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어에서의 일인칭 대명사와 이인칭 대명사에 대한 몇 가지 생각

in #kr6 years ago (edited)

한국어를 배울 때 외국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호칭에 관한 것이다.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예사말과 높임말이 나뉘고 높임말은 또 그 안에서도 여러가지 해라체, 합쇼체 등등으로 나뉘어 그에 따른 문법 체계도 어렵거니와 무엇보다 영어로 'You'에 해당하는 '너'는 한국어의 말하기 활동에서는 매우 제한적인 경우에만 사용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너'가 'You'에 상응하는 표현이라고 보기 어렵다.
아랫사람이나 친구들, 또는 정말 친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너'보다는 '당신'이, '당신'보다는 그 사람의 직급이나 이름 뒤에 '~씨','~님', '~선생님' 등의 호칭을 쓰는 게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알맞게 상대를 부르는 방식이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끼리는 만나서 처음 하는 것 중에 하나가 누가 더 서열이 높은지를 확인하고 정하는 '교통정리'이고 상대가 나보다 윗사람이거나 정말 친하지 않는 이상 '너'라고 불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나마 '너'가 적법하게 사용되는 경우에 조차 구어체에서 문어체로 바뀔 경우 '당신'이 된다.
가끔 그래서 한국 노래를 듣다가 '당신 어쩌고'하는 가사를 들을 때면 '세상에 누가 상대를 '당신'이라고 실생활에서 부르지?' 싶어 약간의 이질감을 느낄 때도 있다 (이건 나만 그런가?)

친구들과 모인 자리에서 얼마 전에 놀다가 영어에도 존댓말, 경어체가 있다는 이야기가 우연히 나와 Thy니 Thee니 Thou니 하는 '너' 또는 '당신'을 뜻하는 고어들을 예시로 대화가 진행되다보니 화제가 점점 이인칭 대명사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고 한국어에서 '너'라는 이인칭 대명사는 그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 내지는 홀대 받고 있어서 불쌍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던 게 갑자기 떠올라서 스팀잇에 끼적대는 중.

암튼 그렇다면 다른 나라 언어에서는 어떨까 생각을 해보았고 내가 한국어, 영어를 제외하고 할 줄 아는 언어가 베트남어 밖에 없어서 베트남어를 생각해보니 얘네는 아예 이인칭 대명사가 없다...
나와 동갑이거나 친한 또래이면 친구(bạn, cậu), 나보다 많은 남성이면 형(anh), 나이차이가 많이 나면 아저씨(ông),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성이면 언니/누나(chị),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여성이면 아주머니(cô), 나보다 어리면 (남녀 상관없이) 동생(em) 등으로 화자와의 관계에 따라 상대를 부르는 호칭이 달라지지 '너'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베트남어를 할 때엔 처음 보는 상대일 경우 상대의 나이에 대한 추측과 판단을 빠르게 해야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나'를 지칭하는 대명사도 달라지게 된다.
예를 들어 상대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같이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어르신일 경우 나를 이야기할 때 스스로를 '아이(con)'이라고 불러야 하고, 형/오빠/언니/누나같이 나보다 윗사람이지만 나이차이는 많이 나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할 땐 스스로를 '동생(em)'이라고 불러야 하고, 내가 남성인데 상대가 나보다 동생이면 스스로를 '형/오빠(anh)', 내가 여성인데 상대가 나보다 동생이면 스스로를 '언니/누나(chị)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도 가끔 스스로를 제3자화 시켜서 '오빠가~'로 시작하는 끔찍한 화법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굉장히 연서복 같은 느낌을 줘 손발을 오그라들게 만드는 데 반해 베트남어에서는 이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대화체인 셈이다.
그래서 베트남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울 때 의도치 않게 애교와 상관없이 스스로를 제3자와 시켜서 '오빠가', '언니가' '(자기 이름)~가' 등의 실수를 많이 저지르기도 한다.

이러한 언어적 특성 때문에 대략 난감하고 어색하고 우스운 경우가 가끔 있는데 예를 들어 상대방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사랑해(I love you)는 베트남어로 'Anh yêu em'이다.
Anh은 나보다 나이 많은 남성, 즉 '오빠/형'이라는 뜻이고 em은 나보다 나이가 적은 동생을 뜻한다.
문제는 이 표현이 남녀가 동갑인 커플이나 심지어 여자가 연상인 커플 사이에서도 사용되는 보편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
물론 어린 남성이 연상인 여성에게 원래대로 '누나(chị)'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부를 경우 이 두 사람이 연인 관계가 아닌 그냥 누나 - 남동생 사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승기는 '내 여자라니까'를 베트남에서 발매했어야 했어!'
생각해보면 굉장히 웃긴 일인 것이다. 어제까지 누나(chị) - 동생(em) 하던 사이가 갑자기 사귀고 나서 오빠(anh) - 동생(em) 사이가 된다니 남녀가 사귀기 시작하면 갑자기 남자가 나이가 더 많아지는 것도 아니고....
예전에 티비 드라마인지 영화인지 잘 모르겠지만 'Chị ơi! Anh yêu em' 이라는 작품의 포스터를 본 적이 있는데 제목만 보고도 연상녀 연하남 커플의 이야기를 다룬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윗 문장을 자연스럽게 번역하자면 '누나 사랑해' 정도가 되겠지만 문자를 하나하나 해석하자면:
'chị(누나) ơi(상대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말), Anh (나/오빠는) yêu(사랑해) em (너/동생을)'
부를 때는 '누나'로 불러 놓고 화자가 갑자기 '오빠'로 변하고 앞에서 '누나'가 '동생'이 되어버리는 기적 오브 미라클이 되어 굉장히 어색한 느낌으로 읽힌다.

언어적으로 고착된 대표적인 성차별적인 요소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보다 더 난감한 상황은 성소수자 커플들이다.
'너' 또는 '자기'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보니 서로를 'chị(언니/누나)'나 'anh(형/오빠)'으로 불러야 하는데 성소수자 커플들 사이에서는 상대가 이에 해당하는 경우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차라리 애칭을 만들어서 서로를 애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연인 사이에서 남자는 나이가 많든 적든 '오빠'를 맡는 게 당연하고 여자는 '동생'(또는 남성보다 서열상 한 단계 아래인 케어받아야 하는 존재)로 불리는 게 당연하고 다르게 불리는 게 굉장히 어색하고 이상하게 느끼는 베트남 사람들이 많지만 시대가 변하고 나이에 대한, 그리고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깨져 더 다양한 종류의 연애와 사랑의 모양들이 나타난다면 언젠가는 연인관계에서도 여자를 'chị(누나)'라고 부르는 게 어색하지 않게 될 것이라 예상해본다. 그리고 연인들끼리 서로를 부르는 명칭도 이러다보면 하나 만들어지지 않을까

아무리 떠올랐던 생각 정리하는 차원에서 쓴 글이라곤 하지만 써놓고 보니 도대체 글의 제목과 처음과 끝이 하나도 일관성 없는 아무말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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