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주-1] 빈곤 포르노(Poverty Porn)에 관하여

in #kr-writing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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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leeprince 님의 글에 대한 오마주
원글 : 나는 왜 빈곤 포르노(Poverty Porn)를 싫어하는가

※ 오마주된 원글의 작성자는 '저자'로 표기하였으며, 별도의 추가내용이 없는 한 " " 안의 문구들은 모두 원글에서 인용해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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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은 어떻게 포르노가 되는가

빈곤과 포르노의 불편한 조합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무엇보다도 어째서 '포르노'일까? 나는 이미 다른 게시물에서 포르노의 특징을 다음처럼 설명한 바 있다. 성적 교접의 포르노 뿐 아니라 직장인 포르노처럼 '다른' 포르노들과의 공통적인 속성으로서 말이다.

포르노는 의도적으로 축소한다. (...) 실재의 의도적 왜곡과 편집은 포르노가 성립될 수 있는 필수 조건이다. 따라서 포르노의 이념적 구호는 다음과 같다. "삶은 반드시 축소되어야 한다!" 포르노가 만들어내는 '부분'은 삶 전체의 복합성을 암시하는 흔적을 정성껏 제거한 결과이다. 포르노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인 양 행세해야 한다. 포르노가 '팔리기' 위해서는 말이다. [졸문, 포르노에 관하여 : 틈새 없는 쾌락이라는 환상]

빈곤 포르노 또한 '실재의 의도적 축소를 통한 왜곡과 편집'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인간을 제거하고 곤궁만을 남긴 빈곤 포르노가 결코 달갑지 않다"는 저자의 말은 핵심을 분명하게 짚고 있다. 빈곤 포르노가 문제적인 까닭은, 거기 등장하는 안타까운 모습들이 거짓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제외한 삶의 디테일을 전부 비워내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능청스럽게도 이것이 삶의 전부인 것인 양 가정함으로써 '판매'라는 목적을 견인한다. 단순화된 이미지는 이해시키기에도 오도하기에도 쉬워서 상품화에 용이하다. 그래서 모든 종류의 포르노들은 처음부터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실제로 몇몇 창작자들은 "가난이 돈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떤 의도에서든 말이다.

물론 전체성의 환상은 누군가 "이것이 삶의 전부다!"라고 외치는 명백한 메시지로 나타나지 않는다. 삶의 축소라는 설정을 반복적으로 상연한 결과로서 나타난다. 성적 교접의 포르노가 복합적인 삶의 모습을 적극 반박하진 않지만 육체의 스펙터클을 반복함으로써 혼란 없이 성취되는 성(性)의 모습을 일반화하듯이 말이다. 그 결과 성적 포르노는 "빈틈 없는 쾌락"의 이미지를 확보한다. 이 이미지가 유포되면 시기, 질투, 긴장, 실패가 뒤섞인 성은 사실 그것이 당연한 것인데도 부끄럽고 열등한 것이 된다.

빈곤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빈곤 포르노는 '빈틈 없는 가난'이라는 이상적 이미지를 확보한다. 그리하여 가난한 삶을 둘러싼 수많은 디테일들이 제거되고, 비참함의 자극적 모습들로 가득찬 '진짜' 가난의 기준 이미지가 생겨난다. 이 이미지가 유포되면 조금의 물질적 기쁨을 누리거나 사치의 잔향을 좇는 빈곤함은 더 이상 빈곤이 아니게 된다. 아끼고 아껴 돈까스를 먹고 좋은 운동화를 사려 하는 이웃들은 '감히' 빈곤을 흉내내어 사회의 부를 훔치려는 치들로 여겨지는 것이다. 어느 소설의 제목처럼, 가난한 이들은 자신의 삶에서 가난마저도 도둑맞는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가 빈곤함에 치이고 있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빈곤의 실용적 이미지로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빈곤에 맞설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일까? 누군가는 삶의 축소로 존엄성을 잃어야 하고, 또 누군가는 이상적 빈곤의 기준에 미치지 못해 가난마저 빼앗겨야 한다. 누군가는 빈곤 포르노의 사업을 통해 은밀히 돈을 벌어들이고, 또 누군가는 빈곤 포르노를 보며 죄책감에 시달린다. 자연은 실재의 왜곡에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는 빈곤을 포착하고 규정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부채와 죄의식

사실 여기서 소개하는 글의 진정한 탁월함은 빈곤 포르노 앞에서 개인이 느끼는 혼란을 정확히 포착하여 주제의 중심으로 끌어들인다는 데 있다. 저자는 다음처럼 고백한다.

곤궁에 처한 당사자가 자존심을 꺾고 도움을 청하는 마당에, 어떻게 "당신은 스스로를 그렇게 다뤄선 안돼"라는 오지랖을 부리거나 (...) 상대의 절박함을 깎아 내리는 오만을 부릴 수 있을까. (...) 결국 나는 빈곤 포르노의 창작자에게 들이밀던 비판의 칼날이 겨눌 곳을 잃어버린다. (...) 이는 나에게 '남을 불쌍하게 여기는 오만함에 느낄 최잭감이냐' 혹은 '절박한 사람을 헐뜯어 느낄 최잭감이냐'를 선택하게 만드는 감정적 함정과도 같다.

