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록체인 플랫폼인 스팀잇에

in #kr6 years ago

블록체인 플랫폼인 스팀잇에, 블록체인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지만, 오늘만큼은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블록체인 플랫폼인 스팀잇에, 블록체인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지만, 오늘만큼은 과거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정권이 바뀌니, 4.3을 맞이하는 분위기의 변화가 느껴집니다. 오랜 기간 제주4.3은 조명받지 못한, 잊힌 사건이었습니다. 제주도란 섬은 1948년 4월 3일부터 짧게는 1년, 길게는 6년간이나 이른바 내전 상태였습니다. 지난 70년간 한국의 주류 세력은 제주4.3을 한 가지 성격으로만 규정하려 했습니다. 이른바 '좌익폭동과 그에 따른 정당한 진압'이죠. 그런데 이렇게 규정하기엔 제주4.3은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복잡한 것을 있는 그대로 세심하게 이해하려 하는 것이 역사를 바라보는 정직한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사건과 인물이 중첩된 역사를 선명하게 규정할수록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은 1948년 4월 3일 김달삼이란 남로당 제주도당책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내 경찰지서 12곳을 습격한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김달삼은 무장봉기를 일으켜놓고 그해 8월 북한으로 도피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사건은 분명한 좌익 폭동이자 정부 전복을 노린 반란입니다. 분명 당시 미군정과 얼마 뒤 수립된 남한 정부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에 놀랐을 것이고, 특단의 대책을 강구했을 겁니다. 문제는 그 이후의 대처입니다. 제주도에선 2000년 공식적으로 '제주4.3사건 진상조사위'가 수립되고서 접수 받은 희생자만 1만4028명입니다. 전문가들은 2만5천명에서 3만명이 죽었고, 대부분이 민간인이라고 추정합니다. 당시 제주의 인구가 30만명이 채 되지 않았으니, 10명 중 한 명이 죽은 셈입니다.

민간인들은 남한 군경에 의해, 우익단체인 서북청년단에 의해, 또 남로당 무장대에 의해 죽었습니다. 그런데 절대 다수가 남한 군경에 의해 죽은 것이 수많은 증언과 자료로 뒷받침되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것에도 많은 사유가 있습니다만,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송요찬 포고령'입니다.

무장대를 토벌하러 육지에서 파병된 9연대의 송요찬 연대장은 1948년 10월17일 “제주 해안에서 5㎞ 이상 떨어진 곳을 통행금지 지역으로 정하고, 이 지역을 드나들 경우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에 처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했습니다. 송요찬 연대장은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하려는 작전이었지만, 방송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탓에 해안가로 대피하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하는 민간인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영화 지슬이 개봉됐던 2013년 3월에 이 영화의 실제 배경이었던 굴 '큰넓궤'라는 곳을 당시 사건의 생존자와 함께 찾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르포 “하늘 보고프고 바람 그리워도…나가면 죽는 거여”에 당시 취재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사건의 피해자 대부분이 송요찬 연대장이 어떤 포고령을 내렸는지도 모른 채,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쳐 사람을 죽이니까 도망쳤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증언에는 정말 기가 막히는 사연들이 많습니다. 저는 미리 제주 4.3연구소에서 만든 구술록을 읽고 생존자를 만났는데요. 인터뷰에선 구술록에도 없는 얘기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제가 남기는 기록이 역사적 사료가 될 수 있단 생각이 들어 하나하나 세심하게 기록하고 기사에 반영했던 기억입니다. 먼지 많은 동굴에서 자주 기침하며 아프던 동생들, 기침하며 소리내면 발각될까봐 주변 사람들에게 싸늘한 눈빛을 받았던 기억들, 그 아픈 동생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끔찍한 기억, 동굴이 발각된 뒤 아픈 가족을 남겨두고 도망친 애끓는 심정, 많은 사람들이 도망친 곳에는 발자국이 남아 토벌대의 추격을 받아 죽었고, 그나마 적은 사람들이 간 곳은 발자국이 지워져 살았다는 기묘한 이야기까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시대를 살았을까 싶은 이야기들이 넘쳐 납니다. 제가 기사 마지막 문장으로 쓴 "살암시난 살았주(살다보니깐 살았지)"를 실감하는 사연들이죠.

사실 이 사건 말고도 기막힌 사연들이 많습니다. 제주 4.3은 슬픔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제주 북촌리에선 마을 주민들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집단 학살됐는데요.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은 가족을 추모하는 것조차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1954년 6.25 전몰청년이자 마을 주민인 김석태의 장례를 치르면서, 마을 주민들이 학살의 현장인 초등학교 앞에서 "아이고"하며 목놓아 울었다가 다시 수십명이 경찰에 소환돼 고초를 받습니다. 감히 국가폭력을 거론할 수 없었던 분위기였죠.

