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조금 이상한 여행기] 조지아, 수염 할머니 1

in #kr7 years ago

[어쩐지 조금 이상한 여행기] 조지아, 수염 할머니 1

터키에서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로 향하는 버스를 탄 건 해가 어둑해질 무렵이었다. 버스 안의 대부분의 사람은 터키 사람이거나 조지아 사람이었고 여행자는 우리밖에 없었다. 새카만 밤에야 국경에 도착했고 출입국 도장을 찍기 위해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다. 터키 쪽 출입국 사무소 건물에는 꽤 그럴듯한 면세점도 있었다. 그리 길지 않은 국경에는 조지아로 가는 컨테이너 차량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아마 내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조지아로 물자를 수송하는 차량일 터였다. 작고 허름한 출입국 사무실에서 도장을 찍으니 한 나라는 끝이 나고 다른 나라가 시작되었다. 크고 작은 빨간 십자가 5개가 수놓아진 난생 처음 보는 국기가 어둠 속에서 펄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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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조지아 국경. 2009

한참을 자다보니 어슴푸레하게 새어 들어오는 빛이 느껴졌다. 차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에 가까스로 실눈을 뜨고 밖을 바라봤다. 그 풍경은 굉장히 아름다웠고 비현실적이었는데, 지금까지 내가 감탄했던 풍광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아름답고도 비현실적인 풍경을 보며 흔히 하는 비유는 ‘천국’이나 ‘지상낙원’인데 확실히 그 장면은 천국이나 낙원이라고 부르기에는 괴리감이 있었다. 도로를 끼고 양옆으로 거인처럼 우거진 초록의 숲은 아름다우면서도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심연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보다는 엘프나 몬스터 같은 낯선 존재가 살 것 같은, 그래서 게임이 시작하기 전에 나오는 오프닝 동영상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자 커튼도 없는 버스의 큰 창으로 날카롭고 예리한 빛이 막무가내로 들어왔다. 빛에 무방비로 노출된 나는 그 집요한 괴롭힘에 깜짝깜짝 놀라 깨며 풍경을 보다 다시 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 이 일련의 행동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이동하는 새벽 내내 나쁜 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좋다고도 말 못할 아주 기이한 꿈을 오래도록 꾼 것만 같았다. 머리가 개운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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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빌리시 시내. 2009

트라브존에서 10시간 만에 도착한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는 침울했다. 추적추적 내린 비, 굳어있는 사람들의 표정, 굳게 닫힌 상점, 세 박자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우리가 조지아를 방문한 게 2009년 여름이었으니 2008년 러시아와의 5일간의 전쟁이 끝난 지 채 1년도 되지 않을 때였다. 트빌리시 거리의 풍경은 침울하다 못해 참혹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이는 전후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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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빌리시 시내. 2009

이미 해가 중천에 떠 뱃가죽이 등에 붙어 있었기에 우리는 배낭을 메고 우선 눈에 보이는 곳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배가 상당히 고팠고 짐도 무거웠기에 아무 데나 들어가려 했지만, 정말 아무 곳도 없었다. 식당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예 안 보였다. 터덜터덜 한참을 걸어가서야 겨우 문을 연 식당을 찾아 들어갈 수 있었다. 어렵게 들어갔지만 밥은 맛이 없었다.

날도 흐릿하고, 밥도 맛 없고, 사람들도 침울하다 보니 자연스레 좀 우울해졌다. 바로 직전까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하고, 활기찬 터키에서 여행을 했기에 더 비교가 됐다. 무거운 마음으로 힘없이 식당에서 나오는 순간 함께 있던 친구의 눈이 번뜩였다. 일 초 전까지 정말 지지리도 흥미 없던 곳이 지상 최대의 흥미진진한 곳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야야 차 안 좀 봐. 차 차”

“웬 호들갑이야…”

난 신호대기를 받아 서 있는 차 안을 심드렁하게 바라봤다. 그리고 이내 낮게 탄성을 질렀다. 예상하지 않았으나 예고된 일이었다

‘언니 조지아의 할머니들은 콧수염이 있어요’

터키 여행 중 만났던 아이의 말을 여행자의 흔한 과장이라 여기고 한 귀로 흘렸었다. 하지만 그 아이의 말처럼 길을 지나는 할머니의 인중에는 '콧수염'이 있었다. 그것도 아주 길고 검고 굵은 콧수염이. 그 아이는 허풍선이가 아니라 스포일러였던 것이다.

믿을 수가 없어 눈을 수차례 비볐지만, 그것은 완연한 콧수염이었다. 젊은 남성의 성징이라 여겨지는 바로 그 콧수염 말이다. 약간 거뭇한 내 솜털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부러 기른듯한 성인 남성의 콧수염이 할머니들의 인중에서 검고 수북하게 뭉실거렸다.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실제 우리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지 못해 서로 몇 번씩이나 되물어가며 확인했다.

“봤어?”

“야,,,저,, 저 할머니 좀 봐”

“누구 저 할머니???”

우리가 서로 바라보며 말하는 할머니는 달랐지만, 말은 통했다. 길이와 양의 차이는 분명히 있었지만, 우리의 곁을 지나는 대부분 할머니에게 하나같이 수염이 있었다는 사실만은 같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넋을 놓고 할머니들의 인중을 바라보며 쉴새 없이 중얼거렸다.

“아니. 할머니들에게 어떻게 저렇게 수북한 털이 날 수 있는 거지???”

“남자들도 저렇게 잘 안 나지 않아?”

“그래,,발모제를 바르기도 한다잖아.”

우리의 머리는 온갖 생각으로 어지러웠지만 동요를 보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는 척 했다. 행여 당신네 인중을 보는 걸 들킬까 우린 손을 잡고 걸으며 콧수염 할머니를 발견할 때마다 호들갑 대신 서로의 손을 꽈악 누르며 그 위치를 알렸다.

“야 대박”

“어머머 진짜 길어”

“저 할머니는 턱수염도 있어”.

“뭐라고??”

“구레나룻 봤어??????????”

“장난 아니다.”

“믿을 수 없어.”

우리는 온갖 감탄을 낮은 소리로 쉴새 없이 쏟아내며 서로의 손을 눌러댔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평생을 쓸 감탄사의 절반은 쓰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콧수염 할머니가 한 둘이 아닌지라 맞잡은 우리의 손은 곧 얼얼해졌다. 처음에는 흥분해서 서로의 손이 쥐가 날 정도로 쥐고 흔들었지만, 이내 손을 놓고 각자 그 놀라운 장면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할머니들의 인중을 얼마나 뚫어지게 쳐다봤던지 나중에는 할머니의 콧수염이 분신술이라도 쓰는 듯 두 세 개로 늘어나는 듯 보였고, 눈 앞에 그 거뭇거뭇한 잔상이 떠 다닐 정도였다


좀 오래된 여행 이야기지만! 재미있게 봐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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