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돌고돌고
팽이의 세계는 깊고도 신묘하였다. 그리고 비쌌다. 우리 땐 1000원짜리 ‘쇠팽이’ 하나 있으면 동네에서 대장이었는데. 요즘 애들(이런 표현을 쓰다니 나도 이제 꼰대가 다 됐다) 팽이는 1000원은 커녕 1만원으로도 감당할 수 없다.
만 4세 아들이 팽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팽이의 이름은 ‘베이 블레이드’였다. 아들의 것, 아들과 놀아줄 내 것, 경기장을 샀다. 이것을 사는데 한 7만원쯤 들었다.
팽이 따위 그냥 바닥에 돌리는 거 아니냐고 무슨 경기장이 필요하냐고 물으시면, 뭘 모르시는 말씀이라고 답해드리겠다. 제대로 된 대결을 하려면 어엿한 경기장이 필요하다. 나도 몰랐다.
경기장은 콜롯세움을 닮았다. 팽이가 튀어 나가지 않게 투명한 플라스틱 벽으로 테두리를 둘렀다. 바닥은 중앙을 향해 완만한 곡선을 그리게 팠다. 그러므로 나의 팽이와 적의 팽이가 자연스럽게 중앙에서 겨루게 되는 것이다.
팽이는 또 얼마나 많고 비싼지 모른다. 팽이의 세계에는 절대강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가위바위보처럼 이놈은 저놈에게 강하고, 이놈은 요놈에게 약했으며, 요놈은 저놈에게 졌다.
이왕 사는 것 좋은 것을 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조다. 베이 블레이드를 공부해가며 강력한(비싼) 팽이를 하나, 아들놈이 고른 것 하나 이렇게 주문했다. 강력한 녀석 또한 무적은 아녔다.
내가 본 중에 제일로 비싼 것은 무슨 한정판에 랜덤 뽑기식으로 나오는 팽이였다. 한 20만원쯤 했다. 좋은 것을 사는 게 아무리 내 신조기로서니, 20만원은 턱도 없는 소리였다. 그놈도 무적은 아니다.
큰아들과 밤마다 집에서 팽이를 쳤다. 아들이 강력한 팽이를, 내가 그저 그런 팽이를 썼다. 처음에는 내가 힘이 세서 후진 팽이로도 아들을 이길 수 있었다. 그러나 아들이 팽이에 익숙해지면서 나는 연전연패했다. 돈의 힘이란.
쉬는 날 아들 어린이집 하원 시간에 맞춰 팽이와 경기장을 들고 갔다. 아들은 크게 웃으며 나를 끌고 어린이집 앞 놀이터로 뛰어갔다. 6~7세 아이들 댓명이 거기서 팽이를 치고 있었다.
녀석들의 경기장보다 내 아들의 것이 더 컸다. 놈들은 제 경기장을 팽개치고 아들의 경기장으로 몰려왔다. 개중 한 놈이 아들의 강력한 팽이를 가리키며 “골드 레퀨이다! 일본에서 샀어요?”라고 내게 물었다. 당돌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대답하거나 말거나, 놈들은 옹기종기 앉아 팽이를 쳤다. 아들이 그 틈바구니에 앉았다. 녀석들은 나이를 물어 서열을 확인했다. 아들이 제일로 어렸다.
내 아들이 “4살”이라고 하자 패거리 중 한 녀석이 “야 네가 꼴등이다”라고 했다. 큰놈은 “4살도 할 수 있어”라며 태연하게 팽이를 감았나. 그게 대견했다. 별게 다 대견하다.
나이 많은 놈들이 은근히 아들에게 면박을 줬다. 하지만 그곳은 아이들의 세계였다. 어른인 내가 뛰어들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정작 아들은 별 신경을 안 썼다.
그래도 놈들이 아들을 때리지는 않을까, 골드 레퀨을 빼앗지는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나는 눈으로 레이저를 쏘면서 팽이 치는 놈들을 지켜봤다.
