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연재대회 출품작 | 오즈의 수달 1. 모험의 시작

in #kr-series6 years ago (edited)

제기랄. 빌어먹을.
지긋지긋한 부상.

부상이 축구천재 수달님의 앞날을 가로막고야 말았어. 고등학생 때 전국대회에 나갔다가 파열된 십자인대가 결국 일을 낸 거야. 그날의 부상 때문에 대학도 못 올 뻔했지. 그래서 조심한다고 했지만 막상 호루라기가 울리면 내 본능을 주체할 수 없어. 그러다 또 사고가 나고 만 거야. 젠장할 십자인대가 또 파열된 거지. 그래서 지금 벤치 신세인 거고. 여기까지가 내 운명인가 봐. 중학생 때만 해도 난 잘나가는 유망주였거든. 대회에 나가면 반드시 골을 넣고야 말았으니까. 그래 난 축구천재였어. 부상만 아니었다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내 이름 석 자를 모르는 이가 없을 텐데. 결국 태극마크는 유소년 시절로 끝나고 마는 건가? 태극마크는 못 달더라도 프로 선수로라도 뛰고 싶은데. 애초에 축구를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나 봐.

열심히 뛰는 선수들을 보고만 있기엔 신경질 나게 좋은 가을 날씨야. 멀찌감치 떨어져, 동기들과 선배들이 연습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더러워졌어. 이 세상의 모든 축구공을 터뜨려 버리고 싶을 만큼. 내게 꿈을 안겨줬고 꿈을 꾸게 해준 축구공을 말이야. 빌어먹을 축구공. 이렇게 벤치에 앉아만 있을 거면 축구도 그만둬야 하지 않을까 싶어. 나 왜 이렇게 처량하냐. 내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처량해 보였어. 가끔 지나가는 동기나 선배들은 말없이 내 어깨를 두드리고 사라졌어. 이제 내게 남은 선택은 단 하나야. 언제 축구를 그만두느냐지.

"얘, 너 축구선수지?"

으잉? 난 맑고 귀여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어. 키는 작지만 내 또래로 보이는 한 여자가 서 있었어.

"왜 구경만 해?"

처음 본 얼굴이었어. 그런데 왜 반말이야? 내가 부상 때문에 벤치 신세나 지고 있으니까 만만해 보였나? 키도 쪼끄만 게.

"얼었나? 마오가 얼려 버렸나?"

작은 키에 똥그란 눈. 얼굴도 작고 코도 작고 입도 작은데 눈만 커서 얼굴에서 눈만 보였어. 으히힛, 내 이상형. 난 눈 큰 여자만 보면 반하는 병이 있단 말이지. 불치병이라 어쩔 수 없어. 타고난 성향이 그런걸. 난 내게 말을 거는 여자를 가만히 쳐다만 봤어. 대답도 안 하고 말이야. 눈이 너무 예뻐서 내가 정신줄을 놔버렸지 뭐야.

"마오는 내가 여기 온 걸 모를 텐데."

그녀가 말을 하고는 검지손가락으로 나를 찔러봤어. 정말 내가 얼었나 확인하려는 듯.

"앗, 미안해요. 잠시 딴생각하느라고. 하하하."

"헤헤. 말 놔. 우리 동갑."

뭐 이런 당돌한 경우를 다 봤나. 눈 크고 예쁘면 초면에 반말해도 용서가 되는 줄 아나 보네? 천재군.

"네?"

"까르르... 너 귀엽다."

이것 봐라. 야, 나 축구선수라고. 유소년 유망주였던 수달님이시라고. 내가 얼마나 강해 보이는 남잔데 귀여워? 그리고 왜 자꾸 반말이야? 내 이상형이니까 봐준다. 너 재수 좋은 줄 알아. 난 공만 보면 저돌적으로 변하는 공격수라고.

"저기, 근데 누구세요? 저 아세요?"

