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수 년 간의 봄, 여름, 가을, 겨울

in #kr-writing7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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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스마트폰이 출시되고 조금 지나서 시작된다. 새로 폰을 사면 당연히 스마트폰을 사야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느낄 때쯤(안드로이드 진저브레드 버전쯤 되는 시기) 친구의 소개로 아내를 만났다. 데이트삼아 만날 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하루하루로 보면 적은 양이지만 많은 날들을 함께한 탓에 폰카로 엄청난 양의 사진들을 찍어댔다. 휴대폰이 더 이상, 사진을 저장할 곳이 없다고 하소연할 때마다 컴퓨터의 하드디스크에 퍼붓고는 다시 사진을 찍었다. 어쩌다보니, 그리고 어쩔 수 없이 6~7년간 방치해둔 파일들을 정리할 시기가 되어 컴퓨터의 파일들을 한 곳으로 모았다. 삭제할 건 삭제하니 사진만 남았는데도 숫자가 어마어마하다. 시기, 장소, 주제별로 폴더를 만들어 정리하려고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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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정리정돈과는 사이가 먼 성격 덕분에 좀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시험공부 시작 전에 방 청소가 하고 싶어지고, 억지로 하는 방 청소를 시작하기 전에 갑자기 공부가 하고 싶어지는 법. 정리는 뒷전이고 메마른 내 스티밋 계정에 쓸 글감을 떠올리고 주제에 맞는 사진을 고르기 시작했다. 주제는 사계절. 아이가 아직 어린 탓에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기에, 어쩌면 앞으로 수십 번 반복될 사계절의 시작일 수도, 혹은 바람 쐬러 잘 다녔던 사계절의 끝일 수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나의 사계절을 대표할만한 사진을 골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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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군 다사읍 부근을 자주 다니던 시기였다. 대구사람들은 대부분 벚꽃이라 하면 두류공원과 용연사 길을 말한다. 하지만 나는 사람이 붐비는 곳을 싫어한다. 서재, 문양, 하빈 방면의 조용한 벚꽃을 찾은 후부터 매년 봄 찾은 곳이다. 대문사진을 대신하여 올린 내 아이 사진도 그 코스의 일부이다. 벚꽃길에서 살짝 벗어나면 땅 위로 달리는 지하철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즐길 수도 있었다. 특히 오후 4~7시 사이, 햇빛이 붉은 빛을 품을 때쯤에 찾으면 개화기開花期 내내 사람이 없었다. 사진을 정리하며 새삼 느낀다. 폰으로 사진을 찍어댄 이후의 내 인생은 모두 집사람과 아이가 함께 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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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때, 매년 봄 아버지가 날 데리고 갔던 김유신 장군묘의 꽃길은 나와 아버지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곳이다. 유치원 시절에, 아버지는 큰맘먹고 삼성-올림푸스 카메라를 사셨고 그 카메라로 첫 사진을 찍은 곳이기도 하다. 아마 그 때 아버지의 손과 내 동생의 손, 내 손과 어머니의 손이 이어져있었으리라. 그리고 아버지의 나머지 한 손에는 자랑스러운 그 카메라가 있었을 것이다. 30년 정도의 시간이 지났고, 나도 한 손으로 아이와 아내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소니 카메라를 쥐었다. 글로 써 놓으니 감동적이다.

