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이 이야기라면 Bourdieu의 Habitus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은 이것도...)취향은 문화적 자본의 산물이자 사실은 그 이전의 여러 (경제/교육/사회적) 자본들의 축적된 결과물이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현대에서 살롱이든 커피하우스든, 구별지어지는 작업의 장으로서 기능할 것이고, 어쩌면 어떤 장에서의 "다양한" 사람들이라는 것도 또한 결국 "다양성"을 자신의 핵심적인 취향으로 교육받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내적)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조직 (혹은 운영)의 가치와 합치되느나 상충되느냐는 또다른 문제인 것 같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명확한" 취향의 설정은, 결국 취향을 반영한 장( 그것이 살롱이 되었든 밋업이 되었든)에 관심을 갖거나 참여하는 사람들의 범주를 이미 정하고 가는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부르디외의 아비튀스. 오랜만에 듣네요. 사실 요즘의 취향 공동체에서 말하는 "취향"이란 아비튀스보다 막연한 "관심"이 아닐까 합니다. 그 연구 당시보다 사람들의 소비 품목이 더 획일화 되었으니까...무엇에 대한 관심은 있을지언정 진짜 아비튀스라 할 정도로 확고한 패턴이 있는 사람은 점점 갈수록 소수 같아요.
결국 관심, 그리고 말씀하신 "장"에 대한 어떤 참여 의지가 있느냐의 여부로 참여자들이 갈릴 것 같다는 생각이에요. 구체적인 취향은 생각보다 없으리란 생각...취향으로 아직 굳지 못한, 뭐 모여서 알아가는 것에 대한 "취향"이 대다수의 경우가 아닐까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