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와 시민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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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대가리들. 이미지 출처)

진보 리버럴 집단에서 통용되는 주요한 자아형 중 하나는 기사의 서사가 아닐까? 기사의 감수성이 아닐까? 약자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강자. 약자의 다소 부당한 폭력도 너그럽게 감내하며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꾸어 나가는 고결한 도덕적 영웅. 이 마냥 아름다워 보이는 자기희생은,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문제를 치명적으로 야기하며, 또한 도덕적 허영 및 자기희생의 변태적 만족감에 취해 그 뻔한 문제점을 외면하고 만다. 그것은 결코 자기만 희생시키는 것은 아닌 것이다.

진보 리버럴이란 인간을 그 자체로 바라보는 대신 부당한 구도를 통해 재단하고 일반화하며 차별하는 데 반대하는 자들이다. 그런데 부당한 구도에 맞서 싸우면서 그들 역시도 부당하고 공상적인 구도에 의존하는 일이 벌어진다. 전형적인 흑백 이분법적 구도, 강자와 약자의 거친 이분법적 구도에 의존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것은 예컨대 약자에 속한다고 전제되는 이들의 잠재력을 오히려 외면하게 된다. 어떤 인간을 마냥 보호하고 감싸줘야 하는 존재로 보는 것은 그 인간을 무시하는 또다른 방식이다. 자신과 동등한 존재, 어떤 면에서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으며, 그 점에 대해서 비판받을 능력이 있는, 그렇게 책임을 지기 때문에 권리를 가지는 성숙한 존재로 보고 있지 않은 것이다. 성숙한 존재란 옳은 존재가 아니다. 성숙한 존재란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는 존재, 능동적으로 그것을 선택하는 존재지, 악할 수도 폭력적일 수도 없으며 결코 비판할 건덕지가 있을 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약자의 폭력은 폭력이 아니다. 그들은 그것 외에는 선택할 길이 없었을 뿐이다.」 이런 식의 시각은 약자를 동등한 시민들의 연대에 편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착시킨다. 그런데 오늘날의 소위 약자들 및 그들을 보호하는 기사들은 이러한 굴욕적인 개념, 어떠한 책임 능력도 없이 그저 구조의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희생자라는 표상에 익숙하고 그것에 달콤하게 의존한다.

선량한 남성들이 흔히 저지르던 꼴값이 있다. 과하게 여성들을 배려하고 보호하고 편의를 봐주며 그것을 당연한 매너, 강자로서의 의무로 여기는 것 말이다. 잘 배운 기사님들은 이 꼴값을 온갖 현란한 개념과 전혀 성장하지 못한 미성숙한 인격으로 반복하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격과 잠재력이라는 것을 지극히 편협하고 유치한 형태로 좁힌다. 인간을 인간이 아니라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해 바라보는 것은 그 누구보다 기사들이다.

비판을 받으면 그 약자 집단이 완전히 주저앉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공포감. 연약한 레이디에 대한 기사들의 노심초사는 오늘날 진보 리버럴의 주요한 역사 감각 중 하나다. 모든 문제를 강자와 약자의 이분법적 대립 및 핍박의 문제로 환원하고 강자 집단과 약자 집단을 일반화하는 것은 오늘날 진보 리버럴의 유일한 레퍼토리이자 밥줄이다. 그들에게는 약자라는 범주, 약자라는 일반화가 절대적으로 요구된다. 그들은 오직 약자를 지키고 심지어 약자를 위해 희생하는 기사라는 것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아내기 때문이다. 그런 짜릿한 도식이 아닌 구체적이고 '지루한' 현실, 여러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는 평범한 현실을 맞닥뜨렸을 때, 그들은 흥미를 잃거나 심지어 그런 현실을 부정한다.