"만나서 반가워. 난 도로시야."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어. 악수? 나도 얼떨결에 손을 내밀었지만 차마 그녀의 손을 잡을 수는 없었어. 나 아직 여자 손 잡아본 적 없단 말이야. 내 눈동자는 내 손과 그녀의 손을 왔다 갔다 했고 갑자기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어. 아, 어쩌지? 그 순간 갑자기 그녀가 내 손을 덥석 잡고는 마구 흔들어댔어. 해맑게 웃으며 말이야. 이름이 도로시? 도 씨라, 도 씨도 있긴 하지. 근데 손이 왜 이렇게 따듯한 거야? 난 도로시의 손이 너무 따듯해서 마음이 살살 녹았어.

"어디 아파? 왜 얼굴이 갑자기 빨개져? 까르르..."

도로시는 내 얼굴이 재밌다는 듯 깔깔 웃어댔어. 아이씨, 창피해. 그래, 나 여자 손 처음 잡아봤다. 어쩔래.

"아, 아뇨. 저, 저기 갑자기 더워서."

"까르르... 우리 악수도 했으니까 이제 친구다. 그치?"

"네? 네..."

그래, 친구 하지 뭐. 근데 넌 누구야?

"이름은 수달. 유소년 시절엔 잘나갔던 공격수. 지금은 부상 중."

뭐지? 내 이름도 알잖아. 내 팬인가? 하긴 내가 워낙에 유명했어야지. 내 발에 축구공이 닿기만 하면 골인이었으니까. 역시 축구천재는 어딜 가도 인기가 많아.

"날 잘 알아? 요?"

"응. 잘 알지. 그리고 너도 날 알 걸? 까르르... 말 놓으라니깐."

"내가 널, 아니, 그쪽을 잘 안다고? 요?"

"응."

도로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어. 도로시? 성이 도, 이름이 로시? 아, 그러고 보니 동화 <오즈의 마법사> 주인공이랑 이름이 같네. 너희 아빠도 이름 짓는 센스가 우리 아빠처럼 끝내주네. 내 이름은 수달. 아니, 사람 이름이 수달이 뭐냐고. 내가 무슨 동물이야? 그리고 동물 이름으로 이름을 지을 거면 사자나 호랑이 뭐 그런 맹수들 많잖아. 그런데 귀엽기만 한 수달이라니. 왜 이름을 수달이라고 했냐고 따진 적이 있어. 그랬더니 아빠 말이 얼마나 좋은 이름인 줄 아느냐고. 殊達. 뛰어날 수, 통달할 달. 진리에 통달함이 뛰어나다는 뜻이라나? 아니 뜻이 좋으면 뭐하냐고, 부르기 좋아야지. 그런데 너희 아빠도 장난이 아니구나. 사람 이름이 로시가 뭐니. 성이랑 같이 안 부르면 너무 민망하잖아.

"난 그쪽 잘 모르는데."

"정말? 너 오즈의 마법사 동화 몰라?"

"알긴 하지. 요. 아이씨. 말 놓을게."

"까르르... 난 아까부터 놨는데."

"그, 그래. 하하하."

난 괜히 멋쩍어서 헛웃음을 지었어.

"나,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그 도로시 맞아."

혹시 살짝 미친 여잔가?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미쳤나? 보기엔 멀쩡해 보이는데 뇌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도로시가 본명이야?"

"응. 앗, 잠깐. 너 '성이 도고 이름이 로시야?'라고 물어보려고 그러지? 헤헤. 아쉽지만 땡~~~. 내 이름은 그냥 도로시야. 오즈의 마법사 봤다며."

"아, 그래. 보긴 봤는데, 그건 동화잖아. 동화 속 도로시가 지금 내 앞에 있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까르르... 동화 아니거든. 아까 내 손 만져봤잖아. 나 살아있는 사람이거든!"

그래, 그렇다고 쳐주자. 미친 사람이랑 내가 무슨 말을 하냐. 내 축구 인생 여기서 끝인가 고민 중인데 참 머리 복잡하게 해주네.

