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축국 유람기] 서문

in #kr-writing7 years ago (edited)

※ 한 달 간 인도를 방문한 여행기입니다.

L군은 하루에 샤워를 4번씩 하고, 아가씨 만날 때 빼고는 30분 거리에 나가는 것도 귀찮아하는 칩거형 인간이에요. 집에서 뒹굴거리며 세계 풍물 기행 같은 TV 프로를 보는 걸 좋아하지만, 막상 가본 곳은 별로 없답니다. 본인 말로는 자기가 근세의 지리학자 메르카토르나 철학자 칸트랑 비슷한 타입이라네요. 둘 다 죽을 때까지 고향 땅 밖으로 한 발자국도 안 나가본 주제에 한 명은 세계 지도를 완성했고 다른 한 명은 우주를 논하며 살았다죠.

그런데 이런 L군이 갑자기 어인 일로 인도를, 그것도 무더운 여름 날 가게 되었을까요?

L군은 말이죠. 마음도 약하고 귀도 얇지만, 남이 하지 말라는 일은 꼭 해보는 고약한 버릇이 있어요. 맨 처음 L군이 인도를 가겠다고 말하자 부모형제 친구 가릴 것 없이 뜯어 말리더군요.

아마 넌 5일만에 짐 싸고 돌아올 것이다. 가서 빚내서라도 고급호텔에서 묵을 것이다 등등. L군은 이런 말을 들으며 깊은 분노를 느꼈어요. 그래서 별 고민도 안 하고 인도행 티켓을 덜렁 끊어버렸답니다.

일단 저지른 일이니 준비는 해야겠죠? 그런데 L군은 떠나기 전날까지 어떻게 하면 멋진 사진이 나올까 고심하며 코디에 신경쓰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한창 밀리터리에 심취해 있을 무렵이라 사막 무늬로 된 위장복과 배낭 세트를 구입했는데 이걸 사느라 비행기 표값만큼 돈을 썼다는 후문이 있더군요. 본인은 신이 나서 내심 사람들이 자신의 패션 센스를 알아주기를 바랬지만, 팀원들은 L군이 자이툰에서 탈영한 사람인 줄 알았데요.

정작 손도 대지 않은 가이드북은 가방 깊숙한 곳에 쑤셔넣고 L군은 여행 팀원들 중 예쁜 여자를 물색하기 시작했어요. L군은 내심 그 중 하나와 비행기 옆 자리에 앉기를 바랬어요. 그런데 L군 옆에는 덩치 큰 남자 초딩 나부랭이가 앉았고 실망한 L군은 그 녀석과 한 마디도 대화를 나누지 않았습니다.

좁은 이코노미 석에서 혼자 위스키를 빨며 폼을 부리던 L군은, 입에 안 받는 인도 음식에 알콜이 섞인 덕분에 극심한 변의(便意)를 느꼈고 소리가 덜덜 나는 에어 인디아 비행기의 화장실을 조심스레 방문했어요. 변기 위에 똥이 덩그라니 놓여있는데 카레 색깔 똥에 카레 냄새가 섞여 있더군요. 똥 냄새랑 카레 냄새랑 섞이면 어떤 냄새가 나는지는 직접 맡아봐야만 알 수 있답니다.

아, 이게 앞으로 내가 한 달간 맡을 냄새구나.

앞으로 가는 곳이 어떤 곳일지 L군은 점차 실감이 나기 시작했어요.

아쉽게도 예쁜 스튜어디스들은 없었습니다. 천 조가리를 걸친 예루살렘 아줌마들은 거지에게 동냥 주듯 서빙을 했고, 한편에선 가무잡잡한 인도 남자들이 서툰 영어로 같은 팀원 아가씨들에게 수작을 걸고 있었습니다. L군은 이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벌써 기가 팍 죽은 L군은 정신을 환기시키고자 가방에서 힘겹게 읽을 책을 꺼냈습니다.

「양자 역학과 경험 」

도대체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 책을 들고온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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