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와 권력 1

in #kr-writing6 years ago

92~3년도였던 것 같다. '타이포그라피' 수업 마지막 날이었다. 교수님께서 한 명씩 최종 과제를 확인하고 점수를 알려주셨다. 결석한 날도 없고 성실하게 잘했다며 A+를 주셨다.(실은 오늘 글의 핵심은 이것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실기실을 나왔다. 시간이 많이 늦어져서 날은 벌써 어두워졌다. 미대 벤치의 가장 바깥 자리, 환한 가로등 빛 아래에서 담배를 맛있게 피웠다.

바로 앞자리에 여학생 둘이 앉았다. 상급생으로 보였다.(어렸을 때는 한 두 살 차이가 꽤 크다) 담배를 꺼내 물더니(라이터가 없었나 보다) 담배를 피우는 나에게 라이터를 빌려 달라고 했다. 아무 말 없이 얌전히 라이터를 건넸다. 내 조그만 라이터를 보더니, 라이터가 참 귀엽네요,라고 말하며 돌려주었다.

저 멀리서 수업을 같이 듣는 동기 형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잘 끝났다며 말을 건넸다. 그런데 앞에 앉아 있던 그 여학생 둘의 표정이 약간 변하며 나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여학생 둘은 일어나서 가로등 빛이 비치지 않는 어두운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머리가 허리까지 길었던 나를 여자로 오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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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반의 대학가에는 아직 '페미니즘' 같은 단어는 매우 생경했다. 복학생 형들이 학교 벤치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학생들한테 대놓고 욕하던 시절이었다. 옆에서 그 욕을 듣던 나는 조금 불편했을 뿐 별 생각이 없었다. 여자가 담배 피우는 걸 왜 저렇게 싫어할까, 정도의 생각만 했다.

어렸을 때 주위에 담배를 피우는 남녀 어른이 있었다. 남자 어른들은 시끄럽게 술을 마시며 연신 담배를 피워댔고, 남은 음식 위에, 마시던 술잔에 아무렇게나 담배를 비벼 껐다. 남자 어른들에게는 담배냄새, 술냄새와 함께 찌든 땀냄새가 뒤섞여 불쾌한 냄새가 났다.

하지만 여자 어른들은 깔끔하게 담배를 피웠고 냄새도 별로 나지 않았다. 어렸을 때의 그 기억은 여자가 담배 피우는 것은, 남자 어른에 비해 '긍정적'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그런 '경험'의 차이는 꽤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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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TV에서 방영된 한 다큐멘터리에서 프랑스 이야기가 나왔다. 지적인 이미지를 물씬 풍기는 '금발머리의 백인' 여자가 길거리를 걸어가며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나왔다. 당당하고 멋있게 보였다.

21세기가 훌쩍 지난 2010년의 어느 날, 길거리 횡단보도에서 담배를 피우며 걸어가는 한 금발머리의 백인 여성을 보았다. 지적이고 세련된 인상이었다. 하지만 90년대 보았던 그 다큐에서 느꼈던 '멋진' 느낌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시대가 바뀌었다. 이제 담배는 남에게 피해 주지 말고 조심스레 흡연구역에서 펴야 하는 시대다.

'금발의 백인', 이 단어는 전형적인 사대주의인 동시에 콤플렉스를 드러내는 상징이다.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봤던 할리우드 영화와 드라마에 등장하는 금발의 백인은 부유하고 지적이며 정의롭고, 더 나아가 우월한 존재였다.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하는 개츠비의 연적 '톰 뷰캐넌'은 뉴헤이번(예일대학교)을 나왔으며 미식축구부의 스타이고 엄청난 부자다. 그는 소설 속에서 '유색 인종 제국의 등장'이라는 책을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배 인종인 우리가 조심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다른 인종이 세상을 지배하게 될 거야."

'위대한 개츠비'에서 뷰캐넌은 '악역'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이런 류의 묘사가 어울린다. 하지만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는 여러 캐릭터들 역시 그 말에 별 반박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아니 대놓고 그들의 인식을 그대로 따라간다. 과거에 중국을 섬기면서 스스로 '소중화'를 자처한 우리는 이제 미국(금발머리 백인)을 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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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담배 이야기로 넘어가서,

담배는 권력을 가진 사람만 피울 수 있다는 인식이 이 사회에 아직도 널리 퍼져 있다. 일반적으로 '남자 어른'을 말한다. 하지만 그 '남자 어른' 앞에서 '극소수'의 권력을 가진 여자, 권력을 가진 청(소)년이 담배를 피운다면,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할 것이다.

건강을 위해서, 그들(여자,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해서,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권력'을 내세우려는 것에 불과하다. 나의 자식과, 나의 부모님에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강권'할 수는 있다. 물론 이것도 자신의 가족만 챙기는 이기주의다.

담배라는 것이 참 묘하다. 어쩌다 '권력'을 나타내는 물건이 되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담배를 피워야 또래보다 강하게 보일 수 있다. 길거리에서 담배를 '꼬나무는' 청년들은 그 자세로 자신을 멋있게 보이려고 연출한다. 아마 그들 머리 속에서는 배우 '정우성'이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며 담배를 피우는 멋진 흑백 광고사진을 연상하고 있을 것이다.

담배에 담긴 알량한 '권력'과 멋진 환상을 벗겨버릴 때가 이미 한참 지났다. 남에게 피해를 주며, 지구를 오염시키는 행위라는 것을 인식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조용히 피우면 되겠다. 옆에 여자나 청소년이 있건 말건. 어차피 같이 지구를 오염시키는 처지다.

*하지만 흡연자로서 깔끔한 흡연장소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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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권력과 연관 시켜서 본 적은 없었는데, 신선하네요.
그들이 그 알량한 '걱정'을 내세워서 여성(혹은 자신보다 하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는 것.. 구조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네. 담배가 참 묘한 도구에요. 어쩌다가 권력을 담게 되었는지.

몇년전 뉴스에서 길에서 담배피던 여성을 보고
아저씨인가 할아버지인가가 폭행을 했던 영상을 본적있는데
참 어이없던 기억이..
요즘은 그래도 많이 개선된듯한데
그래도 아직 멀었다는 생각..
비흡연자 입니다만
흡연자들 장소를 만드는건 저도 찬성합니다

네. 좀 더 확실히 '분리'하는 공간이 많이 생기면 좋겠습니다.

안녕하세요. @winnie98님 소개로
https://steemit.com/kr-event/@safebreaking/kr-event-2
그뤠잇 포스팅 소개 이벤트에 당첨 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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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와 권력 우리 사회에서는 분명 같이 생각 할 수 있죠!
안타까운건 말씀하신 그대로 앞선 세대와 그들의 인습적인 사고에 별 반박않는것, 또 더 나아가 동조하게 되는 상황이죠..
좋은 포스팀 감사합니다.

이런 이벤트가 있군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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