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생각이 쉽게 변하나?

in #kr-psychology6 years ago (edited)

인지행동치료의 맹점 중 하나는 사람의 생각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는 데 있다. 인지행동치료에서 아무리 협력적 경험주의를 강조한다 하더라도 이 치료에 미숙한 치료자일수록 어떤 사고가 옳고 어떤 사고는 틀리다는 생각을 은연 중에 하게 마련이고, 이런 태도가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내담자에게 전달돼 조기종결(drop-out)이 야기되기 쉽다.

치료자의 미숙함으로 인해 앞서와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겠지만, 인지행동치료는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자는 것이 아니다. 현재 시점에서 조금 덜 유용해진 생각을 조금 더 유용한 생각으로 바꾸자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치료자는 내담자가 대안적인 사고를 할 수 있게 소크라테스식으로 질문한다. '더 생각해 볼 여지는 없나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할 때 그 심정이 충분히 공감이 되네요. 그런데 다른 식으로 생각해 볼 수 없을까요?' '정말 OO님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OO님에 대해 생각했을까요? 반박해 볼 수 있는 증거가 혹시 있을까요' 등과 같은 질문을 해가며 내담자에게 보다 열린 사고를 할 수 있게 돕는다. 이 과정에서 내담자가 보다 유용한 사고로 전환한다면 치료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못 한 경우, 즉 기존에 지니고 있던 좀 덜 유용한 사고를 고수하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사고에서의 변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 변화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감정이 수반돼야 한다. 자신이 너무 개객끼 같아서 참을 수가 없다 죽는 게 낫겠다 라고 말하는 내담자를 떠올려보자. 인지행동치료를 통해 치료자와 내담자가 함께 '내가 개객끼가 아닐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다각도로 탐색한 결과 '아 제가 어떤 부분에서는 개객끼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또 나름 내세울 만한 것이 있네요'라고 말한다고 해서 이 사람이 진정 변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스스로에 대한 한 사람의 평가는 감정이 수반되지 않는 이상 쉽게 변하지 않는다.(이런 이유로 '단기간'에 심리적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말하는 치료자들은 사이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감정이 수반되는 사고에서의 변화란 게 어떤 것일까? 가상의 사례를 한 번 소개해 보면 이해가 빠를 것 같다. 어머니가 알코올 사용 장애에 수반되는 환청의 영향을 받아 옥상에서 뛰어내렸고, 이에 A라는 사람은 고작 초등학교 2학년의 나이에 자기 일은 자기가 스스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아버지는 생계를 책임지느라 A를 보살필 여력이 되지 못 했고 A를 봐줄 사람이 없어 거의 방치되다시피 자랐다. A는 비교적 우수한 지적 능력을 타고 나서 그 어린 나이에도 스스로 준비물을 챙기고 밥을 챙겨먹고 자기 운동화를 빨아서 신는 등 아버지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려 노력한다. 하지만 A가 자랄수록 마음 한켠에 어머니에 대한 분노가 커져만 간다. 어머니가 알코올 사용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은 듣지 못 했지만, 얼마나 못나고 책임감이 없으면 어린 새끼마저 버리고 세상을 하직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오르고, 아버지도 A의 이런 생각을 아는바 어머니와 관련된 얘기는 자연스럽게 집에서 금기어가 된다.

이런 A는 최근 이직 상황에서의 극심한 불안감을 주호소로 하여 심리상담센터를 찾는다. 상담자와의 일련의 상담을 통해 A는 이 불안감이 어머니가 부재했던 어린 시절에 상당 부분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상담자는 어머니에 대한 A의 생각을 조심스레 묻는다. A는 말을 하며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화가 치밀어 오른다. 이제껏 차곡차곡 쌓아온 적개심이 언어적 홍수가 되어 상담자에게 표출된다. 상담자는 A의 감정을 반영해 준다. '혼자서 너무나 힘들었겠네요. 엄마가 많이 원망스러웠겠어요.' 이 말을 듣고 A는 울음을 터뜨린다. 한참을 서럽게 운다. 상담자는 조용히 지켜보다가 내담자에게 어떤 마음이 드는지 묻는다. A는 사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비오는 날 다른 집 엄마들이 우산 들고 올 때, 소풍날 도시락을 직접 챙겨야 할 때 그런 순간들마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났었다고.