더 고약한 것은, 이들이 자기들끼리만 희생하며 중세 기사도 놀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와 동일하다고 가정되는 다른 이들에게도 기사로서의 희생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그런 피학적 쾌락은 부디 너무도 여유로운 자기들끼리만 즐겨주셨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이 과정에서 앞서 본 것과는 정반대의 일반화, 그러나 동일한 논리의 거친 일반화가 작동한다. 동일한 강자-가해자 집단이라는 범주. 그들에게 부과되는 탈법적, 아니, 초법적 당위. 약자의 일반화에서는 성숙한 개인의 근본 조건을 망각한 책임 박약이 문제가 되었다. 강자의 일반화에서는 개인주의적 원칙 체계를 무시하는 단체 기합이 문제가 된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행위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에 죄의식을 가지고 약자들의 폭력을 관용할 줄 알며 보다 엄격한 법적 처우도 달게 받아들이는 강자가 되도록 요구받는다. 진보 리버럴이 이분법적 정체성의 구도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교육한다. 오늘날의 진보질은 오직 그런 강자와 약자의 이분법, 그런 정체성 정치의 토양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설령 그 토양이 명목적 구호와는 정반대되는 수확으로, 예를 들어 개인의 희생의 강요나 진보적 담론을 두른 보수적 도덕의 부활로 귀결되더라도 말이다. 이런 경직된 정체성의 구도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구체적 양상과 고통들을 왜곡하고 외면하게 마련이다. 지치고 비에 흠뻑 젖었으며 파비스마저 없는 제노바 쇠뇌병들은, 앞에서는 앵글로색슨식 화살 세례에, 뒤에서는 기사도에 취한 기사들의 준엄한 칼질과 말발굽에 도륙되어 나간다.

이 과정에서 사용되는 기사들의 비장의 무기가 바로 자기고백, 자아비판이다. 이 숭고한 도덕적 의식이야말로, 「나는 죄인이다」는 극도의 낮춤을 통해 「우리는 죄인이다」로 도약하는 고도의 테크닉이다. 「내가 무릎을 꿇은 것은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외양은 극도의 고결한 도덕, 겸허한 자기고백과 자아비판이니 기본적인 설득력과 도덕적 무게감을 손쉽게 확보한다. 그러므로 실상 그 본질이 수많은 타인들에게 거친 일반화의 올가미를 씌우는 것이더라도,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비판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기사들이 전장에서 자주 사용하는 기술, 쏠쏠한 영업 비밀이다.

약자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은 누구도 정의와 적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소외되서는 안 된다는 시민적 원칙의 맥락에서다. 모두가 개인으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보편적 원칙의 맥락에서다. 그런데 기사들은 약자들을 위해 시민적 원칙 자체를 다소 무시하고 훼손해도 된다는 듯이 행동한다. 도시의 적법한 절차와 시민의 정당한 권리를 무시하고 각종 면벌부 및 초법적 의무들을 발부한다. 그들에게 시민들이 공유하는 적법한 가치는 중요하지 않은 걸까? 그들이 처음에 적법한 가치를 지키기 위함을 내세워 병사들을 모집했음에도? 그렇다. 그들에게 도시와 시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과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강자들, 기득권들, 쳐부숴야 할 성벽만이 존재할 뿐. 기사들을 발기하게 하는 최음제적 개념·범주들이 무엇이던가? 시대정신, 역사의 요청, 혁명, 법 정초적 폭력… 하기야 기사들은 언제나 낭만적인 기사도 로맨스 문학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는 법이니까. 그들은 도시와 시민과 개인의 질서를 강자와 약자의 영구적 갈등, 정체성들의 영구적 갈등 상태로 대체한다. 약자의 해방을 향한 진보의 역사로 대체한다. 그 진보의 수레바퀴에 시민 몇몇이 깔린다 해도, 그것은 불가피한 진통일 뿐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어찌 감히 멈출쏘냐? 역사의 진보를 향해, 약자의 해방을 향해 계속 전진!