이 딜레마는 당연하다. 비판하는 개인의 탓이 아니다. 왜냐하면 실재의 축소가 실재를 포함하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인격과 인간성은 민감한 문제이기에 빈곤 포르노가 어쨌든 관련된 사실들에 호소한다는 사실은 비판을 부담스럽게 만든다. 이것은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기인한 포르노 비판이 큰 성과를 거둘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혹자는 빈곤 포르노를 옹호하여 다음처럼 말할 수 있다. 극빈한 사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빈곤 포르노가 그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거나 빈곤 포르노 운운하며 성내는 치들보다는 후원을 기획하고 실제로 후원하는 이들이 훨씬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가.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이 딜레마가 포르노의 교묘한 시장지배 전략이라는 사실마저 놓쳐서는 안 된다. 달리 말해, 저자가 빈곤 포르노 앞에서 느낀 "감정적 함정"과 "죄책감"은 이미 그 자체로 빈곤 포르노의 일부이다. 비참한 현실의 이미지 앞에서 시청자는 죄의식을 겪는다. 빈곤 포르노는 반복적으로 외친다. 이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라! 당신이 사진과 TV 너머에서 먹고 싶은 것을 먹고 자고 싶을 때 자며 삶을 누리는 동안 목숨마저 부지하기 어려운 이들이 있다. 자, 여기, 앙상한 몰골의 아이들과 죽어가는 노인들의 모습들을 좀 보라. 같은 인간으로서 이들을 도와야 하지 않겠는가? 심지어 당신은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이들의 삶의 구원할 수 있다...

여기서 죄의식은 이중적이다. 하나는, '나'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서 오는 미안함과 안도감이 뒤섞인 데서 비롯한 죄의식이다. 또 다른 하나는, 심지어 어려운 사람들에게 직접 방문하여 봉사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작은 물질적 후원도 하지 않는다는(않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죄의식이다. 그렇다면 죄의식은 어떻게 해소될 수 있을까? TV 화면 상단에 뜬 정기후원 전화번호는 이미 그 방법을 암시하고 있다. 아니면 직접 아프리카 오지로 떠나 우물파기 봉사활동에 동참하는 방법도 있다. 모두 빈자들을 위해 개인적으로 지불하는 방법들이다. 죄의식은 부채의식으로 반전되고 있다. 당신의 마음에는 빈자에 대한 부채가 생겨난다. "누군가를 불쌍하게 여긴다는 오만한 감정"에 대한 부채로서, 또는 이 세상에서 인간의 자격을 유지하는 한 마땅히 갚아야 하는 부채로서 지불의 책무가 생겨나는 것이다.

죄의식과 부채의식의 연관성은 그 자체로 의미심장하다. 철학자 니체는 '죄'라는 도덕개념이 '부채'라는 물질적 문제에서 형식적 변형을 일으킨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죄라는 윤리학적 개념은 그 자체로 절대적이거나 자명한 것이 아니다. 죄의식은 채무자가 상대의 몫을 갚아야 한다는 부채의식 아래 발명된 것이다. 죄의식은 종속적 관계 아래 대상자를 묶어둔다. 빈곤 포르노에서도 유사한 종속이 일어난다. 죄의식과 부채의식이 뒤섞인 가운데 빈자에 대한 후원이 책무이자 의무로 정의된다. 이에 따라 캠페인을 주최하는 측은 그러한 사실을 먼저 발견하고 소개하는 도덕적 우위에 서게 된다. 누가 감히 빈곤 포르노 운운하며 그들을 비판할 수 있겠는가. 그들이 하는 일은 어쨌든 '좋은' 일인데 말이다. 딜레마의 존재는 이 구조적 종속의 한 증거이기도 하다.

한편, 빈곤 포르노로 유발되는 죄의식에는 언제나 선택 가능한 출구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빈곤 포르노는 죄의식이라는 문제와 후원이라는 답안을 같이 제공한다. 내 생각에 그것은 처음부터 해소되기 위해 조작되어 있던 부채이다. 그 죄의식이 애초에 해소하기 어려운 것으로 제시된다면 빈곤 포르노는 후원이라는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어휘로 대중을 유혹할 수 있는 시스템은 만화에서나 가능하다. 결국 역설적이게도 빈곤 포르노는 빈곤이라는 문제를 너무 쉽게 청산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 빈곤이라는 문제의 심각성과 지속적인 어려움을 토로할 때조차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그러므로' 후원을 해달라 요구한다. 빈곤 포르노는 부채와 해소가 각각 앞면과 뒷면에 인쇄되어 있는 면죄부를 생산하는 일이나 마찬가지이다.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따라서 개인의 죄의식을 발명하고 조절 가능한 범위 내에서 조작함으로써 후원을 이끌어내는 시스템, 그것이 빈곤 포르노의 작동 방식이다. 그 창작의 의도가 어떠했든 말이다. 혹자는 반문할 수 있다. 좋다, 그렇게 작동하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결과적으로는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더 쉽게 해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아닌가? 각자가 어차피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일군의 진보주의자들이 현대 국가의 복지 시스템에 대해 제기하는 유서 깊은 비판이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지배계급의 이익을 지탱하기 위한 미끼이자 임기응변이라는 주장이다. 약간의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대중의 불만을 가라앉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근본적인 적대를 은폐하고 무마한다는 것이다.

