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PEN클럽 공모전 <봄날의 일기> : 햇살 좋은날

in #kr-pen6 years ago (edited)

햇살 좋은날


  1. 내가 초등(국민)학교 3학년 때이다.
    늦은 오후였던 걸로 기억을 한다.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하얀 천을 씌운 아빠를 집안으로 데리고 왔다.
    분명히 아침에 안 입던 양복을 입고 친구 만나러 간다고 했었는데….

  2. 들어간다. 1평도 안 되어 보이는 사각 공간에 아빠가 들어간다.
    그리고 작은 유리창 너머로 아빠가 타고 있다.
    냄새가 났다. 중학교에 갔을 때 알았지만 그건 단백질이 타는 냄새였다.
    사각 유리창 넘어 열기는 따뜻했다.

  3. 모두 나에게 하얀 보자기에 쌓인 사각 상자를 안으라고 한다.
    차를 타고 산골 암자 같은 곳에 갔다.
    경남 마산 쪽에는 어린아이 발목까지 눈이 오는 날이 드물다.
    그런데 그날은 참 이상했다.
    눈이 많이 왔다.

  4. 사각사각하는 눈을 밟으며 암자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나에게 먼저 아빠를 보내드리라고 했다.
    보내기 싫어 상자를 꼭 안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엄마가 아빠를 먼저 보낸다고 상자를 달라고 했다.
    싫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한 움큼 쥐고 하얀 눈 위에 하얀 아빠를 보냈다.

  5. 그렇게 잊히는 줄 알았다.
    일 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그때 생각을 하면
    그 따뜻했던 상자의 온기가 가슴에 남아 느껴졌다.
    그리고 난 그 따스함을 느꼈다.
    그렇게라도 아빠를 기억하고 싶었다.

  6. 어느 날부터는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그 따스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날을 잡고 여친(지금의 와이프)과 함께 마산의 암자를 찾았다.
    그리고 가끔 혼자서도 아빠가 보고 싶은 날에는
    서울에서 차를 몰고 마산으로 달렸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에 남아있던 그 따스함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7. 결혼하고 수년간 바빠서 찾지 않았던 아빠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아이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그 암자에 배가 엄청 나온 남자가
    자기 배를 만지면 아들이 생긴다고 하길래 만졌다.

  8. 그리고 다녀온 지 100일도 안 되어 아이가 생겼다.
    8년 만에 아이가 생겼으니 주변에서 기뻐해 주었다.
    임신 소식에 너도나도 태몽 이야기를 해준다.
    다음에 배 나온 남자에게 가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겠다.

  9. 매달 압구정 00 산부인과에 갔다. 공주님이란다. 내심 기뻤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배 나온 남자가 사기를 쳤다.
    배만 지면 왕자님 생기게 해준다더니 공주님이다.
    다음에 찾아가면 물어봐야겠다. 사기 친 게 맞는지…….

  10. 곰곰이 생각하던 나를 보던 와이프가 실망했냐고 묻는다.
    아니라고 답했다. 정말이지 나 같은 아들 생겼으면 큰일 날뻔했다는 걸 안다.
    그리고 보니 그 배 나온 남자에게 사기 쳐서 고맙다고 해야 할 것만 같다.

  11. 아이가 어려서, 일이 바빠서, 등등 미루고 미루다가
    드디어 작년 휴가 때를 맞춰 아빠에게 갔다.
    공주님은 처음으로 할아버지 보러 간다고 신났고
    난 그 배 나온 남자에게 따지러 간다고 심란했다.
    그나저나 배 나온 남자에게 뭐라고 하지?
    고맙다고 해야 하나? 사기 쳐서 책임지라고 해야 하나?

  12. 아빠를 보낸 곳에 공주님을 세웠다.
    이곳에서 어릴 때 할아버지를 보내드렸다고 말해줬다.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내 눈을 보던 공주님도 훌쩍이기 시작한다.

  13. 눈물이 없다. 그날 아빠를 보낼 때, 훗날 할머니를 보낼 때도 난 울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에서 어린놈이 독하다고 했다. 그냥 그랬다. 울고 싶지 않았다.
    허벅지라도 꼬집어 없는 눈물을 만들어냈어야만 했나?