전 이 사건에 여러 맥락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사실을 알진 못하나, 왜 섬소년이 전장인 육지로 건너가 참전했을지, 4.3이후 제주인들은 '내가 살기 위해선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는 심리가 있었다는데, 그게 영향을 미치진 않았을지. 남녀노소 많이 죽었지만 특히 남자들이 대부분 죽어 무남촌이라 불리었던 북촌리에서 얼마 남지 않은 젊은 남자가 자신들의 가해자편에서 싸우다 또 죽었는데, 당시 주민들은 어떤 심정이었을지, "아이고"라고 울었던 죄로 잡혀갔을때, 또 다시 마을 사람들이 죽어나지 않을까 벌벌 떨지 않았을지, 참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반면 가해자의 멘탈리티는 정말 끔찍할 정도입니다. 토벌단 구술 기록을 보면 운동장에 운집한 주민을 어떻게 죽일지 의논하는 회의에서, 장병들 대부분이 적 사살 경험이 없으니까 최대한 많은 장병이 사살을 경험하는 방식으로 학살하기로 정합니다. 그나마 군경 가족이 있는 주민들은 학살 이전에 열외를 시켜 살려주는 아량을 베풀죠.

이런 제주4.3을 있는 그대로 보고, 추모하기까지 정말 지난한 해석싸움을 벌여야 했습니다. 그 싸움이 이젠 끝났는지 잘 모르겠네요. 지금 정부니까 4.3을 있는 그대로 보고, 추모하는 것이 아닐지. 아직도 4.3을 왜곡하고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장병들에게 사살의 경험을 시켜주자는 행위마저 정당화하는 정치인도, 정당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아직 해석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바뀌니, 4.3을 맞이하는 분위기의 변화가 느껴집니다. 오랜 기간 제주4.3은 조명받지 못한, 잊힌 사건이었습니다. 제주도란 섬은 1948년 4월 3일부터 짧게는 1년, 길게는 6년간이나 이른바 내전 상태였습니다. 지난 70년간 한국의 주류 세력은 제주4.3을 한 가지 성격으로만 규정하려 했습니다. 이른바 '좌익폭동과 그에 따른 정당한 진압'이죠. 그런데 이렇게 규정하기엔 제주4.3은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복잡한 것을 있는 그대로 세심하게 이해하려 하는 것이 역사를 바라보는 정직한 시각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사건과 인물이 중첩된 역사를 선명하게 규정할수록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주4.3은 1948년 4월 3일 김달삼이란 남로당 제주도당책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내 경찰지서 12곳을 습격한 사건으로 시작합니다. 김달삼은 무장봉기를 일으켜놓고 그해 8월 북한으로 도피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이 사건은 분명한 좌익 폭동이자 정부 전복을 노린 반란입니다. 분명 당시 미군정과 얼마 뒤 수립된 남한 정부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에 놀랐을 것이고, 특단의 대책을 강구했을 겁니다. 문제는 그 이후의 대처입니다. 제주도에선 2000년 공식적으로 '제주4.3사건 진상조사위'가 수립되고서 접수 받은 희생자만 1만4028명입니다. 전문가들은 2만5천명에서 3만명이 죽었고, 대부분이 민간인이라고 추정합니다. 당시 제주의 인구가 30만명이 채 되지 않았으니, 10명 중 한 명이 죽은 셈입니다.

민간인들은 남한 군경에 의해, 우익단체인 서북청년단에 의해, 또 남로당 무장대에 의해 죽었습니다. 그런데 절대 다수가 남한 군경에 의해 죽은 것이 수많은 증언과 자료로 뒷받침되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이것에도 많은 사유가 있습니다만,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송요찬 포고령'입니다.

