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글 ): 국밥집을 나서면서

in #kr7 years ago (edited)

계산을 치르고 나오니 눈이 한창 퍼붓고 있었다.

원래라면 눈 같은 것은 그냥 맞으면서 가는 스타일이지만, 어젯저녁부터 으슬으슬 도는 한기가 아무래도 몸살 일보 직전인 것만 같아 경솔한 행동은 삼가기로 했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 눈 좀 피하면 안 될까요 물으려다 이내 생각을 접고 담배를 꺼냈다. 주인의 인상도 좋아보였고, 약간 늦은 저녁시간대인지라 손님도 없어 굳이 묻는다면 딱히안 될 건 없어 보였지만, 안에 있는 사기꾼이 문제였다.

사기꾼? 진짜 사기꾼인지는 모른다.
다만 내가 그렇게 느꼈을 뿐.

나이는 오십 정도, 완전한 대머리까지는 아니나, 이미 거의 다름없는 머리 윗부분의 광택을 기름을 발라 펴덞은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있었다.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엔 핀까지 끼워 둘렀는데, 자주빛 가까운 분홍 배경에 반짝이는 은수로 꽃무늬가 화사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모습만 보면 넥타이 센스만 유별난 중년일 뿐이지만, 그가 나에게 있어 사기꾼이 된 이유는 패션이 주는 거부감 때문이 아니었다.

아니 글쎄. 제 말좀 들어보시라니까요. 아니, 아니, 하시겠는 말씀은 알아 내가. 알겠는데. '대표님' 솔직히, 죄송한 이야기지만 저만큼 성공 못 해보셨잖아요. 그렇죠? 여기 두 사람 모두 나만큼은 성공 못 해보셨잖아. 그렇죠. 그렇죠?

이런 식으로, 내가 밥을 먹는 동안에만 일고여덞번의 말마디를 끊어 가면서 사기꾼은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에게 열변을 늘어놓고 있었다. 바로 뒷 테이블에서 사기꾼과 마주보는 위치에 앉은 나에겐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은 두 사람이지만, 앞모습이라고 딱히 뭔가 특별한 건 없을 거라는 사실을 그들의 뒷모습이 말해주고 있었다. 스포츠로 깎은 머리, 결코 넉넉함의 상징이라고는 볼 수 없는, 붉게 그을리고 거친 피부결, 각이라곤 잡히지 않아 헐렁한 체크와 물 빠진 남색의 셔츠와 특징 없는 면 바지. 그냥 아저씨들이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서민의 이미지를 매표하는 사람들. 비록 그 중 한명이 '대표님' 이라는 호칭으로 불리긴 했어도.

들리는 대화로만 유추해 보자면, '두 서민'은 사기꾼과 일을 같이 시작하게 된 동업자 내지 직장동료인 모양으로,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뭔가의 영업소 내지는 유통 관련 사업인 듯. 지난달에 오백만원을 어쩌느니 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적어도 한 달 이상은 같이 일을 해온 듯싶었다.

저는요. 적어도 제 몸에 두르는 건 최고로 한다 아닙니까. 이거 보이시죠 (뭔가 악세사리인 것 같았지만 그걸 가리키는 손이 '대표님'의 머리에 가리는 바람에 잘 보이지 않았다.) 이게 십팔만원 짜리거든요. 요 넥타이 이거도 좀 싸게 주긴 했는데 십 팔만원은 해요. 인생 한번 살고 가는 건데 전 진짜 제 몸에 두르는 건 명품! 최고로만 골라 낍니다. 이거.

가게 안이 텅 비시피 했으니 망정이지, 가게 전체에 쩌렁쩌렁 울리도록, 거의 외치는 것이다 다름없는 목소리는 자신이 다른 건 몰라도 명품만은 신경써 입는다며, 다른 사람에게도 얼마나 많은 명품 선물을 했는가를 자랑하기 시작했다. 고향에 어렸을 때부터 행님 동생 하던 선배에겐 육십삼 만원짜리 넥타이. 어디의 사장님한테는 오십육 만원짜리, 최근에 알게 된 어떤 동생에게 제일 싸게 돌린 것이 십칠 만원. 제가 진짜 씀씀이 하나는 크거든요.

