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주의 ― 2

in #kr5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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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레옹 제롬, <디오게네스>. 이미지 출처)

개인은 약자가 아니다. 개인은 소수자가 아니다. 물론 이 현대적 이미지들과 개인을 결합함으로써 개인에 좀 더 온정적일 수는 있다. 좀 더 「감수성」을 가지고 「공감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 진보가, 그리고 여성들이 사회 진보-도덕과 개인주의를 결합하는 방식이다. 여성들은 모든 곳에 공감 능력을 갖다 붙인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개인주의의 한 면만을 과장하고 왜곡하는 것이다. 공감주의자들은 개인의 필연적인 차가움, 반사회적 그림자는 보지도 못하고 보호하지도 못한다. 하기야 공감주의자들에게 개인이 있겠는가? 오직 공감하며 보호해야 할 우리 편의 '약자'와 반대편에서 흉포한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늑대 '무리들', 그리고 약자를 보호하며 늑대 무리에 맞서는 나르키소스가 있을 뿐이다. 알량한 소위 감수성으로 대체 무엇을 공감할 수 있단 말인가? 그건 개인이 아니라 또래 패거리 의식의 공감 아닌가?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의 공명 아닌가? 개인이 감수성으로 파악 가능할 정도로 그렇게 진부하고 판에 박은 사회적 현상일 뿐이라면, 여고생들일 뿐이라면, 그런 무리인들끼리 실컷 공감하고 비벼 대시라.

개인에 대한 집단적 강요와 괴롭힘이라는 측면에서,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남성과 공감 능력이 뛰어난 여성은 다르지 않다. 여성 역시 권력을 잡으면 거리낌 없이 권위적이고 '남성적'인 집단 논리를 구사하며 똥군기를 잡는다. 여성들의 뛰어난 공감 능력은 친밀한 관계·집단 내부에서 작동하면서 오히려 외부의 개인, 녹아들지 않는 개인을 배척하고 적대시하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공감은 울고 있는 우리 편을 위한 것이지 우리 편을 울린 적을 위한 것이 아니다. 편들어 주는 것이지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뒷담화의 연료는 공감이다. 물론 공감주의자들은 인간의 강력한 집단 본능을 넘어서는 공감 능력의 가능성을 운운할지도 모른다. 이 이상이 공감 능력의 보편적 이미지를 형성한다. 그러나 공감 능력을 운운하는 친애하는 진보들이 공감 능력이 결핍된 불쌍한 이웃들에게 얼마나 공감을 베푸는지 떠올려 보면, 역시 무리다. 공감 담론의 유통 방식이 어떻던가? 공감 '능력'의 강조. 지능과의 연결. 반면 사랑이 능력으로, 개체 간에 우열이 갈리는 능력 개념으로 사용되고 지능에 의해 규정된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어째서 진보들은 사랑이 아니라 능력에 매혹되는 걸까?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계량적 능력 및 그를 통한 차별화를 추구하는 유사 개인 담론이 진보의 언어와 정신까지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공감 개념을 어떻게 사용하던가? 그들은 사랑하고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사람들을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규정하고 단죄하기 위해 공감 개념이 필요한 것이다. 공감에는 사랑뿐 아니라 자발성도 결여돼 있다. 공감 능력은 의무로서의 공감 개념이다. 그것은 그저 도덕성을 분배하는 편하고 무신경한 권력일 뿐이다. 실제로 많은 집단에서 손쉽게 무신경하게 끊임없이 사용되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의미의 원천으로서의 개인에는 관심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그것에 적대적이다. 공감 능력은 어떤 의미에서도 반개인적인 개념이다.

