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임상심리전문가의 정신장애 이야기 #11] 부인(denial) 방어기제에 관해: 양극성 장애와 연극성 성격장애를 중심으로

in #kr-psychology6 years ago (edited)

견디기 힘든 괴로움을 방어하는 한 가지 방법은 그것의 존재, 즉 괴로움을 야기하는 요인과 괴로움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한 달 전쯤이었을까요.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5.18 당시 군인들이 부녀자나 어린 소녀들을 성폭행했던 사건에 관해 다룬 적이 있습니다. 이 때 성폭행 생존자 중 한 명이 성폭행 당한 사실에 대해 부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과거에 이 생존자가 성폭행을 당했던 사실에 관해 상세히 말했던 것이 사료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부인하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요. 인간의 다른 방어기제와 마찬가지로 부인(denial)은 무의식적인 프로세스에 가깝기 때문에, 이 생존자가 자신은 성폭행을 당한 적이 없다고 믿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심각한 사례를 들긴 했지만 부인은 어린아이부터 건강한 성인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방어기제라 할 수 있습니다. 괴로운 기억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직면하기 어려운 자신의 사고나 감정에 대해서도 부인하기 쉽죠. 어린 아이들이 제 눈을 가리면 세상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영구 읍따~ 다른 사람이 미워 죽겠는데 그런 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만 모를 뿐(!) 상대방은 어떤 식으로든 불쾌감을 경험하기 쉽습니다. 인간은 온몸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게 마련이니까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애먼 사람에게 불똥이 튈 수 있겠죠. 대개 보다 만만한 대상에게 미움의 감정이 표출되죠.

부인 방어기제의 사용이 여러 상황에 걸쳐 오랫동안 지속된 결과 성격의 일부로 자리매김할 때 문제가 됩니다. 부인을 주요 방어기제로 하는 정신장애의 예로서 양극성 장애, 연극성 성격장애, 알코올 사용장애 등이 우선적으로 떠오르고, 다른 모든 정신장애가 이 부인 방어기제를 어느 정도 공유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방어기제에도 보다 고차적인 방어기제(예, 승화, 유머)와 하급 방어기제가 있는데, 부인이 하급 방어기제에 속하는 것과도 관련 있습니다. 정신장애에서 고차적인 방어기제가 나타날 가능성은 아예 없진 않다 하더라도 적으니까요.

양극성 장애를 부인 방어기제의 대표적 예로 들었는데, 양극성 장애의 주요 특징은 조증과 우울증의 공존입니다. 조증 삽화만 있다 하더라도 양극성 장애 진단이 가능하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보질 못 했네요. 보통은 조증과 우울증이 시간 간격을 두고 찾아옵니다. 부인 방어기제는 우울 및 조증과 모두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자기 비판적인 측면과 우울감이 너무 심해 그것을 감당(직면)하기가 어렵다고 판단이 되면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면을 누르려 하게 마련입니다. 용수철 같은 거죠. 계속 누르고 누르고 누르다 보면 어느 순간 튕겨 오릅니다. 우울증이 심했던 만큼 조증도 심하게 마련인 이유죠. 과도한 자기비판의 다른 극단에는 과도한 자기확신이 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의 한계에 대해서 부인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예를 들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가 부도를 맞는다거나 여러 날 잠도 안 자고 비효율적으로 어떤 일에 매진한다거나 하는 일이 발생하죠. 비트코인을 능가하는 암호화폐를 만들겠다며 식음을 전폐하고 몰두하지만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 십상입니다. 자신의 욕구는 완전히 부인한 채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겠다며 가진 재산을 몽땅 기부해 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연극성 성격장애 환자는 어떨까요. 사실 정신과에서 근무하더라도 성격장애 진단을 내릴 정도로 심각한 성격장애 환자를 만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격장애가 갖는 몇몇 특징 정도는 언급해 볼 수 있겠는데요. 연극성 성격장애를 지닌 환자는 초반에는 매우 사교적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큽니다. 처음에는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이죠.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는지 여부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부정적이라고 지각된 자신의 많은 부분들이 감춰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도하게 자신을 포장하고 자신에게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기를 갈망하는 것이 연극성 성격장애 환자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바, 사람들은 금세 연극성 성격장애 환자를 멀리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 이런 과장되고 피상적인 면들이 거슬릴 수밖에 없죠. 대인관계에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결점이라든지 부정적 감정 등을 감추고자 하지만 그 정도가 연극성 성격장애 환자들은 지나친 면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뻔히 보이는 것조차 인정을 못 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매우 미숙하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으로 비춰지기 쉽습니다. 부인된 욕구나 감정은 신체 증상을 통해 표현되기 쉽습니다. 연극성 성격장애 환자는 몸 어딘가가 아프다고 호소할 때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을 조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신체화(somatization)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고요.

