 될지 결정해야 할 날이 올거라고. 이 말을 하는 후안은 흑인 마약상이다. 산과 악으로 인간을 분류하는 것이 얼마나 몽매한 일인가.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뉠 뿐이다.


 2 샤이런

샤이런은 자신을 둘러싼 비극의 정체를 비로소 실감한다. 적은 나의 생물학적 차별성도 내 엄마의 직업적 비도덕성도 아닌 철저히 타자의 심연 속에 존재했다. 그것은 기겁할 만큼 거대하고 단단하면서도, 너무나 멀고 희미하여, 그 몽롱함이 내 피부에 와닿을 때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자신을 매몰차게 내팽겨쳤다. 샤이런은 리틀이 막연히 알던 무기력의 실체를 직시하고 오열한다.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온전히 자신의 몫. 이제 어렸던 리틀은 자기자신만이 명징하게 드러나는 실존의 공간에 들어선다. 내 이름은 샤이런. 


이 공간에서 타자의 위로와 읍소는 허망할 뿐이다. 나는 무엇이며, 누구인가? 샤이런은 의자를 들어 자신을 둘러싼 모든 허망과 무의미함을 세차게 내리쳤다. 어른 후안은 말했다. "언젠가 무엇이 될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후안은 샤이런의 복선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인생은 후세대의 복선이다. 위대한 일을 해내거나 책을 쓰지 않아도, 마약상 따위의 인생을 산 자들도 있지만, 결국 나의 삶이란 것은 그들의 죽음을 딛고 서있다.  


 3 블랙

블랙은 샤이런의 원형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블랙은 자신의 생물학적 정체성을 용납받을 수 없는 세계에서, 스스로 존속할 수 있는 삶의 형태를 선택했다. 우리는 대체로 파도를 이겨내지 못하고 휩쓸린다. 자기를 실현하는 것은 생존과는 별개의 문제이기에 자신을 추스리고 위장한다. 친구 케빈은 리틀에서 샤이런으로, 샤이런에서 블랙으로 되어가는 과도기를 함께 했다. 케빈은 샤이런에게 금기의 개체이자, 자신의 원형이 기거할 수 있는 사회다. 세상은 케빈을 밀어내게 하고, 블랙의 마음은 그를 당긴다. 그들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실제와 실존의 경계에서 피폐한 일상에 허덕인다. 무의미한 하루하루 속에 어느날 케빈은 블랙을 떠올린다. 이들은 너무나 달라져버린 서로를 발견하지만, 무의미한 일상에 텅빈 개별적 실존은 양립할 수 없는 자폐의 공간으로 서로를 끌어당긴다.  


 이 영화의 원작은 작가 터렐 앨빈 매크레이니의「달빛아래 흑인 소년들은 파랗게 보인다」라는 희곡이다. 영화 속에서 후안의 대사이기도 하다. 존재론에서 통용되는 색깔이란 태양 조명 하에서 정의되는 제한적인 개념이다. 감각은 내가, 네가 누구인지 설명할 수 없다. 이 영화는 계속해서 "너는 누구냐?" 라는 질문과 동시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고 있다. 분명 별개의 문제다. 세상은 개인의 실존을 응원하지 않는다. 슬프게도 실존은 생존을 앞서지 못한다. 나는 자기 자아를 실현하라는 식의 대책없는 계몽적 메세지를 전달하는 자들을 긍정하기 어렵다. 

단지 흑인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달빛아래 춤추는 푸른 아이들로 살아 갈 것인가? 사실 우리는 그 누구로도 살아갈 수 없다. 달이 지면 여지없이 해가 뜨고 달빛이 흐르는 밤을 기다려야 한다. 자연의 섭리를 바꾸지 못하 듯,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사회적, 경제적 환경을 바꾸기 어렵다. 이러한 것들은 오랜 시간을 통해 개인들의 욕망이 충돌하고 버무려지고 타협하면서 형성되었다. 나는 누구의 의지도 상관없이 이곳에 던져졌을 뿐이다. 

어린 시절의 무지와 무기력은 욕망의 인지로 발전하고, 이 욕망은 사회적 합의와 도덕률, 경쟁의 한계성으로 제한된다. 심지어 사회는 실존과는 반대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해왔다. 한국의 교육은 자기다움을 억제시켰고, 대부분의 한국 조직들은 자기다움의 소멸을 강요했다. 뒤늦은 자각과 자기 실현의 발로는 대체로 자폐적 성격을 띄며 자멸했다. 궁핍하고 졸렬하기까지 했다. 개별적 실존은 충돌하고 요동치며, 조정된다. 자기 실현의 저항은 마냥 아름답지 않다. 


 영화 문라이트는 각자가 부여받은 상황에서 가능한 자기 실현의 행복으로 나아갈 것을 응원하고 있다. 생물학적 동성애자인 흑인 소년을 통해, 개별적 존재의 저항과 몸부림을 긍정한다. 우리는 주어진 생을 가급적 행복하게 살아내야 한다. 당면한 세상의 부조리를 어찌 할 수 없다해도, 생계를 유지하여 내일 당장 원치않는 출근을 하고, 원치하는 사고나 병으로 어렵게 살아간다 할지라도 말이다. 주어진 사회적 과업을 묵묵히 수행하면서도 할 수 있는한 처절하게 라도 자기실현을 위해 애써야 한다. 

부조리와 비극성을 직시하고 실존의 공간으로 들어가라. 그곳에 네가 있나니.
오늘 그들의 실존적 공간이 자폐적 공간으로 퇴색되지 않고 온전한 자기를 이뤄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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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안그래도 꼭 보려던 영화였는데 좋은 리뷰가 있네요.
중간까지 읽다가 아무래도 영화 보고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아서 일단은 팔로우하고 댓글만 달고 갑니다.^^ 또 올게요~~

네. 영화보시고 꼭 들러주세요. ^^

전 이거 뭔가 배경음악이 잘 없던가 없던가.. 안들려서 심심하더라구요. 그래서 뭐 엄청 간식 먹으면서 봤습니다.

ㅎㅎㅎ 술먹고 답글 쓰신 듯 ㅋㅋㅋ 재밌군요.

저도 조만간 꼭 보려고 마음먹은 영화였는데 이렇게 자세한 리뷰를 써주셔서 아껴봐야겠습니다..ㅠ 포스터에 그런 의미가 담겨있는 줄은 또 몰랐네요..

네. 연령도 생김새도 다른 3사람인데 참 잘만든 포스터입니다.

안녕하세요~^^
한번 봐야겠네요...감사합니다~~

네. 호불호가 갈립니다. 참고하세요. ^^

전혀 모르던 영화지만 @cowboybebop 님의 포스팅을 보고 문라이트라는 영화에 관심이 가네요^^

카비 라고 불러주세요. ^^ 찾아주셔서 반갑고 좋은 교류했으면 합니다. 팔로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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