개인주의는 약자 구호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 원천의 문제다.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라는 단어는 공감하고 연대하여 보호해야 할 약자거나, 자신을 시장에 내다 팔 수 있는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 계발」해야 하는 자본주의적 행위자의 양 극단적 형태로 왜곡되어 논의될 뿐이다. 집단, 사회와 독립된 의미의 원천이자 주체로서의 개인은 한국인에게는 낯설다. 약자라서가 아니라, 소수자라서가 아니라, 개인의 권리기에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한국인에게는 낯설다. 물론 집단주의적 본능이 언제든 돌아와 개인을 뒤덮는 것은 전 세계 공통이다. 인간은 이성을 짚단 속에 묻고 함께할 때만 따뜻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분명 사회적 권리의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와의 심연적 거리를 보증함으로써 의미를 가진다. 약자-공감 담론은 물론이고 소수자 담론도 여기에 대해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철저히 우리 안의 문제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든 것을 함께와 따뜻함의 문제로 환원해 버린다. 그들은 개인을 다수 타자의 공감을 얻기 위해 수난의 표정을 짓는 이중의 약자로, 유아로 전락시킨다. 다른 사람을 위해(보험 차원으로) 울고 웃어 주는 광대로, 사회적 동물로 만들어 버린다. 그의 머리는 공감의 뭉게구름에 싸여 곧 사회적 현상이 되어 버리고 만다. 공감의 모닥불은 모든 거리와 그림자와 어둠과 혼돈을 지워 버린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빛도 지워 버리는 것이다. 공감 담론과 소수자 담론은 공감 개념과 소수자 개념 자체에 대한 모욕이다. 공감 담론은 사회 안에서도 한층 더 사회적이며, 또한 놀라울 정도로 반사회적인 담론이다. 개인은 사회인임을 인정하지만, 그 고리가 공감이라는 근본도 없는 유사 보노보적, 유사 개인적 담론이라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그것은 정신을 포기하고 유사 개인적 집단감각에 개인과 사회를 내맡기는 짓이다.

현대 진보들은 철저한 개인주의자로 보이게 마련이지만, 그들이 사랑하는 건 약자와 소수자지 개인이 아니다. 그들에게 개인은 개인 그 자체가 아니라 따뜻하고도 세련된 집단적·사회적 현상으로 이해된다. 자기 자신이 결여된 빈곤한 영혼들은 언제나 자신을 바쳐 도울 약자를, 자신을 바쳐 충성할 대의를 요구한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결여되어 있던 나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영혼은 바깥에 있다. 따라서 그들은 언제고 약자와 소수자라는 대의명분을 내건 집단적 이익을 위해, 따뜻함을 위해 개인의 권리와 존엄을 짓밟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들은 존엄한 개인을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감수성이니 공감 능력이니를 운운하는 이들이 개인주의자일 가능성은 없다. 이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문제다. 그러나 관계적·집단적 동물의 시야에서는 언제나 망각되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은 개인주의에 있어 불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 민족의 흥이란 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것, 함께 어울리는 것, 함께 떠들고 춤추는 것, 함께 취하고 토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질과 습속의 문제 이상으로 사람들, 사회, 담론이 어디에 가치를 두고 교육하며 재생산하느냐의 문제다. 그것은 강한 힘일 수 있다. 상식적으로 좀처럼 넘기 힘들 것 같은 벽도 순식간에 넘어 버릴 수 있는 역동성과 폭발력을 낼 수 있다. 함께는 가장 강한 능력이고 권력이다. 그러나 그것은 필연적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말을 하는 자, 혼자 있을 때 편안한 자, 썰렁하게 만드는 자, 느린 자, 함께 어울리지 않는 자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수반하게 마련이다. 이들은 함께함과는 전혀 다른 눈, 다른 의미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함께함의 역동성과 천편일률적인 유행, 함께하는 정의와 함께하는 마녀사냥, 정의감과 정의의 강요, 문화적 역동성과 창조성의 부재, 가장 잘 꾸미고 다니는 민족과 외면의 민족, 역동적인 변화와 다양한 개인의 부재는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빠르게 변하려면 모두가 성냥갑인 편이 편하다. 모든 건물이 각자의 색깔과 기억을 가지고 땅만 파면 유물이 나오는 곳은 다이나믹할 수 없다. 빠르다는 것은 사람들의 안테나가 자기 내면의 영혼이 아닌 바깥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지로 향하고 있다는 의미다. 「다른 사람들도 다 하는데 나도 해야지」가 자아의 구성 원리라는 의미다. 한국인은 똑똑한 민족이다. 인간 사회에서 똑똑함이란 타인, 다수, 여론, 사회적 현상에 대한 민감성이며 원활한 소통 및 적응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에는 「모든 능력은 이중의 의미를 지닌다」는 규칙도 있다.