자신의 한계, 욕구, 감정 등을 왜 부인하게 되는 것일까요? 사실 이 두 장애에서 관찰되는 현상보다 이 부분이 중요한데요. 이유 없이 생긴 방어기제는 없습니다. 하급 방어기제라 하더라도 그것이 생긴 타당한 이유가 있게 마련이라고 생각하면 이런 환자들을 공감하기 쉽습니다. 양극성 장애의 경우나 연극성 성격장애의 경우 모두, 아동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커다란 정서적 고통을 경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왔던 성폭력 생존자의 경우처럼 너무 큰 고통을 경험하다 보니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맥락화시키지 못 하고 이질적인 일부로서 의식의 뒤편으로 밀쳐버리게 된다는 것이죠.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부인이라는 방어기제가 삶의 역경에 대처하는 비효율적인 전략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일 수 있습니다.

물론 양극성 장애의 경우에는 딱히 그런 과거사가 없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양극성 장애는 제가 알기로는 장애의 발병에서 다른 정신장애보다 유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정신장애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전적인 소인을 지녔다고 해서 모두가 발병하는 것은 아님을 고려할 때, 양극성 장애를 지닌 환자에서도 아동기에 경험한 부모의 죽음과 같은 큰 정서적 고통이 있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외상적 경험이 아니더라도, 양극성 장애나 연극성 성격장애 모두 가정 내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부정적인 감정 표현 자체를 용납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요는 부인 방어기제가 어떤 식으로 형성된 것인지 그 기원에 관한 가설을 세우는 것이 환자 이해와 공감에 중요하다는 것이죠.

양극성 장애와 연극성 성격장애가 부인 방어기제의 사용을 통해 얻어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차이를 두는 것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연극성 성격장애 환자는 부인을 통해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관심과 집중을 얻어내길 원합니다. 자기애성 성격장애 환자처럼 자기가 잘났음을 입증하려 하기 위함이라기보다, 궁극적으로는 다른 사람과의 친밀감을 형성하기 위함이죠. 그 전략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결과가 친밀감 형성과 전혀 반대되는 것처럼 보임에도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따뜻한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양극성 장애 환자는 부인을 통해 정서적 고통을 야기하는 요인들(ex, 뭐 하나 이뤄 놓은 것 없는 현재 상태 등)을 보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울이라는 검은 개를 보지 않아도 되고 조증 삽화 동안에는 세상의 행복을 다 얻은 것 같은 기분이 드니 부인 방어기제가 강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사가 그렇듯 정점을 찍으면 다시 내려올 일밖에 없다 하더라도.

심리평가를 통해 어떤 정신장애를 지녔는지 감별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한 사람이 주로 쓰는 방어기제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오늘은 부인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기회가 되면 다른 방어기제도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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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팀 해두고 잘 읽겠습니다.

저는 일단 글 올리고 수정하는 편이라.. 매의 눈으로 오타 등 글 수정 중이었는데 리스팀하셨네요. ㅎ 감사합니다. : )

혹시 조던 피터슨 아시나요?

검색해 보니 캐나다 임상심리학자로 나오네요. 몰랐던 사람이에요.

요즘 이 분의 강의를 보고 있는데 참 좋아서요, 아시나 했습니다.ㅎㅎ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연극성 성격장애처럼 보이는 사람이 주변에 있어서 대입해서 보게 됐네요

주위에 성격장애 환자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죠. ㅎ

병원이 아닌 상담센터에서 일하다 보니 부인보다는 덜 원시적인 방어기제를 쓰는 내담자들을 더 자주 만납니다. 성격장애 진단까진 아니지만 그런 특성의 성격구조를 가진 경우도 제법되구요. 방어기제는 내담자를 이해하는데 큰 축이 되기 때문에 늘 흥미롭죠.

네 방어기제를 잘 이해할수록 여러모로 상담자를 힘들게 하는 내담자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덜 생기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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