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매치기 어디까지 당해봤니?_2

in #kr7 years ago (edited)

유럽 여행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나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하나 있었다. 빌바오라는 도시에서 두 번 현금을 잃어버리면서 내 신경은 날카로워졌지만 여전히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은 그리 크지 않았나 보다.

빌바오에서 3일 밤을 보낸 뒤 마드리드로 넘어왔다. 낮 시간에 에스파냐 광장 등 소매치기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무단히 애쓰며 걷고 또 걸으며 기억을 지우려했다. 마드리드부터 였을 것이다. 소매치기의 여파도 있었지만 도시들의 광장이 하나 같이 비슷해 보였고 하루 적어도 4시간씩 걸어대는 데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않고 샌드위치 피자를 먹으며 전전하고 있었다. 심지어 공원 주변의 가판대에서 조차 물을 사기 싫어 물도 마시지 않은 채 땡볕을 종종 걷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광장 중앙 분수대에 잠시 앉아 쉬고 있었는데 옆에 앉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서양인이 중국인이냐며 말을 걸었다. 처음에는 ‘아 이 서양인도 모로코에서 나를 중국인이냐’ 하며 신기한 눈으로 말을 거는 사람들과 별 다르지 않아 보였다. 휴대폰을 만지며 그가 자꾸만 던지는 질문에 건성으로 대답을 해주다가 어쩌다 약간은 긴 대화로 번졌다.
그 역시 혼자 여행을 하러 온 여행객이었는지 담배를 피며 계속해서 질문을 했고, 우연히 만난 외국인과의 긴 대화는 약 2주간 말상대 없이 다녔던 나에게 입을 열게 만드는 꿀과 같았다.

그는 프랑스인에 여러 나라를 여행했고 모로코, 한국, 일본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문화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러고 내가 카메라 가방을 메는 습관을 바꾸라며 ‘유럽에서는 절대 가방을 뒤로 넘겨 메지 말라며 신신당부했다. 동유럽의 많은 가난한 나라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지에서 넘어와 도둑질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길거리에서 직접 지목해주며 저런 ’집시‘ 차림새의 여자들을 조심하라며 똑똑히 알려주었다.
그러곤 내가 빌바오에서 소매치기를 당했다는 말을 하자 조심하라며 항상 돈을 들고 다녀야한다며 걱정하기 시작했다. 소매치기를 당한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고 들은 말이었기에 그의 조언이나 충고가 충분히 나에겐 값진 정보들이었다.

그러다 내 사정이 조금은 딱해 보였는지 혹은 자신이 찾은 싼 집을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싸게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며 나를 데려 갔다.
맥주 컵 한 잔에 1유로 하는 곳이었는데 마침 혼자 마시기도 적적하던 차에 그가 술동무까지 되어 주었던 것이다. 그 대낮에 마신 맥주의 거품은 부드럽기 이를 때 없었고 나는 한 잔을 단숨에 비워버렸다. 3시에 약속이 있다며 가야된다는 그는 끝내 아쉬워하며 내일 일정이 없으면 다시 만나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다. 그 날 처음 마드리드를 돌아다녀 보았지만 의외로 눈에 띄게 가고 싶은 장소가 없어서 흔쾌히 수락했다.

아직 그의 어떤 점에 내가 30분 만에 낯선 이와 이렇게 큰 약속을 잡았는지 의심이 간다. 한국에서라면 아주 쉬이 넘어갔을 상황이었겠지만 남들이 생각하는 낯선 사람을 믿지 말고 경계하라는 생각이 그때까지도 제대로 머릿속에 박혀있지 않았다.
다음 날 1시에 광장에서만 만나자고 했던 그와의 약속을 위해 장소로 향했다. 하필이면 그 날 축구경기가 있는 날이라 광장이 인파로 가득했고 대낮부터 술을 마시며 응원가를 부르고 있었다. 그 속에서 과연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우연처럼 만나서 이렇게 헤어질 수도 있겠다며 의연히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여기저기 둘러보며 선글라스를 쓴 그의 얼굴을 기억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다 운좋게 그와 딱 마주쳐 서로를 알아보곤 반갑게 악수하며 서로를 반겼다.

그 많은 주변의 수염이 더부룩한 백인들 중에서 그가 가장 반갑게 느껴졌고 다시 어제와 같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프랑스에 거주하는 한국인과 일본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한국어 단어들을 선보였다. 그러면서 그 날도 어김없이 소매치기를 조심하라, 호스텔에 사람들도 믿지 말고 돈을 들고 다녀라며 반복해서 말했다.
식당을 찾아가면서도 그는 주변에 컵에 동전을 하나 넣고 흔들어 소리내며 돈을 구걸하는 여자들, 저런 여자들을 조심하라며 계속해서 주의를 주었다. 식당이나 바에서 절대 테이블 위에 휴대폰이나 가방을 두지 말라 하였다. 식사를 먹기 전에 가볍게 맥주를 한 잔 마시자며 다시 나를 맥주집으로 안내했다.