모든 것이 정체성과 역사와 진보의 문제가 될 때, 개인의 권리와 원칙, 개인의 희생과 원칙의 교란은 보이지 않거나 심지어 달콤한 개념으로 포장된다. 그들은 지구를 70억이 아니라, 각자 대체불가능한 70억이 아니라, 흑백 관계에 놓인 둘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대체불가능한 의미를 지닌 각자의 현재를 역사라는 괴물이 잡아먹는다. 오직 하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지도 위조범들이.

그들은 원칙을 존중하고 원칙 자체의 연장선상에서 합리적인 비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미리 자기들만의 독자적인 시나리오를 정해놓고 원칙이 여기에 부합할 때만 따르며 칭송한다. 그러므로 어떤 원칙에든 「역사를 거스른다」느니 「퇴행적」이느니 쉽게 딱지를 붙일 수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원칙이란 오직 강자의 기득권일 뿐이기 때문이다. 비판적 학문을 지극히 단편적이고 편협하게 「공부」하면 이런 결과가 나오는 법이다. 이들은 사회에 만연한 각종 편견에 반대하고 약자에 대한 편견에 분노하지만, 이들만큼 사회를 철저히 편견에 의존해 바라보고 저울을 멋대로 조종하려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그 편견의 권리를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떠들어대며 각종 고상한 개념들로 꾸며대는 것은 이들 외에는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개별 사건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역사적 방향에 따른 옳고 그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러므로 약자에 대한 '나쁜 편견'과 무조건 약자의 편을 우선적으로 들어줌으로써 그들의 해방에 기여하는 '좋은 편견'이 있게 된다. 기사들이 돌격을 시작하면 방향을 유연하게 전환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기사들이 자신의 실수와 오류에 대해 좀처럼 인정하고 사과하거나 수정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의 사과는 곧 역사 전체의 후퇴인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적 의미에서의 공정이 아니라 역사의 진보를 향해 계속해서 무게를 싣는 것이다. 기사는 오로지 그 무게, 그 돌격을 위해서만 산다.

이 감동적인 돌격이 은폐하는 것은 사람들을 이성적으로 규합할 수 있는 보편성의 부재다. 역사라는 거대한 미신이 은폐하는 것은 이성의 부재다. 경직된 구도, 구시대적이고 비이성적인 방법론, 원칙과 절차와 책임이라는 개념 일반에 대한 몰의식… 이런 작자들이 보편성을 제시할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것이다. 이 무능력, 이성적 기획과 설득에서의 무능력을 가리는 것이 감수성과 공감이라는 강박적·종교적 개념이다.

오늘날 가장 큰 해악을 끼치고 있는 선의는 이 나르시시스트 기사들의 경직된 기사도와 무모한 돌격일 것이다. 진보 리버럴 전체를 잠식한 패션 기사도일 것이다. 이 구제불능의 행진에서 도시와 시민의 정신, 올바른 원칙과 절차와 연대의 정신을 분리하고 견고한 진형을 구축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망나니 기사들의 멍청한 돌격에 의해 휘둘리고 교란되며 와해되고 있는 진보의 의미망을 다시 안정적으로 재정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도시의 공기를, 진정으로 연대할 수 있는 보편성의 문제를 되찾아야 할 것이다. 도시 안에서 다양한 이들과 맺어야 할 관계는 이런 자유롭고 동등한 시민들의 연대지, 그 연대를 악용하는 고루한 기사도적 서사와 힙한 감수성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완장질과 역사적으로 올바른 견강부회가 아니다. 진보가 진형을 재정비하고 원칙을 수호하는 데 계속해서 실패한다면, 진정한 보편성을 제시하는 데 실패한다면, 소속감과 신뢰감을 상실한 병사들이 도망가거나 심지어 깃발을 바꿔 들고, 그렇게 군 전체가 와해되는 꼴을 봐야 할지도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기사들은 이런 처참한 결과에 결코 책임을 지지 않는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무식하고 나약한 병사들을 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뻐한다. 그들이 욕하고 한탄할 수 있는 악마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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