이런 과정을 통해 A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의 이면에 실은 큰 슬픔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막혀 있던 슬픔이라는 감정이 흘러간 후 A의 불안감 또한 완화된다. A는 그 후의 상담에서 어머니와의 좋았던 추억을 회상하며 더 많은 추억을 만들지 못 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 애도할 수 있게 된다.

내담자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 한 초보 상담자가 '엄마가 그 정도로 못나고 책임감 없는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가능성을 찾아보자.'라고 말했다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을까. 아마 그 상담을 마지막으로 내담자는 더는 상담에 오지 않았을 게 불을 보듯 뻔하다. 대안적 사고의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서는 내담자로부터 신뢰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상담자가 믿을 만하고 내가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안전한 상황을 조성해 주겠구나' 내담자가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상담에서는 이런 것을 두고 라포형성이 됐다고 말한다. 라포형성이 되면 그 다음부터는 보다 깊이 있는 대안적 사고 탐색이 가능해진다.

위에서 언급한 사례 역시 라포형성이 된 이후의 상담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분노 밑에 고여 있던 슬픔이라는 감정이 흘러가자 자연스럽게 어머니에 대한 사고가 변했다. 사실 사고만 변화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인지행동치료에서 사고 변화 이후에 감정이나 행동상의 변화가 올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심리치료에서 사고가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함이지 실제 현상이 이런 식으로 딱 떨어지게 인과관계를 맺는다고 보기 어렵다. 감정과 사고는 늘 함께 간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가 정말 변화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확실한 지표가 감정 변화이다. 감정을 보다 생생하게 경험하는 것이 사고 변화에 유용하다는 전제를 인지행동치료도 깔고 들어가기 때문에, 감정을 불러일으키기 좋은 심상과 같은 요소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밖에 없다.

요즘 심상을 활용한 인지치료 라는 책을 열심히 보고 있다. 열심히 읽고 조만간 사회불안장애에서의 심상재구성이라는 주제로 포스팅 올릴 예정이다. 논문은 언제 마무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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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박사 연구하시나보군요. 잘 읽고 갑니다.
논문 잘 쓰시길.

묵혀두었던 석사논문 출판하는 게 올해 목표 중 하나입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상담을 부탁한 타인과 대화할 때 습관적으로 그 사람의 사고를 고치려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보단 생각의 여지를 남길 수 있게 유도하는 법을 길러야겠네요. ㅎㅎ목적지를 처음부터 알려주는 것보다 일단 같이 걸어보는게 좋겠어요. "혹시 여기 어딘가에 우리가 보지 못했던 이정표가 있지 않을까?" 식으로...

일반인은 누구나 그렇죠. 저도 상담 이외의 장면에선 마찬가지구요. 다만 상담에선 목적지를 상담자가 정하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게 될진 아무도 모르죠. 내담자도 모릅니다. 다만 그게 어떤 길이 됐든 내담자가 가는 길을 옆에서 잘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게 중요해요.

상담의 주요한 fact 중 하나는 내담자만큼이나 상담자 자신도 결점이 많은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걸 늘 되새기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네 혼자서 목적지를 정하지 않는다는 말이 하고 싶었어요. ^^

상담자는 의뢰인의 믿음을 받는게 가장 중요하겠네요 ..
"비오는 날 다른 집 엄마들이 우산 들고 올 때, 소풍날 도시락을 직접 챙겨야 할 때 그런 순간들마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눈물이 났었다고."
저는 어머니는 계셨지만, 정말 공감합니다

네 그게 안 되면 변화를 이뤄내기가 어렵죠. 가상의 사례지만 공감이 되는 대목이 있으셨군요.

스스로에 대한 한 사람의 평가는 감정이 수반되지 않는 이상 쉽게 변하지 않는다

공감합니다. @홍보해

개부장님을 또 불러주셨네요. 여러모로 감사드립니다.

@slowdive14님 안녕하세요. 개부장 입니다. @qrwerq님이 이 글을 너무 좋아하셔서, 저에게 홍보를 부탁 하셨습니다. 이 글은 @krguidedog에 의하여 리스팀 되었으며, 가이드독 서포터들로부터 보팅을 받으셨습니다. 축하드립니다!

개부장님 사랑해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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