자리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나는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어제와는 다르게 자꾸만 더 여행에 사용할 현금을 어디에 뒀냐며 내 카메라 가방을 만져댔다. 나는 어제 충고 한 대로 현금을 모두 가져나왔다며 자켓의 주머니를 보여 그에게 칭찬을 듣고 싶었다.

오늘은 치킨을 싸게 먹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며 작은 레스토랑에서 치킨을 한 마리 테이크아웃해서는 조용한 공원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편의점에서 싸구려 종이팩 와인을 하나 까지 추가하였다. 공원에 앉아 닭을 뜯어 먹으며 연거푸 와인을 세 잔이나 받아 마셔버렸다. 식사를 끝내고 낮잠을 자야한다며 서로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이렇게 간단히 한가로이 공원에서 닭을 먹으며 여유를 즐길 수도 있구나 하며 취기와 행복으로 입가에 웃음이 가득했다. 나도 모르게 한 15분은 잠깐 잠들었다. 그는 다시 일어나서는 대뜸 내가 입은 자켓이 마음에 든다며 어디서 샀는지 입어보아도 되는지 물었다. 다시 약간의 의심이 들긴 했지만 대뜸 내 자켓을 벗어주었다. 그는 자켓주머니를 보여주며 내 돈 봉투를 만져보였다. 그 때까지도 술에 취한 상황이었지만 똑똑히 그가 내 돈을 보며 다시 집어넣고 자켓을 돌려주는 것을 보고는 지나쳐갔다.

그렇게 10분이 더 지났을까 우리 둘은 화장실이 가고 싶어 인근 건물로 걸어가 소변을 보았다. 그가 먼저 보고 나온 뒤 내가 다음으로 들어갔는데 볼 일을 보고 나왔을 때 그를 찾을 수 없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라진게 틀림없었다. 어리둥절하며 5초도 채 지나기도 전에 이번에도 께름칙함과 소름이 돋으며 술기운에서 정신이 바짝 들었다. 나는 얼른 자켓의 돈 봉투를 열어 돈을 확인해 보았다. 내가 가진 돈의 절반이 사라진 상태였다. 약 250유로 작은 돈이 아니었지만 그보다 남아있는 반의 돈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는 처음부터 나에게서 돈을 훔쳐가기 위해 이 만남을 주선했을까 아니면 충고를 해주다 허술함이 보이자 돈을 훔쳐 달아났을까. 솔직히 조금 충격적이었다. 정말 믿을 놈 하나 없는 세상에 떨어진 듯했다. 물론 경계를 쉽게 풀어버린 내 잘못이 가장 컸다, 그러나 그런 만큼이나 그 짧은 시간에 아주 큰 사기를 당한 사람처럼 충격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모로코나 한국에선 느껴보지 못한 친절함 위의 삭막함이었다. 친절함으로 덮혀진 삭막함이라고 해야 될까. 오히려 모로코 사람들이 자신의 집에 이방인을 초대를 하는 대담함 혹은 누구나 가족처럼 맞아주는 분위기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허탈함에 길을 걸어 숙소로 돌아와서는 피곤함, 취기, 정신 못 차린 자신에 대한 자책 등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뒤섞여 잠이 쏟아졌다. 술기운에 취해 그날 밤이 되도록 잠을 잤다. 전날 밤 숙소에서 만난 반가운 한국 사람과 저녁을 함께 요리해서 먹기로 했는데 한 참 늦어버리고 말았다. 그가 만들어 놓은 스파게티만 후루룩 해치우곤 다시 졸려 잠을 자버렸다. 그에게 얼마나 미안했는지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서 사과를 했다.
혹시 그가 음식에 약을 탄 것은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졸음이 쏟아졌다. 전 날의 모든 일들의 시간이 모호하게 느껴졌고 가물가물했다. 아니면 내가 앞서 2주간 몸을 생각하지 않고 제대로 음식 섭취도 하지 않은 탓에 그 날 그 적은 양의 술에도 속수무책으로 취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봤다. 그 뒤로 여행이 끝날 때까지 250유로를 생각하며 좀 더 부유하게 여행을 즐기며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라며 후회를 했다.

Sort:  

우리나라가 제일 안전 한듯해요 ㅠㅠ

그러게요 정말 비행기값 싸게 들었다고 좋아했지만 다 소용없는 짓이었어요. ㅎㅎ

Coin Marketplace

STEEM 0.25
TRX 0.25
JST 0.040
BTC 94194.88
ETH 3392.03
USDT 1.00
SBD 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