한국인들의 강한 국가주의적 성향도 언급해야 한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피해와 수난의 민족-과거사를 통해 생산된다. 한국인들은 피해와 수난의 민족-국가와 어떤 거리 의식도 없이 꼭 매달려 있다. 여기서는 국가 교육과 민간 담론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지정학적 정세를 통해 끊임없이 현재진행형으로 재생산된다. 반면 유럽인들처럼 국가와 민족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넌더리를 낼 정도의 경험을 해 본 적은 없다. 민족-국가는 가장 높은 정신의 개인조차 중독시키는 가장 무겁고 달콤한 집단 개념이다. 신과 왕의 목이 달아난 후 스스로 반왕반신이 된 민족-국가는, 좌든 우든 엘리트든 민중이든 전근대든 근대든 모든 정신을 자신의 삼색기에 빨아들일 수 있다. 하늘도 땅도, 역사도 교회도, 애국자들의 피도. 어떤 왕도 신도 이런 권력을 누리지는 못했고 이렇게 탐욕스럽지도 못했다. 그들은 수수하고 겸손하게 독수리, 사자, 물고기, 형틀 정도에 만족했었다. 지상의 의미가 된 각자의 삼색기 아래 수많은 시체를 쌓고 나서야 유럽인들은 그 마력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담론은 언제나 이념-집단의 무서움에 대해 말할 뿐이다. 심지어 민족-집단은 이념-집단의 궁극적 치유로 제시된다. 원수가 된 두 형제를 따뜻하게 보듬는 민족이라는 어머니. 세계에서 가장 비종교적·세속적이며 또한 추가적으로 비이념적이기까지 한 동아시아인들은, 따라서 민족-국가의 영향력에 가장 취약하게 노출되어 있는 이들일지도 모른다. 민족-국가를 견제하며 그 틈으로 개인의 은신처를 마련해 줄 수 있는 종교적 세계관이나 이념적 세계관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양심적 병역 거부사를 살펴 보라. 민족-국가를 견제할 수 있는 대등한 세계관, 대등한 권위, 대등한 역사가 없으면 개인은 국민이 될 수밖에 없다. 집단은 하나일 때 가장 위험하다. 한국인에게는 국민으로서의 자랑스러운 역사는 있어도, 국가로부터 독립된 개인의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에게는 국가와 민족 자체에 맞서고 조롱하는 개인에 대한 기억과 상상력이 없다.

