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만화] 만화와 애니메이션

in #kr7 years ago (edited)

나는 애니메이션이 아닌 만화를 보며 자란 세대다. 당시는 케이블 방송이 없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만화를 보려면 학교를 마치자마자 바로 집에 와야 했다.
어릴 때 만화는 내게 유일한 문화였다. 물론 볼거리가 없던 건 아니다. 영화도 있고 책도 있으며 게임도 있었다. 다만, 돈이 안 드는 건 만화뿐이었다. 하루 용돈이 삼백 원이던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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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에서 방영한 K캅스 로봇수사대


중학생이 돼서도 만화를 봤다. 기억나는 만화를 잠시 이야기하자면 ‘K캅스 로봇 수사대’, ‘몬타나 존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정도다. 제목은 또렷이 기억하지만 이 만화들이 어떻게 끝나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만화를 보는 시간이 줄었기 때문이다. 중학생쯤 되니 야간 자율학습도 했고, 친구들과 놀기도 해야 됐다. 그렇게 한두 번 빠트리더니 결국 보지 않게 됐다.
그러다 다시 만화를 접한 건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다. 같은 반 친구가 재밌다며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빌려줬는데 CLAMP의 ‘엑스(X)’라는 일본 작품이었다. 그 친구는 그걸 애니메이션이라 불렀고 엑스는 나의 첫 애니메이션이었다.

첫 애니메이션 치고 엑스의 내용은 상당히 무거웠다. 다 보고 나서도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지 못했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실 재밌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어렵기만 어렵고 뭘 말하려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엑스를 기억하는 건 첫 애니메이션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엑스는 기존의 만화랑은 많이 달랐다. 우선 소위 말하는 작화가 틀렸다. TV로 보던 만화가 둥글둥글하고 아이스러운 모습이라면 엑스는 날카롭고 어른스러웠다. 칼에 찔려 피도 튀고 주인공이 죽기도 했다. OST도 세련됐다. 구성도 만화라기보다는 영화에 가까웠다. 내겐 신선한 충격이었다.
엑스를 본 뒤 내게 이상한 기준 한 가지가 생겼다. 애들이 보는 건 만화, 어른이 보는 건 애니메이션. 난 분명 성인이 아니었을 텐데 왜 이런 기준을 뒀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애니메이션은 만화보다 성숙한 문화라고 생각했다. 만화나 애니메이션이나 같은 의미였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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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MP의 작품인 X


CLAMP의 엑스를 시작으로 난 애니메이션을 즐겨 보게 됐는데 정확히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다. 그때 접한 대다수의 애니메이션이 일본작품이었다. 그때는 일본문화가 개방되지 않아 애니메이션을 구하기 어려웠다. 대부분이 불법복제로 유통됐고 용산이나 가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한일문화 개방 이전 일본문화는 금단이었다. JPOP을 듣는 것도, 연예인을 좋아해서도 안 됐다. 어른들은 일본이라고 하면 앞뒤 안 가리고 배척했고 그들의 문화를 따르는 아이를 나무라기도 했다. 책이나 방송매체에서는 일본이름을 사용할 수 없어 어울리지도 않는 이름이나 유치한 이름으로 바뀌기도 했다. 문화를 국가차원에서 통제한 것이다.

이쯤 하면 일본 애니메이션을 안 볼 법도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난 이런 점 때문에 애니메이션을 더 봤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인간 아닌가. 금지된 문화를 즐긴다는 건 꽤나 큰 쾌락이자 나름의 일탈이었다. 거기에 쉽게 접할 수 없는 문화를 즐긴다는 우월의식도 존재했다. 그러니 애니메이션을 안 보려야 안 볼 수 있었을까.

나는 지금도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나이 먹고 무슨 애니메이션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나를 잘 몰라 하는 소리다. 내게 애니메이션은 애초에 어른의 문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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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랑 비슷한 세대이신 것 같네요. 저도 공중파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그 당시 용산 불법복제 애니로 입문을 했거든요. 저의 첫 입문은 에반게리온 극장판 이었습니다 ^^;.

저 못지 않게 어려운 걸 보셨군요. :)

오랫만에 보는 애니 글이네요 잘보고 갑니다^^

네. 감사합니다. 자주 들러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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