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밤 일기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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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주가 끝나고 방향이 같은 지인과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 안에선 음악과 관련된 진지한 얘기가 오갔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한참 하다가, 어쨌건 나는 네 음악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그래서 언제가 됐건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진심이기도 했고, 내가 타인에게 듣고 싶은 이야기기도 했다. 그 말을 꺼냈을 때 때맞춰 신도림에 도착했다. 갑자기 말을 멈춘 지인은 눈이 빨개져 눈물을 뚝뚝 흘리며 급하게 지하철을 나섰고, 지인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함께 울었다.

그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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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집을 치웠는데 금세 오후가 됐다.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고 치울수록 더 더러워진다. 큰 쓰레기봉투를 세 개나 채웠다. 청소하기 귀찮은데 다 버려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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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치우다 보니, 나갈 때가 되어있었다. 부랴부랴 씻고 짐을 챙겨 나왔다. 오늘은 '그분'과 함께했던, 또 다른 어른을 보러 가야 했다. 흘리듯 '망해서 행복한 사람들'을 보러 간다고 했는데, 전할 물건이 있으니 시간 날 때 들리라고 하셨다.

마침 오늘 홍대에서 합주가 있어 또 다른 어른(이하 언니)가 있는 곳에 먼저 들르기로 했다. 나는 언니에게 갈 때마다 크고 작은 선물을 사 가는데, 오늘은 머무는 곳에 둘 꽃을 사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꽃집에 들러 꽃을 봤는데 죄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튤립을 사려다 문득 구석에 있는 풀잎을 발견하고선 바로 그걸로 정했다. 포장 없이 그냥 묶어만 달라고 했는데, 생각보다 예뻐 내 방에도 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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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서 행복한' 그중에서도 '적당히 유명한' 오빠에게 전달할 물건은 '그분'의 옷이었다. 곱게 포장된 옷을 보니 정말 떠나신 것 같기도 하고, 반가운 마음도 들었다.

언니는 공연 때 입을 내 옷도 몇 개 챙겨주었다. 언니는 종종 내게 옷을 주곤 하는데, 굳이 입지 않더라도 언니가 입던 옷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게는 각별한 의미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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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내려가기 전 지방에 들러야 하는데, 옷이 꽤 무거워 택배로 미리 보내기로 했다. 망해서 행복한 사람들과 연락할 때, 나는 주로 '완전히 망해버린' 오빠에게 연락을 한다. 그럼 그 오빠가 나머지 '망해서 행복한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한다.

'완전히 망해버린' 오빠에게 전화를 걸어 미리 택배를 보내고 싶은데, 주소를 받을 수 있냐 물었다. 그 오빠는 '적당히 유명한' 오빠의 집으로 바로 보내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언니가 맡긴 선물을 택배로 보내는 게 마음에 걸린다고, 불편하지 않다면 직접 전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선 자신의 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전화한 김에 얼른 내려가고 싶다는 말을 꺼냈고, "우리 뭐 하고 놀지요?"라는 해맑은 대답을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 나 진짜 놀러 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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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를 보내고는 홍대로 넘어가 합주를 했다. 햇수로 6년째 함께하고 있는 친구들인데, 6년째 해오던 곡을 또 맞췄다. 이제는 굳이 맞출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달달 외운 곡이지만, 공연을 앞두고 짧게 맞춰보았다.

"너무 많이 한 곡인데,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라고 묻고 다시 내가 대답했다. "마음을 담아보자."

애들은 놀렸지만, 합주를 시작하니 연주가 전과는 달랐다. 나 역시도 연주에 집중하려, 마음을 담으려 노력했다. 사람들의 마음이 내 곡으로 모이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자마자 한 친구가 "아, 좋다."라는 말을 했고, 나뿐 아니라 모두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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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내 곡을 연주해주었던 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곡의 서류 작업과 관련해 내 서명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메일로 보내면 처리해서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최근 자신의 앨범이 나왔다며, 그래서 얼굴을 보고 직접 전해주고 싶다고 했다.

어제는 서점에서 어떤 책을 보았고, 그 책을 보니 내 생각이 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이돌 때문에 레슨을 앞당겼던 학생에게서, 팬 사인회에 당첨됐다는 연락도 왔다.

나는 내일은 공연이 있고, 나와 함께 연주했던 동생들은 우리 집에 와 청소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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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사람을 피하던 시기. 사람들의 연락을 괴로워하면서도 먼저 연락해주는 그들, 거기까지가 '내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요즘은 생각지 못한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게 되고, 끊어졌던 관계가 자연스레 이어진다. 또 이미 맺었던 관계가 더 깊어지기도 한다. 낯선 이들이 나를 알고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 듣게 된다. 대면한 적은 없지만, 그것 역시 또 다른 관계일 것이다.

어쩌면 내 생각보다, '내 사람'의 범위가 넓은 건 아닐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누군가에게도 나의 존재가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더 단단해질 수 있기를, 떠올릴 때마다 그 자리에 있는, 그들의 버팀목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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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담아보자. ㅎㅎㅎㅎ 최고.

어쩌면 내 생각보다, '내 사람'의 범위가 넓은 건 아닐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누군가에게도 나의 존재가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뵌 적도 없고 앞으로 뵐 일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ㅋㅋ 스팀시티 응원가는 지금 이 시점에 더 위로가 되더군요 그런 점에서 저도 그 안에 포함될지도요

답이 너무 늦었지요. 이 댓글을 보고 또 다시, 위로를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번호일기는 위로가 전해지네요.
어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술 한잔하고 언제든 달려가면 거기 있을 느티나무처럼 기다려 달라 했는데 너무 기다리라고만 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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