"그래, 그렇다고 치자."

"헤헤. 믿어줘서 고마워."

난 이 미친 여자에게서 벗어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어. 오른발을 내디딜 때마다 통증이 뇌까지 막힘없이 전달됐어. 제기랄. 할 줄 아는 건 축구뿐이고 평생 축구만 하며 살 거로 생각하며 살았어. 그렇게 스무 살이 됐지. 그런데 이제 축구 없이 살아야 한다는 벽이 나를 가로막다니... 이 벽을 뛰어넘느냐 포기하고 주저앉느냐 아니면 돌아가느냐의 길만 남았지 뭐야. 이 벽을 뛰어넘기엔 부상이 너무 심각해.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돌팔이가 내게 축구를 포기하라고 충고라는 걸 해줬어. 자신의 충고를 듣지 않고 다시 축구를 하면 평생 다리 병신으로 살아야 할 거라는 협박을 동원해서. 젠장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고 주저앉아야 할까? 축구 말고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 나는 방향을 잃어버린 거야.

난 축구공 하나를 손에 들고 다시 걸음을 옮겼어. 절룩거리면서. 그러자 도로시가 내 옆에 따라붙었어.

"나 부탁이 있어서 왔어."

"뭔데?"

아무리 내 이상형이라지만 미친 여자는 사절이다. 어서 할 말만 하고 사라지거라.

"네 축구 실력이 필요해. 네가 골을 향해 슛하는 그 강력한 힘이 필요해."

조기축구 스카우트인가?

"나 이제 공 못 차."

"아니야. 찰 수 있어."

"못 차."

"아니야, 넌 공을 찰 수 있어."

저 미친년 뭐야. 왜 사람 화를 돋우지? 절룩거리는 거 안 보여?

"야! 저리 가라."

난 화가 났어. 난 공을 차면 안 된다고. 그런데 왜 자꾸 차라는 거야? 못 찬다는데 찰 수 있다고 말하니까 화가 났어. 지가 무슨 의사라도 되나? 아니면 의사도 못 하는 걸 할 수 있는 신이라도 되나? 못 찬다는데 찰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약 올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어. 그래서 화가 난 거야.

"수달아, 네 도움이 필요해."

"야, 가라고."

난 올라오는 분노를 억누르며 조용하게 말했어. 그런데 아무런 대답이 없는 거야. 난 도로시를 봤어. 어깨에 살짝 닿는 머리칼 사이로 작고 귀여운 귀가 보였어. 큰 눈망울이 조금씩 흔들리더니 눈물 하나가 볼을 타고 흘렀어.

"너뿐이야. 너만 도와줄 수 있어."

아씨, 왜 울고 난리야. 마음 약해지게. 난 지금까지 운동만 하느라 여자를 만나본 적이 없잖아. 게다가 이렇게 가까이 마주한 적은 더더욱 없어. 대화해본 적도 당연히 없고. 그래서 내 목소리가 퉁명하게만 들렸던 걸까? 난 내 이상형이 우는 모습에 다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어. 공을 빼앗은 수비수가 패스한 공을 받아, 골문까지 죽도록 뛴 후의 심장 박동과 비슷할 정도였어. 달리지 않았는데도 심장이 이렇게나 빨리 뛸 수도 있다는 게 신기했어. 그리고 난 내가 도로시에게 반해버렸다는 걸 느꼈어. 그런데 어떻게 처음 본 사람을 좋아할 수 있지? 어떻게 처음 본 사람에게 이런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지? 그래 어디 조기 축구팀인지 들어나 보자.

"미, 미안. 울지 말고."

난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어. 그러자 도로시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는 거야. 난 그 순간 도로시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어. 내 몸과 내 정신과 내 혼이 도로시의 눈망울로 끓여 당겨졌어.

"어, 저기 그 부탁이라는 거. 일단 들어 보고,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도와줄게."

"정말? 고마워?"

도로시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어.

