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뽕글] 불멸에 관하여

in #kr-writing7 years ago (edited)

다른 집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제 겨우 갓난아이를 면한 우리 집의 폭군이자 애교꾼인 내 아이는 잠시도 혼자서 놀지 않는다. 손이 많이 간다. 아주 가끔, 본인이 인정한 특수한 경우에만 혼자서 책을 읽으며 5~10분 정도 혼자 놀기는 한다. 그 외에는 나 또는 아내가 옆에서 같이 놀아주지 않으면 폭군으로 변하곤 한다. 아이가 원하는대로 놀아주려면 영혼빠진 역할극을 무수히 반복하는 수 밖에 없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손이 많이 가는 시기의 육아법 예시: 이말년 웹툰을 참고하시길. 어쨌든 혼자서 아이를 보는 게 힘든 걸 알기에 술 약속이 있는 날이면 나는 집사람의 눈치를 본다. 술 마시고 귀가한 후 집사람이 발사하는 잔소리 따발총과 레이저 눈총을 피하는 노하우가 두어 가지 있기에 되도록 지키려 하는 편이다.

  1. 아이가 잠든 후에 외출하기
  2. 집안일 한 가지 해 놓고 외출하기

1번은 유부남 지인들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게 비추하는 기술이다. 아이에 따라 다르겠지만 보통 오후 10시 이후에나 나갈 수 있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술자리에 앉자마자 가장 동정심 강한, 만취상태의 총각 친구 한 두 명 빼고는 바로 귀가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난 집에서 혼술을 억지로 즐기는 사람이 되었다. 2번 방법에는 꿀팁이 한 가지 있는데 힘 안들이고 크게 눈에 띄는 일을 하는 것이다. 어질러진 장난감을 정리하거나 바닥에 널린 책들을 책꽂이에 정리하기, 외출하면서 음식쓰레기 버리기 등의 방법이 설거지나 방닦기 보다는 훨씬 힘 안들이고 생색내기에 좋다. 현명한 사람은 힘을 덜 쓰고 칭찬을 많이 받을 수 있는 방법을 택하는 법이다.


얼마 전 대학친구들과의 술 약속 덕분에 시내 구경을 할 일이 있었다. 4시쯤 잠들 것으로 예상하고 6시에 약속을 잡았다. 예상보다 아이가 일찍 잠든 탓에 집을 일찍 떠날 수 있었다. 일찍 나가봤자 할 일은 없지만 그날따라 지하철 대합실에서 한 시간 멍하니 앉아있기만 해도 어쨌든 집보단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진짜로 대합실에서 한 시간을 앉아있으면 노숙자처럼 보일 것 같아서 시내 골목을 배회했다. 문득 눈앞에 시간 단위로 요금을 계산한다는 시간제 오락실이 보였다. 보기만 해도 감동스러운 그 이름 ‘시간제’! 내가 몇 판을 죽더라도 끝판까지 갈 수 있다는 보증서와 다름없는 감동적인 그 이름을 보고 나니 시내를 걷는 수많은 모델급 외모의 미니스커트와 쭉쭉빵빵에 대한 감상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입장해야 해! Here and now! 지금, 여기가 아니면 경험할 수 없는 불멸에 대한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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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직후. 일단 보통 오락실에서 500원짜리를 넣어야만 할 수 있는 게임인 총쏘기를 시작했다. 적들이 날 아무리 공격해도 소용없다. 내게는 시간제 오락실이라는 무서운 무기가 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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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해적선장 니가 날 이겼어?
기다려봐. 내겐 스타트 버튼만 누르면 무한정 부활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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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 두부배달부가 되는 것도 쉬운 일이다.
이길 때까지 다시 스타트 버튼만 누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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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도 모를 VR게임, 원 없이 해봤다.
시속 280km로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있더라. 이거 사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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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야 알았다. 활쏘기 VR게임을 하다가 바닥의 화살을 줍는 내 모습도 누군가의 웃음거리였다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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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상상 속의 화살을 쏘았고, 난 그의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내가 메롱을 했어도 그는 몰랐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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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분을 이용하는 댓가로 7,000원을 썼다. 오락실보다 더 비쌌다.
나는 왜 여기 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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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프로그램을 돌리는 기계, 영업장 문 닫은 뒤에는 채굴기로 써도 되겠다.


오락실에서 나오면서 뭔지 모를 후회가 들었다. 예상과는 달리 돈을 넣고 하는 게임보다 재미가 없었던 탓이다. 동전 걱정없이 게임을 하면 더 재미있을 줄 알았다. 게임 중에 적의 공격이나 게임오버에 대해서는 걱정할 일이 없었다. 제한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불멸의 존재였으므로. 그러나 오히려 그런 이유 탓에 게임의 재미가 사라져버렸다. 오락실의 문을 열고 나오며 예전에 보았던 영화-The Man From Earth-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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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주인공, 주변인, 주인공의 집. 그 흔한 회상장면도 없다.>

어느 대학교 종신교수인 주인공이 사직서를 내고 아무도 모르게 이삿짐을 싸는데 동료교수들이 송별파티를 한답시고 집으로 들이닥쳤고, 주인공은 이유모를 어떤 감정탓에 비밀로 하던 자기의 존재를 밝히게 되는 이야기다. 그는 구석기시대에, 지금의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어느 평원에서 태어나 지금껏 죽거나 늙지 않고 살아온 존재였다. 어느 날, 자신이 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동쪽을 향해 여행을 하다가 석가모니를 만났고 그의 사상에 충격을 받고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석가의 사상을 퍼뜨리고자 했다. 수많은 제자가 생겼고 지배자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결국 그는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당했지만 인도에서 배운 특별한 기술을 사용하여 사흘간 죽은 척하다가 다시 일어난다. 우연히 그 장면을 본 제자들은 그를 신으로 받들었고 그는 몰래 제자들 품을 빠져나가 21세기가 될 때까지 방랑하며 살았다. 영화를 보고 난 뒤에도 공감할 수 없었던 그의 권태를 한시간의 오락실 게임을 통해 간접경험했다.


