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딜런 공연 후기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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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금요일에 밥 딜런 내한 공연을 보고 왔다.
공연 날짜가 하필 중복(中伏)이어서 밥 옹도 한국이 이렇게 더운 나라였나 놀랬을 법한 날이었는데... 이번 주는 더 심하잖아???

원래 공연 갔다 오자마자 후기를 남기려고 했는데 공연 끝나고 바로 술 마시러 가서 진탕 마시고 주말 내내 죽어있다가 월요일부터 일폭탄 맞아서 정신을 못 차리느라 차일피일 미뤄지던 와중에 이러다간 정말 후기 남길 타이밍을 놓칠 거 같아서 생각난 김에 몇 자 끄적여 봄.

이번 공연은 밥 딜런옹의 2010년 이후 8년만에 열리는 두 번째 내한 공연이자 1988년부터 한 해도 빠짐없이 매해 진행되고 있는 밥 딜런 "Never Ending Tour"의 일환으로 다다음날 일본의 후지록페스티벌에 참가하기 전 열린 2018년 첫 아시아 국가에서의 공연이었다.

일단 밥 딜런 공연은 불친절하고 지루하고 괴랄하기로 악명이 자자하다.
1960년대 데뷔 초창기 앨범이나 당시 라이브를 들어도 원래 가창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세월이 갈수록 의도적으로 음정 박자 다 무시하고 자기가 부르고 싶은대로 대충 부르는 게 더 심해져 라이브는 단순히 가창력이 좋지 않은 수준을 뛰어넘어(...) 새로운 버전을 매번 재창조해내기로 유명하다.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라 밴드 반주에 시 낭송 혹은 염불 외우는 퍼포먼스 라는 느낌이 들 정도...레너드 코헨과 쌍두마차

그래서 기승전결 뚜렷하고 시원하게 내지르는 고음파트가 적당한 뽕끼와 함께 버무려져 캐치(catchy)한 후렴구가 있는 노래들이 대개 가요차트 상위권을 차지하는 '국민송'이 되고, 떼창과 열성적인 반응으로 유명한 관객들이 있는 한국에서 그의 공연은 더욱 더 이질감을 주었을 것이다.

특히 공연 전에 셋리스트 다 외우고 미리 '예습'해가서 떼창하는 게 일반적인 한국 관객들인데 이 사람 노래는 아무리 많이 듣고 가도 라이브 때 절대로 같이 따라부를 수 없는 수준이고 심지어 라이브 음원 마저 그렇게 많지가 않기 때문에 라이브를 처음 듣고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을 사람들의 반응도 이해가 된다.

후기를 좀 찾아봤는데 역시 목 관리에 실패해 퇴물이 된 왕년의 스타를 보는 게 안타까웠다는 이야기부터 티켓값이 아깝다, 중간에 졸았다, 땡큐 한 마디 없는 게 너무 무성의한 게 아니냐, 음원으로 듣던 것과 너무 다른 공연이어서 깜짝 놀랬다 등등 실망을 표현하는 후기가 꽤 많았다.
또 개중에는 밥 딜런을 잘 알지 못하는데 세계적으로 유명한 음악가에 얼마 전 노벨상까지 받은 '대단한' 사람 공연인데 내한 공연 한다고 하니 궁금해서 온 관객들은 자신의 기대와 전혀 다른 공연을 보고 '이게 뭐지? 내가 뭘 본 거지? 대단한 사람이라고는 했는데 별로였다고 말하면 내가 무식해보이려나? '교양'있는 척 하려면 좋았다고 말해야하나?' 같은 인지부조화를 일으키는 반응도 꽤 있었던 것 같다.
호불호가 확실한 공연.

개인적으로도 좀 아쉬웠던 공연이었다.
성의가 없다거나 무대 매너가 나빴다거나 라이브 편곡과 노래 실력에 경악해서가 아니라 (이건 다 알고 간 거라 나에겐 그리 충격적이거나 하지 않았다) 음향이 너무 조악해서...
체조 경기장이 엔지니어들의 무덤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게 이렇게까지 심각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얼마 전에 리모델링을 했다고 그래서 예전보다는 좀 나아졌으리라 기대했는데 악기 사운드가 귀를 콕콕 찌를듯이 '공격'해대서 공연 후반에는 문자 그대로 귀가 '아파'왔다. 와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니었냐...

그리고 공연장이 올림픽 체조 경기장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큰 공간에 대형 스크린 하나 없어 공연 내내 무대 위의 할배를 저 멀리서 면봉처럼 쳐다봐야 했다는 거... 심지어 중간부터는 계속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하느라 의자에 앉아서 시야가 다 가려버림.. ㅠㅠ
할배가 공연 촬영에 굉장히 민감해서 녹화도 못하게 하고 스크린도 설치 못하게 하고 사진도 못 찍게 했다고 하지만 그 큰 공연장에서 음향도 안 좋은데 무대도 잘 안 보이는 건 여러모로 더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던 점:

  1. 일단 밥 딜런을 보았다! 세상에! 2010년 내한 못 간 거 평생 후회하며 다신 안 찾아올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어쨌건 일생일대의 소원 하나 성취! 일단 같은 공간에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무한한 영광입니다 엉엉 ㅜㅜ

  2. 맨 처음 오프닝 때 기타리스트가 계속 치던 코드가 "Oh Mercy"앨범의 'Shooting Star'인 줄 알고 엄청 설렜다. 물론 그 곡을 연주해주진 않음
    "Oh Mercy"는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밥 딜런 앨범이고 그 중에서도 'Shooting Star'는 베스트 트랙이기 때문에 그냥 잠깐만이라도 이걸 라이브로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음. "Oh Mercy"앨범은 밥 딜런 스스로도 굉장히 애착을 가지고 있는 앨범 같다. 자신의 자서전 중 한 챕터를 온전히 이 앨범을 만들던 때를 회상하는 데에 할애한 걸 보면... 뭐 1970년 후반 - 1980년대까지 계속 내리막길을 걷던 커리어에 전환점이 된 앨범이기도 하니 그럴만도 하겠지.