"일단 우리 저기 앉아서 얘기할까? 내가 다리가 좀 불편해서."

"아, 맞다. 미안해."

도로시는 급했는지 자리에 앉자마자 설명을 시작했어.

"오즈의 마법사 알지? 동화 그대로야. 난 서쪽마녀를 죽일 생각이 없었어. 그냥 물을 서쪽마녀에게 뿌렸을 뿐이야. 서쪽마녀의 약점이 물이라는 걸 내가 알 리가 없잖아. 나도 서쪽마녀가 죽은 것 때문에 얼마나 슬펐다고. 나 때문에 죽은 거잖아. 그래서 서쪽마녀의 딸 마오에게 큰 빚을 졌어. 내가 마오 입장이라도 날 용서하기 힘들 것 같아. 어떤 자식이 자신의 엄마를 죽인 사람을 쉽게 용서할 수 있겠어. 그래서 난 죄인이야. 하지만 복수하려면 나한테만 하면 되잖아. 그런데 나를 아껴주는 글린다님이 마오 때문에 크게 다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 마오를 저대로 놔두면 오즈가 마오의 손에 넘어갈 거야. 그럼 오즈의 평화는 깨지고 말 거야. 글린다님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내게 편지를 써놨는데 축구선수 수달을 오즈로 데리고 오라는 내용이었어. 데리고 온 후에 다음 편지를 열어보라고 해서 일단 널 데리러 온 거야.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야."

정상이 아니군. 쯧쯧. 불쌍해라.

(다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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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제일연재대회 출품작 <오즈의 수달> 소개

(대문 만들어 주신 뽀돌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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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r2002ks님이 naha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fur2002ks님의 2월의 첫 날!! 뻘짓 진행사항...

...gplace foodfigther ukk nasuyoung kibumh mastertri eternalight nahanewbijohn victoryces sadmt floridasnail i2015park mindwindow i...

과연 어떻게 이야기가 이어질지 ㅎㅎㅎ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사자 허수아비 이런녀석들이 나올지 아닐지도 기대가 되는 군요 ㅎ

나오긴 할 겁니다. ㅎㅎㅎㅎㅎ 잼나게 읽어주세요. ^^

짱짱맨 호출에 응답하여 보팅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ㅎㅎㅎ

나하님? 사람이름이 수달이 뭔가요? ㅎㅎ
축구선수 수달이 오즈의 평화를 지키러 가는 건가요?

그러니까 말입니다. 사람 이름이 수달이 뭔가요. ㅋㅋㅋㅋㅋ
축구선수 수달이 어떻게 오즈를 지켜낼지 기대해주세요. ^^

재밌네요^^
오랫만에 보는 연재대회네요.
좋은 결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보팅으로 응원하고 갑니다.
그리고 대문도 정말 멋져요!!!

아핫,,, 재밌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열심히 쓸게요~~~

다음 편이 기대됩니다. 그리고 대문 너무 멋집니다.

잼나게 읽어주셔서 고마워요.
대문은 뽀돌님 작품이랍니다. ^^

연재시작하시는군요. 응원합니다~

수달이란 이름의 한자어를 보고, 옛날분들 이름 중에 그래서 '달수'가 많았구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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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달수. 그 생각을 못했네요. ㅎㅎㅎㅎㅎ
응원 고맙습니다. ^^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ㅎㅎ 다음편도 기대하겠습니다

재밌게 읽으셨다니 다행이에요. 다음편도 열심히 쓸게요. ^^

나하님 준비를 다 해 놓으셨네요.
1편 재밌어요.^-^

아핫... 재밌다니 다행이에요. 소설은 미리미리 써두고 있지요. ㅎㅎㅎㅎㅎ 8주 안에 완결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할게요. ^^

li-li님이 naha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li-li님의 평론가들의 영화리뷰 #21 (1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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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bulsik centering emotionalp kimkwanghwa kyunga nahavirus707 xinnong pepsi81 cine eternalight zeroseok <h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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