글쎄, 그 때 아버지의 마음이 이랬을까. 날씨는 덥고 주차장엔 자리가 없고 한참을 방황한 끝에 트럭과 SUV사이에 겨우 주차하고서야 문틈을 비집으며 압축된 몸뚱이를 겨우 빼서 나왔다가 ‘아차 카메라!’ 다시 주차장으로 들어간다. 등으로는 옆 SUV의 차먼지를 닦아주고 배로는 내 차를 닦아내고. 다리는 아프고 애는 빽빽거리고 아 짜증나. ‘내가! 벚꽃! 보러! 경주! 오기! 싫댔지! 흰 옷! 안 입는다고! 했지! 츄리닝! 얼마나 편한데!’ 라고 속으로만 생각하며 겉으로는 아이 웃는 모습을 찍으려고 우쭈쭈 재롱을 떤다. 크, 이 비극적인 희극이란.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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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네비에는 나오지 않던 길 가 어느 숲이다. 간혹 조금 이른 퇴근시간이나 출장 다녀오는 길에 그 부근을 지나게 되면 일부러 들르곤 했다. 창문을 열고 다리를 대시보드에 올리고, 라디오에서 들을만한 음악이 나오나 한 번 훑어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휴대폰 음악을 틀었다. 의자를 뒤로 젖혀 30~50분 정도 차 천장을 바라보면서 직장도, 가정도 아닌 중립구역이자 독립공간인 이 곳에서의 자유를 즐기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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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가까운 어느 공원의 음악분수. 가족과 함께 가는 날은 돗자리를 깔아놓고, 혼자 가는 날은 대충 털썩 앉아서 애들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보고 있으면 뚜렷한 플롯 없이 배우들이 마구 설쳐대는 한국영화, <긴급조치 19호>, <다세포 소녀>, <성냥팔이소녀의 재림> 또는 <클레멘타인>을 보는 것 같아서 재미있었다. 물을 즐기려 분수에 뛰어 들어가면서도 물을 맞기 싫어 우산을 챙기는 애들을 보면서 내 삶에도 저런 부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보기도 했다. 친구들과 같이 놀고 싶어 하면서도 몸이 젖는 게 싫어서 밖에서 구경하는 애를 보면서도 내 성격의 어떤 부분을 생각해보곤 했다.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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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무장산 억새밭, 난 무언가를 멍하니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사람이 별로 없는 시간. 느즈막히 산에 올른 주제에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갈대와 까마귀를 구경하다가 석양을 보고서야 큰일났다 싶었다. 주변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집사람과 함께 헐떡거리며 40분 거리의 깜깜한 하산길을 걸은 후부턴 집사람은 나와 함께하는 산행에서 항상 내 계획을 의심한다. ‘지금 내려가야 되는 거 아냐? 저 길로 가면 더 둘러가는 거 아냐? 이거 제대로 된 길 맞아? 해 지기 전에 내려갈 수 있는 거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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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포스팅 했던 내 첫차와 함께했던 가을나들이 길에 봤던 버스정류장이다. 그 해 여행과 나들이로만 2만km를 달렸다. 아이가 태어난 후로는 그러지 못한다. 갓난아이는 드라이브를 즐기지 않으니까. 취향도 유전이라고 가정하면, 내 아이가 드라이브에 흥미를 느낄 때가 되려면 25년이 더 필요하다. 그 때까진 아이를 데리고 그저 길을 즐기기 위한 드라이브는 가지 못할 것 같고, 그 나이가 되면 나 말고 남자친구와 드라이브를 나서지 않을까.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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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웠던 겨울은 집이거나 제주도였고 제주도는 항상 바람이거나 눈이었다. 운 좋게도 첫 산행에 한라산의 설경을 마주했다. 아이를 업고 가기엔 늦었고, 아이 손을 잡고 가기엔 너무 이른 탓에 수년째 겨울바람에서 한라산의 그 냄새만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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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계절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사진들이네요.
사진 잘 보고 갑니다!!! 잘찍으시네요 :)

감사합니다. 요리레시피 전문이신가요? 자주 뵐게요.

글 쓰시길 엄청 오래 기다렸어요! 다시 글로 뵙게 되어 기쁩니다ㅎㅎㅎ 개나리꽃 사진이 참 예뻐요. 따님 기분도 즐거워 보이고요ㅎㅎㅎ 사실 겨울을 좋아하는데 이번 겨울은 너무 추웠던 탓에 봄을 기다리게 되네요. 한라산은 마치 외국의 어느 산 같아요. 제가 제주도를 가보지 않았기에 느끼는 감상이겠죠! 글 잘 읽었습니다. 자주자주 써주세요!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글쓰기가 두려웠습니다ㅎㅎㅎㅎ겨울엔 여름을 기다리고, 여름엔 겨울을 기다리는 게 정상 아니겠습니까. 저도 글감이 마구 솟아나는 따뜻한 봄날이 어서 오길 기다립니다. 즐거운 주말 되세요.

사계절 사진이 멎집니다. 겨울 한라산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쉽지가 않네요.

가는 길은 어렵지 않은데, 항상 시간내기가 어렵더라고요. 조만간 기회가 오길 빕니다.

저보다도 더 훌륭한 글을 쓰시는것 같은데 ..
글쓰기 두려워하지마시고 자주 써주시길 바라겠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자주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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