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으로

in #kr6 years ago

한동안 불면증에 시달린 적이 있다. 며칠 동안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일상을 보내던 나에게 대학 선배 김 형은 한 가지 조언을 해줬다. “잠을 못자는 건 멘탈과 피지컬의 밸런스가 맞지 않아서 그래. 몸은 멀쩡한데 스트레스를 너무 받으면, 누워도 잠에 들지 않고 자꾸 이상한 생각만 들고 그러더라. 너도 그렇지?” 암, 그렇고말고. 멘탈과 피지컬의 밸런스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형이 들어준 예시가 나와 똑같은 상태라 그 형의 말이 옳다고 믿었다. 형은 자신도 스트레스를 받아 불면증에 시달릴 때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면 이 밸런스를 맞추기 위해 몸을 혹사시킨다고 했다.

해결책을 찾았다는 생각에 기숙사에 돌아와 어떻게 몸을 혹사시킬지 생각해 보았다. 우선 자정이 넘었으니 단체운동은 무리였고, 기숙사에 살기 때문에 혼자 할 수 있는 운동은 제한적이었다. 그래서 그냥 걷기로 했다. 아이패드를 통해 지도를 보니, 켜자마자 목표지점이 보였다. 신석기시대로부터 한반도 문화발달의 터전이 되어왔으며 삼국시대 이래 쟁패(爭覇)의 요지가 되어온 바로 그 곳. 한강이었다.

우선 목표지는 정했고 어떻게 갈 것인지가 문제였다. 나는 부산 출신으로, 수도권의 지리에 대해 전혀 무지했기 때문이다. 네이버 지도는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직접 지도를 확대해서 살펴보니 금방 방법이 나왔다. 바로 지하철 1호선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다. 지하철 노선은 역과 역 사이에 만들어져 있고, 그 역들은 비교적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므로 그 노선만 잘 따라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걷다가 목이 마를 때 마실 이온음료 두 병과, 비상식량으로 브리또 두 개를 챙겼다.

가방을 메고 기숙사 나오다 과 동기와 만났다. 그 친구는 미친놈이니, 정신병자니 하며 욕을 퍼붓더니 “진짜로 죽을 수도 있다.”라며 나를 막아섰다. 하지만 며칠 동안 제대로 수면을 취하지 못한 내가 거기에 굴할 리 없었다. 나는 화웅(華雄)의 목을 베러가는 관운장 마냥 “해가 뜨기 전에 돌아오겠다.”며 길을 나섰다.

일단 나오긴 했는데, 막상 학교 앞을 지나 처음 보는 길이 나오니 막막했다. 지도로 보이는 길과, 실제 눈앞에 펼쳐진 길 사이의 괴리는 생각보다 컸다. 우선 4호선 상록수역까지 표지판을 따라 걷고, 그 곳에서부터 4호선을 따라 걸으며 1호선으로 환승하는 금정역까지 가기로 했다. 그런데 상록수역에 도착하자마자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지하철 노선은, 도보로 이동이 불가능한 지점으로도 이어져 있었다. 지도를 다시 살펴보니 이대로 가다가는 야간산행을 해야 할 판이었다. 그건 정말 무리라 생각하고 방향만 북동쪽을 유지하며 아무렇게나 계속 걸었다.

걷다보니 주위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다. 시간은 벌써 새벽 2시가 넘었으며, 나는 번화가로부터 상당히 많이 걸었기 때문이다. 무서운 기분이 들어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아이패드를 꺼내 카메라를 내 얼굴이 비치도록 켜놓고, 나 자신과 대화를 시도했다. 여긴 어디니, 저기 캄캄한 곳엔 누가 있을까, 음 당연히 아무도 없지 따위의 미친 소리를 내뱉으며 걷다보니,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없었다. 길을 잃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택시가 오는 것이 보였다. 하늘에 감사하며 택시에 타서 “금정역이요.”라고 했다. 그 때라도 “한양대 에리카요.”라고 했어야했다. 택시는 10분도 채 안되어서 금정역에 도착했다. 금정역에 내려서 ‘금정역은 지하가 아니라 지상에 있구나. 잘 보이네. 좋다.’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또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전철이 지하로 들어가면 지상에 있는 나는 노선을 따라 걸을 수 없다. 나는 다시 지도를 켰다.