여기서 내용이 약간 방향을 틀더니,

위에 있는 사람이 돈을 어느 정도 써 줘야 아래에서 따라오게 되 있거든요? 물론 지금은. 지금은 그렇지만. 만약 나중에 대표님이 월 천 만원을 번다! 이렇게 쳐도 제가 따로 이제 대표님한테 뭔가를 더해 줘야 대표님이 절 따라오신다 이 말입니다. 대표님뿐만이 아니라 이번에 잘 되면 회사 사람들 다 전세기 한번 빌려서 동남아로 가서 신나게 놀고 올 수 있거든요? 전세기 그거 한번 쓰는 데 이천만 원밖에 안 해요. 일억이면 전세기 내고도 회사 사람들 제대로 놀 수 있습니다. 동남아, 필리핀까지 딱 전세기로 두 시간 반 걸려요. 이런 말 하긴 그렇지만 제가 돈은 좀 제대로 쓸 줄 압니다.

이렇게, 다소 기묘한 끝맺음으로 사기꾼의 명품 얘기는 끝을 맺었다. 허나 맞은편의 사람들이 조곤조곤 차분한 목소리로 몇 마디 말하는 것을 그렇게도 참기 힘들었던지,

이런 말 하긴 정말 죄송하지만, 저 정말 잘 나갔었거든요. 제가 그만큼 잘 나갔던 놈이고, 아 물론 여기도 좋은 곳이죠, 좋은 회사고. 그러니까 제가 여기 왔고 한 번 제대로 성공하려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럴러면요 대표님, 사람은 일단 칼라가 중요하거든요. 칼라. 일단 옷차림부터 제대로 차려입어야지 여기 입고 오신 것처럼 이렇게 입으면 같이 일 못해요.

라는 흐름으로, 사기꾼은 어느새 두 사람의 옷차림을 비난하는 것으로 대화의 노선을 틀어 버리고 있었다. 원체 큰 목소리에 다소 훈계조로 거드름을 피우는 말투 곳곳에서 묻어나오는 경상도식 억양까지, 실상 당사자들 앞에서 대 놓고 욕을 하는 꼴이었지만, 둘은 사기꾼에게 무어라 변변한 항의의 말조차 않고 약간의 발언권조차 잃은 채 그저 고개만(마지못해인지는 모르겠으나) 끄덕이고 있었다. 사기꾼의 워낙 몰아치는 언변에 눌린 탓도 있겠으나, 주 원인은 무어라 반박의 말만 꺼내려고 하면 즉석에서 잘라머리는 사기꾼의 일방적인 화법 때문이엇다.

대표 옆의 남자가 굳이 비싸게 차려입을 필요가 있냐는 말을 꺼내고, 그걸 받아 대표가 멋쩍게 웃으면서 우리가 입을 만한 양복이 어딨어. 라며 말하자,

아, 나 참. 사람은 칼라가 중요하다니까 그러네. 아니 진짜, 죄송한 얘기지만은, 전 성공해 봤잖아요. 저만큼 성공해 봤냐니까 그러네? 아니, 내가 대표님 무시하는 게 아냐. 절대 아니지. 그 왜 조사장님 아시잖아요? 그 양반이 땅 장사해서 돈 무지 번 양반이야. 내가 그 사장님 좀 아는데, 그 사장님 집안하고도 엔간히 친하고. 그분이 나이트클럽 사장도 해 보시고 아무튼 재산만 백억대를 가지신 분이예요. 그런 분들은 앞에서 딱 입어줘야 잡을 수 있다고. 아, 아, 알았어. 그럼 이거 먹고, 이거 먹고 가서, 내가 대표님 옷 하나 사 드릴게. 와이셔츠 흰색으로 이만 원 짜리. 넥타이는… 내가 색깔 봐서 뭐.

백억 대 재산과의 대면까지 갈 필요도 없이, 앞서 말했던 넥타이 선물들의 십분지 일조차도 안 되는 너그러운 씀씀이에 감동했던 것은 나만이었을까.

와이셔츠는 제가 이 만원짜리 사 드리고, 아시겠지만 제가 지금 돈이 없어요. 지갑에 십 만원도 없어요 지금. 하지만 내가 대표님 이 만원짜리 사 드리고, 그거 입으면 대표님 이미지부터가 쫙 달라집니다. 진짜. 사람들이 다시 보게 된다니까? 말했잖아요. 칼라가 그렇게 중요해요. 아, 그 공을 물론 나 돌리는 게 아니라, 성공해야 하잖아요. 돈 벌어야 할 꺼 아닙니까. 내가 솔직히 대표님 많이 생각하거든요?

