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원의 아침묵상 / 2017. 9. 16 (토)
해원의 아침묵상 / 2017. 9. 16 (토)
■ 예레미야 2:20-28
[ 너는 몸을 굽혀 행음하도다 ]
이스라엘은 애굽의 멍에와 결박에서 해방하여 자유를 주시고 약속하신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신 극상품포도나무였습니다(시80:8-11).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 구속받기를 싫어하고 스스로 바알의 종이 되었습니다. 바알은 가나안의 풍요의 신으로서 바알을 섬긴다는 것은 신전을 섬기는 여사제들과의 음행적 관계를 의미하였습니다. 여자는 풍요의 상징으로서 여사제들과의 성적인 관계를 통해 풍요로운 결실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나안의 종교적 관습은 음행이 사회 깊숙히 파고들 수 있는 요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이스라엘이 타락하지 않도록 가나안 정복 당시에 모든 가나안의 거민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이를 어기고 그들을 노예로 삼고 가나안의 여자를 취하는 등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므로 우상숭배와 음행에 물들게 되었던 것입니다(20).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지만, 이스라엘 스스로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되었던 것입니다(21).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모든 높은 산 위에서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몸을 굽혀 행음한 것은(20), 바알이나 가나안의 다른 신들에게 더욱더 가까이 가고자 하는 의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해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22). 잿물과 비누는 옷을 깨끗하게 하는 세제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세제들로도 깨끗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죄악이 그 생활 전반에 걸쳐 깊이 뿌리내린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의 죄악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깨끗해지지 않고 오직 생명의 대속을 통해서만 깨끗하게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죄를 위한 온갖 종교 행위나 재물로도 죄사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주께로 돌아와 관계를 회복하기 전에는 긍휼을 입을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죄악 속에서 끊임없이 회개와 하나님의 심판을 촉구하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 당하며 모든 것을 잃고 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으며 부르짖었습니다. 내게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으로 인해 내가 죄를 자각한 때는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시기를 놓치면 모든 것을 잃고 고통받는 하나님의 진노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를 촉구하였지만, 이스라엘은 자신과 상관없는 말로 여겼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상숭배하지 않았으며 음행하지 않았다고 부정한 것입니다. 그들은 바알을 쫓아 가면서도 여전히 하나님 앞에 종교적 의식을 행하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형식적인 행위에 몰두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골짜기 속에 있는 네 길을 보라 네 행한 바를 알 것이니라"고 책망하십니다(23). 골짜기는 아무도 모르는 은밀한 장소입니다. 외형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종교적 행위를 다하였던 이스라엘이 은밀하게 행했던 죄악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 너 스스로가 너의 죄악을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절제할 수 없을 만큼 음행에 중독이 된 채 우상숭배와 탐욕의 노예가 된 이스라엘이 스스로 남긴 발자취들은 자기 자신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죄악을 행한 이스라엘에 대하여 "너는 광야에 익숙한 들암나귀들이 그들의 성욕이 일어나므로 헐떡거림 같았도다 그 발정기에 누가 그것을 막으리요"라고 말씀하십니다(24). 발정기의 암낙타처럼, 암나귀처럼 그들은 성욕이 이끄는대로 정욕에 따라 바알의 제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스스로 이러한 바알에 대한 제사의식을 죄로 여기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여전히 하나님 앞에 절기를 지키며 성회로 모이며 제사를 드리는 생활을 병행해 왔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에게 있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이상적인 일이되었으며, 바울을 섬기는 일은 한 해의 농사를 망쳐서는 안 된다는 현실적인 일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이스라엘의 모습이 있습니다. 여전히 신앙생활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에서 예배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지만, 세상 속에서 현실적인 이유들을 들어서 죄악을 행하기에 주저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해 "네 발을 제어하여 벗은 발이 되게 하지 말며 목을 갈하게 하지 말라"고 하시며 돌아설 것을 촉구하셨습니다(25). 그러나 오히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헛된 것이라고 말하며 자신들이 선택한 신들을 따라갔습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헛된 것으로 여긴다면 가증한 우상과 음행을 쫓아가려는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도둑이 붙들리면 수치를 당함 같이 이스라엘 집 곧 그들의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수치를 당하였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26).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을 도둑으로 비유한 것은 이들의 고의적인 죄악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즉, 이들은 사회지도층이면서도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적으로 옮고 그름의 경계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둑이 몰래 남의 탐나는 물건을 훔치듯, 하나님의 말씀을 고의적으로 배반하고 탐심을 따라 은밀히 죄악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은밀한 죄악이 만천하에 공개되고 수치를 당할 날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평안할 때에는 자신의 욕심을 따라 나무를 향하여, 돌을 향하여 절하고 섬기면서도 환란 때에 그러한 것들이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에야 "우리를 구원하소서"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27). 이는 환난날에 그들이 진정으로 의지하던 것의 실체가 무엇이었으며 등을 돌렸던 하나님의 존재가 어떤 것이었는지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를 위하여 만든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네가 환난을 당할 때에 구원할 수 있으면 일어날 것이니라 유다여 너의 신들이 너의 성읍 수와 같도다"라고 탄식하십니다(28). 모든 나라와 민족들로 부터 유다의 가증한 행위가 조롱받고 있습니다. 그들의 성읍 수 많큼이나 많았던 신들, 눈만 돌리면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만큼 흔한 나무와 돌까지도 자신들의 욕심을 따라 숭배했던 유다가 멸망할 때에 그 어떤 것도 구원의 능력이 되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그것들을 신봉하였던 그들의 행위가 조롱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서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찾게 될 것이지만 이미 진노는 시작되었고, 심판은 실행 된 후가 될 것입니다. 지도자로서 합당치 않다면 그 자리를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받을 심판이 더욱더 크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회개 촉구와 심판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핍박하였을 뿐, 하나님의 말씀을 아프게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 스스로 이미 쾌락에 중독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죄악, 나의 연약함만을 핑계삼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회개하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더 큰 수치와 고난과 환란을 당하는 것보다 지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현명한 자의 선택입니다.
<나의 기도>
하나님, 종교적 행위를 신앙이라고 착각하지 않게 하옵소서.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종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 나갈 수 있도록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하시고, 은밀히 행한 죄악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을 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