이문열의 소설 ‘인간의 아들’과 90년대 대표적인 환타지 소설 ‘퇴마록’에 등장하는 인물, 아하스페르츠를 연상시키는 설정이다. 그들도 나처럼 권태로웠을까. 오락 몇 판 해놓고 불멸이니 권태니 하는 중2병스러운 잡념으로 머리를 채우고 나가는 나의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그래, 세상은 원래 허무함으로 가득한 법. ‘흠, 나는 무척이나 철학적인 존재야.’

영화평도 아니고, 먹은 게 없으니 먹스팀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상의 이야기도 아닌 짬짜면 같은 이 포스팅을 [짬뽕글]로 분류하기로 했다. 폼 나는 제목을 보고 글을 클릭했으나 쇠고기 없는 미역국 같은 밋밋한 글에 실망하신 분께 추천 드리는 노래, '넥스트-불멸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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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nk you for information. 감사합니다!. 그아암쏴 하암니드아. 그은데 도옹영상 크을립만 올리시이이면서 이이런 과아앙고 하시는 거 느무한 것 아니니입니까요.

또 다른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글은 여기에서 그 아름다운 것을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Thank you for your reply. I recommend you the movie, "The Man From Earth"

VR게임장이 많이 발전한 것같네요
다음에 한번 가봐야겠어요
팔로우 눌리고 가요 !
괜찮으시면 팔로우 부탁드릴게요 :)
즐거운 저녁 되세요 ㅎ

감사합니다. 포스팅 하신 글 중에 휴게소 메뉴 비교가 인상적이네요ㅋㅋ자주 뵐게요. 참, 대역폭에 관한 말씀을 하셨기에 드리는 말씀인데 20스팀 정도만 계정에 넣어놔도 대역폭 제한에 구애받지 않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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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에요 대구님!
여전히 매력이 넘치시네요ㅋㅋ
이토록 큰 정신세계를 품으신 분이 일상에 갇혀 행복한 비명을 지르시는게 재밌어요ㅋㅋㅋ 속모르는 소리 같지만 제 눈에는 역시 시트콤! 그 일상조차 위대해보이십니다^^

감사합니다. 시트콤 '세친구'나 '순풍산부인과'의 재밌는 에피소드들도 사실 주인공 입장에선 짜증나는 일들이었죠. 제 가벼운 일기가 피식 한 번 웃을꺼리가 된다면 영광이죠. 언젠가 아래 영상만큼 재밌는 일기가 되는 날을 꿈꿉니다.
세 친구-중고차 소동

짬뽕글이라는 분류가 매우 겸손한듯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꽤나 잘 어울리는 분류네요 ^^
늘 위트가 넘치는 깊은 글 감사합니다 ㅎ

댓글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또 어떤 분류의 글이 나올까요.

맨 프롬 어스 재미있게 본 영화라 오오! 하다가 뒤에 나온 퇴마록에 제대로 신이 나버렸어요. 퇴마록이 저의 인생책 중 하나라서요! 정말 저어어엉말 좋아하는 책입니다. 아하스페르츠 캐릭터가 대단히 독특했었어요. 불멸이 저주가 되는 그 기분을 약간은 알 것도 같았고요.

대구님 글은 언제나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어서 신나게 읽어요! 본문에 대한 댓글(오락실)을 달아야 하는데 이렇게 딴소리만 하게 되어 죄송스럽네요ㅜㅜ 사실 저는 오락실은 남자친구 때문에 억지로 간 기억밖에 없어요ㅎㅎㅎ게임을 워낙 못해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틀린그림찾기밖에 없더라고요...

이 글의 지분은 오락실이 40%, 영화가 40%, 아하스페르츠가 2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글 내용의 절반 넘는 부분을 말씀해주셨네요ㅎㅎ취향이 되게 넓으셔서 저와 겹치는 부분이 많네요. 반갑게 생각합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쓴 소설 '신'에도 비슷한 인물이 나옵니다. 신 후보생들이 지구를 놓고 각자 자기의 원시 민족을 맡아 번성하게 하는 게 미션인데, 두 후보생이 부정행위와 반칙을 일삼다가 걸려서 받은 처벌이 '지구인으로 부활해서 영생하는 것'이더라고요. 작가는 불멸이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래도 오래 살고 싶습니다ㅋㅋ

3월의 시작을 아름답게 보내세요^^
그리고 진정한 스팀KR 에어드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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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링크타고 구경 잘 했습니다. 이모티콘은 잘 안 써서.. 다른분께 1/250의 기회를 양보할게요.

렛츠 고 정글, 충격적이게 어려운 게임입니다. 저걸 동전 하나로 깨고 인터넷에 올린 사람은 한국에 1명밖에 없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ㅎㅎ최근에 너무 일이 많아서 근 2주간 스티밋에 접속도 자주 하지 못했네요. 산스크리트님의 댓글을 역주행하며 대댓글을 다는데 느낌이 긍정적으로, 묘합니다. 그렇게 악명높은 게임인데도 무제한 게임으로 진행하니 덤덤하기도 하고 쉽게 느껴지기도 하더군요. 여러모로 오락은 제 돈 내고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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