팽이 없는 녀석들이 경기장 주변에 서 구경했다. 아들놈은 좀 놀다가 “팽이 없는 사람?”하면서 선뜻 제 팽이, 보통 팽이를 빌려줬다.
패거리 중에 목소리가 제일 큰 녀석이 아들에게 “나 골드 레퀨 빌려줄래?”라고 말했다. 아들은 선뜻 팽이를 내줬다. 그러더니 조금 있다가 제 팽이가 없다며 보통 팽이를 돌려받아 팽이를 쳤다.
내 아들의 보통 팽이를 포함해 녀석들의 팽이는 족족 골드 레퀨에 나가떨어졌다. 계속 지니까, 아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계속 지니까, 나도 속이 상했다.
“OO아 이리 와봐.” 나는 아들을 불러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골드 레퀨 네가 써야지. 제일 좋은 건 네가 해야 하는 거야. 남한테 내주면 안 돼. 그래야 이기지.”
내가 4살짜리에게 무슨 소리를 한 것인가.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무리 사이로 들어갔다. 놈은 조금 팽이를 치다가 “아빠 나 그만할래”라며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OO아 너보다 덩치 큰 형아가 괴롭히면 짱돌로 까. 머리를 까. 깐 데 또 까.
...
옛날에 미니카 유행할 때 아버지가 무려 트랙을 만들어 주셨는데. 동네 문방구 앞에 가야 하나씩 있던 트랙을 판지와 글루건으로 만들어주셨어. 동네 애들이 다 와서 제 차 한번만 태워 봐도 되냐고 ㅋㅋㅋ
깐 데 또 까. 참으로 아름다운 가르침입니다.
아아 트랙이라니요. 저도 시호님 아버님 발끝만큼이라도 따라갈 수 있기를.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잠자리채론 사람도 잡을 수 있었다는. 요즘 잠자리채 들고 지나가는 애들 보면 생각난다. -아직은 아들 마음-
우와 너무 멋지세요! 제 옆집 아저씨도 아들을 위해 마당에 농구 골대를 직접 만들어주셨었는데 동네 애들이 와서 해도 되냐고...ㅎㅎㅎ
안 깐 데만 골라 까
라는 가르침도 주어야 균형이 맞습니다.
이것이 중도입니다.
가장 빠르게 거구의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선 깐 곳을 다시 까야죠. 이것이 선택과 집중입니다.
그렇군요. 현명합니다. 존칼님이 상대일 때 가장 필요한 전략이 되겠네요. 감사합니다.
아니 이 결론은 무엇
강력한 존칼님 또한 무적은 아니라는 결론입니다 ㅋㅋ
팽이 가격만 듣고 흠칫 놀랐는데 역시 장비가 좋아야하는군요~ 보검님은 참 다정한 아빠시네요~~ ^^
휴 역시 만사 장비빨인 모양입니다. 요리도 그런 면이 있지요?
다정하려고 노력하고 그런 글을 쓰고는 있지만 몇 번씩 욱해서 혼내기도 하고. 또 후회하고. 잘해주려고 하고. 무한 반복이옵니다.
역시 템빨이 좋아야 하는군요
베이 블레이드 재미 있을거 같네요
우리때는 미니카 였는데. . .
엇 저와 연배가 비슷하시군요. 저도 부메랑 엄청 좋아했어요.
베이블레이드도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ㅋㅋ 이거 전국대회도 열린대요.
성인부도 있다고 합니다(소근)
아들의 관심사에 공부하며 동참해 주는 마음이라니. 아름다운 아버지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요놈 관심사가 일주일 간격으로 휙휙 바뀌어서. 팽이는 또 얼마나 가지고 놀는지 모르겠어요.
우리때는 테크닉이 중요했는데 말이죠. 칼님 한 찍기 하셨을듯...
하지만 팽이를 손에 올리지 못했어요. 팽이를 손에 올린 다음 그걸로 찍는 기술을 가진 녀석들에게 매번 졌답니다. 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