사기꾼이 정말로 대표를 생각하는지는 알 수도 없고 알 바도 아니었지만, 제 삼자의 듣는 입장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게 하나 있었다. 사기꾼은 무언가 자신이 사는 물건을 말할 때마다 뒤에 가격을 꼭 붙여 말했다. 그게 싸건 비싸건.

내가 말한 적 있죠. 나 꿈큰 놈입니다. 내가, 내가 서울에서 일하는 데 끝까지 데리고 갈 사람 딱 스무 명 정해 놨습니다. 스무 명. 아니, 스물 네 명. 지금 딱 세명 채워 놨는데, 대표님도 알 거예요. 제가 죽으라 하면 죽는 애들. 저기 대구에 창식이, 동수. 저는 제 사람들은 확실히 챙깁니다. 진짜요. 다른 사람들도 그거 다 알죠. 저는 진짜 행동으로 보여주는 놈입니다. 전 저 믿고 따라오는 사람들 밥그릇은 확실히 챙겨요. 이거 빈말 아닙니다. 단! 내가 시키고 이끄는 대로 확실히 따라와야지. 그러면 진짜 그 사람 밥그릇은 내가 다 도맣아 주는 거죠.

얼굴을 못 보니, 어떤 표정 어떤 심중인지는 알 도리가 없지만, 대표는 고개 하나만큼은 열심히 끄덕거렸다. 옆의 사람이 화장실을 간다며 잠시 자리를 떴고, 한참 열변을 토하던 사기꾼이 잠시 휴식을 취하기로 한 듯 물을 한 컵 따라 들이켰다. 한잔 죽 들이킨 후 커어, 하면서 대표에게 다시 말을 건네는 목소리는 이전보다 훨씬 은근하고 조용한 투가 되어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시끄러운 건 여전해서, 별로 들으려고 하지 않아도 내 귀에까지 똑똑히 들어왔지만.

제가요 대표님. 진짜 잘 나갔었습니다. 제가 의류사업으로(의'료'인지 '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뒤의 맥락으로 봤을 때 '류'가 맞지 싶다) 저 지금도 부산내려가면요, 도매상들 제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거든요? 지금도 그 사람들 지방에서 저 내려오기만 기다립니다. 왜냐? 제가, 다른 애들 죄다 삼만 원에 떼어오는 거 제가 만 원씩에 내줬거든요. 제가 아직도 지방만 내려가면 왕입니다 왕. 다만 제가 가슴에 품은 한 때문에 여기서 성공하겠다고 이러는 거지. 아시겠죠 대표님. 성공해야할 거 아닙니까.

그 시점에서 화장실에 간 사람이 돌아왔고, 난 국밥 그릇을 모조리 비웠다. 더 있을 것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 한 개비의 체감시간은 생각보다 짧았다. 한 개비 더 피워 물까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고 꽁초를 하수구에 겨냥해 던졌다. 정확히 들어갔다.

눈발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그 가게 정문 선루프 밑에서 계속 얼쩡거리는 것 역시 뭔가 좀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루프 바깥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전 나는 고개를 돌려 유리창 너머 가게 안을 들여다보았다. 당연히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사기꾼은 다시금 새로운 주제의 뭔가로 침을 튀기고 있었고, 두 사람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에 대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갑작스레 피식 웃음이 터졌다.

무슨 상관이람.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가방을 우산삼아 걸음을 옮기자, 어느 사이 쌓인 눈더미가 뽀득. 발 아래 밟혔다. 주위를 잠시 둘러보다, 가까운 곳에 작은 카페 하나를 발견하고 황급히 그곳으로 뛰어갔다. 테이블 여덞 개짜리 단칸 카페는 한산했다. 입구 바로 옆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두 명의 여대생을 제외하면 나 이외 손님은 없음. 카운터로 걸어가자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친절하게도 수건을 건넸다.

작다고는 해도 나름 브랜드 체인이 있는 가게 같은데, 커피 가격이 꽤나 쌌다. 아메리카노 삼천 원. 딸기잼 곁을인
크루아상이 이천 오백원이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지금까지 카페란 커피만을 마시는 곳이었지만, 중요한 것은 아주머니가 나에게 수건을 주셨고, 가격이 쌌다.

계산을 끝내고, 구석자리 테이블에 앉아 가방에서 노트북을꺼내 펼쳤다.
눈이 그칠 때까지 당분한 같혀 있어야 할 꼴이니, 글이나 쓰면서 시간이나 때우지 뭐.

그리고 생각했다.
뭘 쓰지?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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