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에 대한 상념 #1

in #kr-pen7 years ago

IMG_20170713_124531.jpg

2017.7. 제주, nexus 5x


바위 -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이 시를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문학 시간이었지만,
다시 곱씹어 읽게된 것은 대학생이 된 어느 날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십 대 초중반은 참 반짝였던 그리고 반짝여야했던 나날들이었지만, 그 당시의 나는 잿빛 사막 한가운데에서 숨이 턱 막힌 채 정처없이 걷는 느낌이었다. 어른이 되고 싶었고 그래서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은 독립된 어른이라고 부르기에는 미약한 시기. 감정의 진폭은 서서히 잦아들다가도 한번쯤 요동치고 사방에 흰 벽들이 나를 잠식시키는 느낌에 괴로워한 적도 있었다. 나는 생각보다 소설은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는데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허구의 이야기들보다 사람들의 삶과 경험이 조금 더 극적이고 진실되게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그러한 견해를 잠시 보류해둔 상태이지만.)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시는 달랐다. 시의 시어들이 느슨한 직조 하에 펼쳐져 있고 나의 삶은 나의 경험은 씨줄과 날줄의 일부분이 되어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시가 유도할 수 있는 풍부한 해석은 각자 삶의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일반화된 상념들이 개개인의 삶에 대해 구체성을 띠고 새롭게 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물론 어떠한 형태의 글이든 사람의 마음에 닿으면 조금씩 물이 들기 마련일 것이지만, 주판을 펼치듯 시어들의 견고함과 직조된 느슨함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적고 또 읽어내려야한다는 점은 분명 시(詩)만의 매력이리라.

유치환 선생님의 '바위'라는 시는 이제 한국시에서는 다소 고전에 불릴만 하지만, 흔들렸고 불안하였으며 방황했던 이십대의 버팀목이 되어준 길잡이 같은 존재였다.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는 입을 꾹 다문채 가만히 있다. 안으로 안으로 채찍질하며 침잠한다. 하지만 의지가 존재한다. 의지가 없다면 꿈꾸면서 아무 생각없이 노래하게 될 것이고 깨뜨려질 때 소리를 낼 것이다. 그러니 비자연스러운 반응은 의지의 능동적 행동이기도 하다. 행동이라는 것은 언제나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한 점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단지 부유(浮游) 하는 것의 반대 의미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삶의 방향을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 고마운 시였다.

(fin)

Sort:  

제가 감성이 메마른 이유가 마음속에 시가 없어서 그런 듯합니다.

누구나 가슴 속에 시는 있습니다. 있다고 믿습니다. 좀 더 건조한 감성의 시라 할지라도 말이에요. 제가 잠까이나마 지켜본바로는, @kimthewriter 님은 절대로 감성이 메마르신 분이 아닙니다. :)

어른이 되어 간다는 게 감성이 조금씩 말라가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음.. 이거 뭔가 시적인 생각 같은데 시라고 퉁 칠까요? :D

네. 시로 퉁치셔도 됩니다. 조금씩 세상을 알아갈수록 감성이 메말라가는 듯 보이나 어느순간 훅-치고 들어오는게 있더군요 :)

사는게 시고
말하는 것이 시이고
사랑하는 것이 시고
돈버는 거도 시인데
하물며 글을 쓰는거야 말해 뭐하겠습니까?
왜냐면 그것이 삶의 흔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긴 그렇습니다. 삶의 모든 것들이 시로 변화할 수 있는데 시를 시로 적으며 흔적을 남기는 것도 곰곰히 생각해보게되더군요. 좋은 통찰 주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시는 정말 읽을때마다 느낌이 달라요..덕분에 좋은 시 알아가네요 ^^

그게 꺼내볼때마다 달라지는 시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여행기도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

행동하지 않는게 어떨땐 더 어렵더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종종 올려주시는 글들 재미있게 잘 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저변이 넓어지는 느낌이랄까요.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

Coin Marketplace

STEEM 0.16
TRX 0.15
JST 0.027
BTC 60244.17
ETH 2333.72
USDT 1.00
SBD 2.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