  3. 하지만 더 큰 반전은 오프닝 곡이 'All Along The Watchtower'였다는 점!
    이번 2018년도 투어 셋리스트를 살펴보면 오프닝 곡은 무조건 'Things Have Changed'로 시작했는데 한국 공연에서만 특별히 색다른 오프닝이었다. 진짜 처음에 노래 딱 듣자마자 기대치 않은 선물을 받은 느낌이어서 너무 행복했으나 곧이어 뭉개지는 음향 때문에 바로 현타가 와서 기분 좋다가 분노하다가를 반복...

  4. 사람들이 밥 딜런이 공연에 너무 무성의한 모습을 보여준 게 아니냐고 하지만 나는 오히려 기대하지 않았던 노래들을 불러줘서 한국 공연에 특별히 더 신경을 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공연 기획사의 요청이었을 지 모르지만, 'Make You Feel My Love'는 - 한국에서 아마 Adele이 리메이크한 곡 때문에 가장 유명한 밥딜런 노래가 아닐까 싶지만- 올해 투어 중 잘 부르지 않았던 곡이었는데 오랜만에 불러줬고 'When I Paint My Masterpiece'와 'Gotta Serve Somebody'는 2011년 이후 처음으로 라이브 때 부른 곡이니 꽤나 진귀한 경험을 한 셈이다.

  5. 가장 좋아하는 노래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와 Desolation Row를 들음.
    Desolation Row는 레코딩으로 11분에 달하는 대서사시인데 개인적으로 앨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트랙 중 가장 완벽한 트랙이라고 생각하는 트랙인데("Highway 61 Revisited"앨범의 마지막 트랙이다), 11분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가 않는다. 예전에 플로이보이와의 인터뷰에서 밥딜런에게 대통령이 된다면 무얼 하고 싶냐는 질문에 미국 국가를 이 노래로 바꾸고 싶다고.... 11분 짜리 노래를 외워야 하는 국민들은 뭔 죄

  6. 박수가 굉장히 이상한 데에서 많이 터졌는데 하모니카 솔로를 끝내고 휙 던져버리는 퍼포먼스(?)에 갑자기 엄청난 박수가 쏟아졌다든가, 유일한 커버곡이었던 Autumn Leaves에서 가장 큰 박수와 호응이 나왔다는 점 (물론 이 노래만 거의 유일하게 음정 박자를 맞춰 부르긴 했다..)

  7. 2010년 공연을 못 가서 아쉬워했는데 이번 공연을 가서 좋았던 건 그 이후에 발표한 앨범 "Tempest(2012)"의 곡들을 라이브로 들을 수 있었다는 점. 이 앨범도 개인적으로 꽤 좋아하기 때문에. 특히 첫 트랙인 'Duquesne Whistle'을 정말 좋아한다.

  8. 2시간 내내 진짜 조금도 안 쉬고 계속 노래를 부르는데 내일 모레 여든인 나이를 생각하면 체력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에릭 클랩튼도 내한 때 아무 멘트 없이 20곡 가까이 연주하고 막판에 땡큐 한마디 하고 내려갔는데 이 할배는 마지막 땡큐마저 없이 그냥 사라지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마지막까지 너무 밥딜런스러운 공연이었다.

이번이 정말 마지막 내한이려나 ㅜㅜ
개인적으로 또 내한한다면 또 갈 의향이 있다. 100%

그 땐 'The Times They Are a-Changin'을 불러줬으면 좋겠다.

영상은 오바마가 대통령이던 시절 백악관에서 한 라이브
(대통령 앞이라고 음정 맞춰서 노래부는 거 봨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Come mothers and fathers
Throughout the land
And don't criticize
What you can't understand
Your sons and your daughters
Are beyond your command
Your old road is
Rapidly agin'.
Please get out of the new one
If you can't lend your hand
For the times they are a-changin'.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가사.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걸 비판하지 말고 도움을 주지 못하거든 이 새로운 길에서 그냥 비켜나라'는 저 내용.
가끔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여전히 폰지사기라고 매도하는 사람들을 향해 말해주고 싶을 때가 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블록체인이나 암호화폐에 대해 뭘 잘 알고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이번 공연 셋리스트:
https://www.setlist.fm/setlist/bob-dylan/2018/olympic-gymnastics-arena-seoul-south-korea-1beb25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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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난 김에 몇 자 끄적이신 이 리뷰가 아주 그냥 엄청 재밌네요. 링크하신 마지막 곡 덕분에 오늘은 이대로 자도 되겠습니다. :-)

몇 자 끄적이려고 한 글이 생각보다 길어졌군요 ㅋㅋㅋㅋ 두서 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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