빈곤 포르노에도 유사한 논리가 적용된다. 예컨대, 빈곤 포르노에서 가장 많이 유포되고 있는 것은 아프리카의 극심한 빈곤이라는 이미지이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빈곤은 근본적으로 누구의 책임인가? 아프리카 사람들을 노예로 끌고 가고 자원을 수탈하고 심지어는 국경마저 멋대로 그려 오늘날의 정치적 불안을 초래한 것은 누구였던가? 전적으로 서구 제1세계의 책임이다. 그들은 제국주의 시절 아프리카를 수탈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부를 쌓아놓고 그 '비용'을 전 세계에 전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서구에서 발원한 NGO가 앞장서고 인권 운운하는 서구국가들의 각종 성명들이 지탱하고 있는 빈곤 포르노는, 과거를 지우고 현재의 부를 지탱하기 위한 극대화된 유지 시스템이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처럼 범세계적인 빈곤구호 활동을 통해 과연 각자에게 각자의 책임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 맞는가?

앞서 빈곤 포르노를 비판하는 일의 딜레마를 지적했던 저자는 글의 말미에서 "제작 환경으로서의 사회"를 언급한다. 감정적 덫에 빠진 "핑계"로 사회로 책임을 돌려본다 하고 있지만 실은 타당한 언급이다. 상기했듯이 빈곤 포르노는 '진정한 책임'의 은폐 및 다수로의 전가라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동사무소로 발걸음을 향하지 않고, 자신을 광고하게 되었는가 (...) 이 사회는 빈곤 포르노의 제작 환경으로서의 책임을 느끼고 반성해야 한다." 이것은 아프리카 뿐 아니라 한 사회 내부의 빈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불특정 다수를 겨냥하여 '우리' 모두의 책임 운운하는 행위들에는 분명 의심스러운 측면이 있다. 애초에 '모두'에게 '동등한' 책임이 있는 사태가 가능하기는 한가? 그리 뭉뚱그려 말함으로써 이익을 보는 이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빈곤 포르노 앞에서 느끼는 스스로의 죄의식 또한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감정은 얼마든지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될 수 있다. 빈곤 포르노 자체에 죄의식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 또한 다분히 의도된 것일 수 있다. 빈곤 포르노를 비판할 때 느끼는 혼란스러움은 실은 극복되어야 하는 감정이 아닐까? 우리는 비판의 순간마다 나타나 앞을 가로막는 부채의식을 이겨내고 넘어가야 한다. 다만, 그 너머에서 발견되는 것은 부채의식으로부터의 자유 따위가 아니라 '지울 수 없는 진정한 부채'일 것이다. 빈곤 포르노의 면죄부에 유도된 값싼 부채의식이 아닌, 죄의식 또한 아니라 적극적으로 관계해야 하는 부채 말이다. 그 정체는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우리 모두가 독자적 존재이면서도 서로 간에 뗄레야 뗼 수 없이 관계하며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지함으로써 발생하는 '연대의식'으로서의 부채일 것이라 생각한다. 한 인간이 굶주리고 학대받고 선거권을 박탈당했을 때 '나'에게서 비롯되는 분노와 책임의식 말이다. 이 부채는 우리 모두의 것이다. 그것이 기꺼이 '나'의 것인 부채이기에 죄의식으로 반전되지는 않는 부채로서 말이다.

지울 수 없는 부채는 또한 현재 존재하는 빈곤의 역사적 원인을 지워지지 않는 흔적으로서 보존하고 발견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진정한 채무자를 찾아내 빈자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대변인이 될 것이며, 면죄부 유포와 같은 값싼 도피 방식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부채를 찾아내야 한다. 딜레마 앞에서 정지할 것이 아니라 그대로 밀고 넘어가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관찰함으로써 발굴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죄책감을 털어 내고 (...) 빈곤 포르노의 제작자를 마음 놓고 비판"하는 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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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kittypunk님 요즘 바쁘신가보군요. 접속 안하신지 오래된 듯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댓글 남깁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잊지 않아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ㅜㅜ

무플방지 위원회에서 나왔습니다.
글이 너무 훌륭해서 댓글이 없나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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