그럼에도 모든 개인은 필연적으로 탈국가·탈민족화되는 경향이 있다. 개인의 고유한 눈과 다양한 욕망은 뿌리를 배반하고 국경을 뛰어넘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은 애국심·애족심에서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인 충성심, 편향적이고 비뚤어진 시선, 편협하고 유치한 역사관을 본다. 이 모든 것은 개인의 요구이자 전제 조건, 즉 세계에 대한 자유로운 조망과 충돌한다. 모든 개인의 가슴에는 무시무시한 집단 감정과의 충돌에서 얻은 상흔이 남아 있다. 개인은 국가와 민족으로 환원되지 않는 독자적·이성적 자의식을 가지게 된 인간이다. 이성이란 언제나 개인의 이성이지, 국민의 이성이나 국가의 이성, 민족의 이성일 수는 없다. 이성의 빛을 통해 그는 체류형에서 풀려난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방어적' 민족주의 개념은 국가와 민족이라는 좁은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하려는 순진한 개인들을 무자비하게 린치하고 비굴한 침묵을 강요해 왔던 것이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러할 것이다. 내부의 이견에 더 가혹한 것은 언제나 방어의 논리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현대의 주류 담론은 방어 페티시와 이성 혐오증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은 방어와 저항의 정당성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방어와 저항의 이름으로 공격하고 억압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거의 모든 집단 논리는 방어를 내세운다.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일본 이야기도 해 보자. 집단주의자들은 언제나 '적' 집단을 가장 사랑하게 마련이니까. 일본은 개인주의 사회일까? 한국의 개인주의 결여에 분개하는 이들은 사생활에 대한 터치가 없는 일본인들을 부러워하곤 한다. 일본은 분명 독립된 사생활을 가진 주체로서의 개인에 대한 존중이 잘 이루어지는 사회로 보인다. 그러나 개인주의의 사상적 연원을 떠올려 보자. 일본의 개인주의에는 집단으로 환원되지 않는 개인의 존재와 의미에 대한 진지한 정신적·사회적 성찰이 전제되어 있는가? 오히려 그들에게는 집단과의 필연적인 대결 의식이라는 요소가 결여되어 있지 않은가? 일본의 '사생활 존중'은 오히려 무서울 정도로 단단하고 규칙적이며 일사불란한 집단 질서의 한 부분이 아닌가? 한국-일본인들이 「시민 의식」 혹은 「민도」라 부르는 것은 이 세련된 집단성일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권리와 이성이 아니라 집단의 규칙과 분위기를 전제한다. 그것은 개인의 권리가 아니라 개인의 몫이다. 누구든 예의 바르고 깔끔하며 선을 철저하게 지켜 주는 일본인들에게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현대인들이 전근대적 예절에 매력을 느끼듯. 관광객에게는 야사시한 얼굴이 전부니까. 눈에 보이는 것, 편한 것은 언제나 집단적 질서다. 반면 자유와 이성은 어려울뿐더러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언제나 어디서나 사람들은 집단적 회로에 쉽게 의존하게 된다.

집단에 맞서지 않고도, 이성을 사용할 용기 없이도 일본식 개인화는 충분히 가능하다. 세련된 후기 근대 자본주의가 그것을 돕는다. 단단하고 쾌적한 사생활로의 침잠, 창조와 분출보다는 수집과 오타쿠, 자유로운 토론보다는 자유로운 소비, 성장과 상승보다는 수납장의 확장, 많은 보물들에 즐거워하는 드베르그들, 더 자유롭고 진실한 비판 대신 더 쾌적한 취존, 의미의 원천이 아닌 의미로부터의 휴식, 힘의 자유로운 표현으로서의 개인이 아닌 부드러운 집단 질서의 일부로서의 お宅, 더 이상 짖지 않고 그저 먹어 대는 배부른 디오게네스, 자기 자신 때문에 고뇌하지 않고 그저 행복을 즐기다 가는 왜인의 삶은 충분히 가능하다. 누가 감히 개인의 선택에, 취향에 왈가왈부하겠는가? 전근대 집단 속에서 '분수를 아는 것'으로 불리던 것이 현대에는 개인으로 불린다. 모든 문제가 개인화된다. 예컨대 자살은 무서운 죄도, 개인의 바닥 없는 비극도 아닌 그저 민폐의 문제가 된다. 한국인들도 이제 그리 다르지 않다. 개인은 그저 정해진 재화와 서비스와 책임의 구획·향유 단위일 뿐이다. 이런 식의 개인화는 개인주의와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곤 한다. 예컨대 양심적 병역 거부 문제가 국가의 논리 대 개인의 양심이라는 구도 이상으로, 똑같은 몫을 가져야 하는 자로서의 개인 사이의 형평성 문제가 된다. 개인화는 계약서의 문제일 뿐이라서, 그 구획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넘어서는 개인의 섬세하고 창조적인 힘에 가장 쉽게 굴레를 씌우는 세련된 장치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앞으로 한국 젊은이들이 개인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라 말한다. 음? 언젠가 들었던 이야기 같은데? 하여간, 중요한 것은 어떤 개인이냐다. 어떤 개인인지를 물어야 한다. 물론 개인주의가 사회적 담론이 되는 데에는 언제나 위험과 한계가 있다. 개인은 사회적 현상이 아니며, 개인은 또한 대중이라는 존재 양태의 정반대편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을 언제나 사회와 역사 속에 놓는 세련된 현대적 담론은 인간을 머리 큰 대중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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