무장대를 토벌하러 육지에서 파병된 9연대의 송요찬 연대장은 1948년 10월17일 “제주 해안에서 5㎞ 이상 떨어진 곳을 통행금지 지역으로 정하고, 이 지역을 드나들 경우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에 처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했습니다. 송요찬 연대장은 무장대와 주민을 분리하려는 작전이었지만, 방송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탓에 해안가로 대피하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하는 민간인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영화 지슬이 개봉됐던 2013년 3월에 이 영화의 실제 배경이었던 굴 '큰넓궤'라는 곳을 당시 사건의 생존자와 함께 찾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르포 “하늘 보고프고 바람 그리워도…나가면 죽는 거여”에 당시 취재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사건의 피해자 대부분이 송요찬 연대장이 어떤 포고령을 내렸는지도 모른 채, 갑자기 군인들이 들이닥쳐 사람을 죽이니까 도망쳤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증언에는 정말 기가 막히는 사연들이 많습니다. 저는 미리 제주 4.3연구소에서 만든 구술록을 읽고 생존자를 만났는데요. 인터뷰에선 구술록에도 없는 얘기들도 많이 나왔습니다. 제가 남기는 기록이 역사적 사료가 될 수 있단 생각이 들어 하나하나 세심하게 기록하고 기사에 반영했던 기억입니다. 먼지 많은 동굴에서 자주 기침하며 아프던 동생들, 기침하며 소리내면 발각될까봐 주변 사람들에게 싸늘한 눈빛을 받았던 기억들, 그 아픈 동생들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은 끔찍한 기억, 동굴이 발각된 뒤 아픈 가족을 남겨두고 도망친 애끓는 심정, 많은 사람들이 도망친 곳에는 발자국이 남아 토벌대의 추격을 받아 죽었고, 그나마 적은 사람들이 간 곳은 발자국이 지워져 살았다는 기묘한 이야기까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시대를 살았을까 싶은 이야기들이 넘쳐 납니다. 제가 기사 마지막 문장으로 쓴 "살암시난 살았주(살다보니깐 살았지)"를 실감하는 사연들이죠.

사실 이 사건 말고도 기막힌 사연들이 많습니다. 제주 4.3은 슬픔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제주 북촌리에선 마을 주민들이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집단 학살됐는데요. 살아남은 사람들은 죽은 가족을 추모하는 것조차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1954년 6.25 전몰청년이자 마을 주민인 김석태의 장례를 치르면서, 마을 주민들이 학살의 현장인 초등학교 앞에서 "아이고"하며 목놓아 울었다가 다시 수십명이 경찰에 소환돼 고초를 받습니다. 감히 국가폭력을 거론할 수 없었던 분위기였죠.

전 이 사건에 여러 맥락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확한 사실을 알진 못하나, 왜 섬소년이 전장인 육지로 건너가 참전했을지, 4.3이후 제주인들은 '내가 살기 위해선 빨갱이가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는 심리가 있었다는데, 그게 영향을 미치진 않았을지. 남녀노소 많이 죽었지만 특히 남자들이 대부분 죽어 무남촌이라 불리었던 북촌리에서 얼마 남지 않은 젊은 남자가 자신들의 가해자편에서 싸우다 또 죽었는데, 당시 주민들은 어떤 심정이었을지, "아이고"라고 울었던 죄로 잡혀갔을때, 또 다시 마을 사람들이 죽어나지 않을까 벌벌 떨지 않았을지, 참 많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반면 가해자의 멘탈리티는 정말 끔찍할 정도입니다. 토벌단 구술 기록을 보면 운동장에 운집한 주민을 어떻게 죽일지 의논하는 회의에서, 장병들 대부분이 적 사살 경험이 없으니까 최대한 많은 장병이 사살을 경험하는 방식으로 학살하기로 정합니다. 그나마 군경 가족이 있는 주민들은 학살 이전에 열외를 시켜 살려주는 아량을 베풀죠.

이런 제주4.3을 있는 그대로 보고, 추모하기까지 정말 지난한 해석싸움을 벌여야 했습니다. 그 싸움이 이젠 끝났는지 잘 모르겠네요. 지금 정부니까 4.3을 있는 그대로 보고, 추모하는 것이 아닐지. 아직도 4.3을 왜곡하고 피해자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장병들에게 사살의 경험을 시켜주자는 행위마저 정당화하는 정치인도, 정당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아직 해석 싸움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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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aliwali, We have met 9 times already!

I'm a guide dog living in KR community. I want to believe that you want to contribute to KR community, but some of the KR community auditors have repeatedly told me that your posts need to be monitored. If you continue using KR tag and then reported more than 10 times, then this case has to be escalated to our KR community guardians.

Please stop using KR tag:

  • If you're not comfortable to write in Korean, I highly recommend you write your post in English rather than using Google Translate.
    Unfortunately, Google Translate is terrible at translating English into Korean. You may think you wrote in perfect Korean, but what KR Steemians read is gibberish. Sorry, even Koreans can't understand your post written in Google-Translated Korean.
  • So, here's what might happen afterward. Your Google-Translated post might be mistaken as a spam so that whales could downvote your post.
  • If your post is not relevant to Korea, not even vaguely, but you still use KR tag, Whales could think it as a spam and downvote your post.
  • If your post is somebody else's work(that is, plagiarism), then you'll definitely get downvotes.
  • If you keep abusing tags, you may be considered as a spammer. It may result to put you into the blacklist.

I hope that you enjoy Steemit.

Regards,

@krguidedog

해보자는 걸까......

kr-guide!

이 글은 @hyeongjoongyoon 님의 글 https://steemit.com/kr/@hyeongjoongyoon/4-3-4-3-70 을 복사 표절한 글입니다.

원더리아님~ 짱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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