자세히 보니 1호선은 ‘안양천’이라는 시냇물을 따라 만들어져 있었다. 일단 안양천을 따라 걸어서 서울에 진입하기만 하면, 그 때부터는 어디든 북쪽으로만 가면 한강인 것이다. 그제야 나는 안심하고 발걸음을 뗐다. 열심히 걸었다. 순조롭게 서울에 진입했다.

걷다보니 슬슬 배가 고팠다. 도로의 매연을 피해 적당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내 가슴 높이의 벽이 하나 있었고 거기에 가방을 벗어 올려놓고는 브리또를 꺼냈다. 피곤해서 무슨 맛인지도 모른 채 허겁지겁 절반 쯤 먹다보니,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먹는데 정신이 팔려 하나 둘씩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지 못했었나보다. 서둘러 브리또를 다시 싸서 가방에 넣었고 우산을 팔만한 곳을 찾으려 한참을 뛰었다. 숨이 턱에 차오를 즈음 편의점을 하나 발견했고, 감사하게도 그 편의점은 우산을 팔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무리 주머니와 가방을 뒤져봐도 지갑이 없었다. 핸드폰도 없었다. 브리또를 먹던 곳에 두고 온 것이다. 다시 부리나케 뛰어가서 보니, 감사하게도 둘 다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핸드폰은 반쯤 침수되어 켜지지 않았다. 그것은 지도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 핸드폰의 데이터 핫스팟이 작동하지 않으면, 아이패드는 오프라인이 되어 아무 짝에도 쓸모없기 때문이다.

침수된 핸드폰의 수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또 나는 이제 길을 잃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오만가지 생각이 오갔지만 결론은 ‘일단 북쪽으로 걷는 것’이었다. 우산을 사서 쓰고 걸으니 아파트가 많이 보였다. 아파트 경비 아저씨도 보였다. 새벽 4시에 비어 젖어 돌아다니는 나를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았다. 모자를 눌러쓰고 북쪽으로 걸었다. 바람이 세게 불었고 비는 오다 그쳤다했다. 우산을 써도 피하는 비보다 맞는 비가 더 많아서 나는 그냥 우산을 쓰지 않기로 했다. 좀 더 걷다보니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나는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들어, 고개를 푹 숙이고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도착한 한강은 안개로 뒤덮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문득 허무한 기분에 웃음이 나왔다. 안개가 걷힐 때까지 기다려볼까 싶었지만, 언제 안개가 걷힐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작정 기다리기엔 내 심신이 너무 지쳐있었다. 나는 그냥 돌아가기로 했다.

이상하게도 한강을 마주하고 돌아가는 내내 느낀 허무함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걸어서 한강까지 온 것은 처음인데도, 또 내 생애 유례없는 미친 짓이었는데도 말이다. 그 허무함은 황당함보다는 공허함에 가까웠다. 이제야 추측해보자면, 이는 목표를 달성한 이후 언제나 겪는 그런 허무함이 아니었나싶다. 산전수전 다 겪으며 비로소 얻게 된 성취는 대개 돌이켜보면 생각만큼 대단치 못하다. 고교 시절 그렇게 대단해보였던 대학 입시도, 시작하기 전에는 세상에서 가장 고결하고 순수해 보였던 연애도, 지나보니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목표는 그 자체보다 성취하는 과정이나, 성취하고 다가올 일들에 그 무게감이 좌우된다. 목표 그 자체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북쪽으로 걸으며 내가 느낀 관절의 통증과 근육의 피로감, 한 입 베어 문 브리또 속 양배추의 식감과 뛰어가며 정면으로 받아낸 빗물의 촉감, 그리고 택시가 있다는 안도감과 핸드폰의 침수로 비롯된 좌절. 기숙사로 돌아와 열어젖힌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수돗물의 온기와 뽀송뽀송한 이불 속의 상쾌함,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빚어낸 숙면의 쾌감. 과정 속 느낌의 향연은 한낱 한강의 안개를 보고 온 경험에 아주 자연스레 스며들어, 그 무게감을 더하고 이 미친 짓거리에 향수(鄕愁)까지 느끼게 한다.

이후에도 한강을 몇 번 더 갔지만, 여전히 ‘한강’하면 떠오르는 사건이 한강에 머무른 시간이 10분에 채 못 미치는 이 사건이라는 것은 참 신기하다. 그래도 다시 가고 싶다는 뜻은 아니다. 그 때의 한강을 떠올릴 수 없지만, 그건 전혀 개의치 않다. 나는 아직 참 잘 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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