  14.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곳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것일까 할아버지 만나러 온 공주님 앞에서
    이 주책맞은 눈물샘은 눈치 없이 터져버렸을까?

  15. 부인이 공주님 손을 잡고 자리를 피해준다. 아마 못다 한 이야기를 하라고 피해 주는 듯하다.
    가만히 그 자리에 앉아 아빠를 기억해낸다. 떠오르는 건 항상 손에 카메라를 쥐고 있던 모습이 떠 오른다.

  16. 갑자기 '아들~! 뭐해~ 찍어' 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셔터를 눌렀다.


_DSC4172-편집.jpg


그게 이 사진이다.
셔터는 내가 눌렀지만, 시선은 아빠의 시선이다.

그때 눈이 오던 날
아빠를 여기에 남겨두고 떠나는 나의 모습이 사진 속에서 보인다.

"아빠…. 내가 아빠가 되고 보니 당신이 더 그립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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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햇살 참 좋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이 노래가 흘러나왔다.

절대 그럴일이 없겠지만....
이글이 만일 당선이 된다면 그 배나온 남자에게 따졌던 글을 쓰겠다.

그냥 좀 알려주세요 당선 안돼도

안돼욤 ㅋㅋㅋ
창피해욤. ㅋㅋㅋ

공모전 글들 쭉 읽어보는 중이에요. 그림에 나온 아내와 아이의 사진이 화보인줄 알았어요. 보고만 있어도 배부르시겠습니다. 아버님도 멀리서 지켜보시고ㅡ기뻐하실 듯 합니다^^

며칠뒤면 저도 아버지 기일이라 그런지 아버지 생각이 나는군요.

괜히 저 때문에 아침부터...

그러셨군요... 온 가족이 좋은 나날 되소서!

감사합니다 ^^*

어린 족장님도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씩씩하게 자라주시고 다정한 아버지가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 잘했어요 도장 쾅쾅

도장 한번더 찍어주면 안되는겁니꽈~!! ㅋㅋㅋ
3번 해줘야죠~~!! ㅎㅎ

배 나온 사람 이야기 해주면 한개 마저 찍어드림

음.. 일단 당선되면요 ㅋㅋㅋ

족장님의 직업은 무엇인가요? 사진작가, 글작가, 강사, 회사원 ... 족장님은 쫌 거시기하신 편인 것 같습니다. 웃기다 울리다 또 웃기다 ^^

족장님의 아빠는 족장님을 무척 대견하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지켜보실 것 같아요. 저는 부모님을 보낸지 얼마되지 않아서, 아직 많이 극복을 못했지만 늦게까지 함께 한 것에 감사하고 이제 제 길을 더 씩씩하게 가야 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족장님 덕분에 ... 감사합니다 :)

응원합니다. ^^*

화이팅~!!!

일기에 아버지 이야기가 참 많네요.
저도 아버지 기일이라서 한번 써봤는데...
댓글에도 전부 눈물이야기 아버지 이야기...

일기 투어 하다가 눈물만 납니다.
잘 읽고 갑니다.
팔로우도 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어제밤에 써놓고 일부러 늦게 올렸는데...
일기를 보러 와주셨네요..

눈물이 또르르.... 저도 어릴때 엄마를 잃었거든요. 그날이 생각나네요. 저도 그때 울지 않았거든요. 요즘은 엄청 울지만요 ㅜㅜ

우시면 어떻합니꽈~!!!
웃길려고 쓴글에 눈물 바다를 만드시다니...
그런 의미에서 오늘 제시카님 특별 방송 갑니다.

10시쯤 할테니 어디 도망가세요~!!
멀리~ 멀리~!!

이게 어떻게 웃겨요? ㅠㅠ 꺼이꺼이했구만요. 10시 방송 기다릴게요 ㅎㅎㅎ

10전에 후딱 끝내버려야겠어요 ㅋㅋㅋ

아니 이새벽에 이런글을 쓰시면 뭐라고 댓글을 씁니까?

안그래도 갱년기 탓에 건들믄 눈물샘이 폭발 하는데

아고~ 눈물나

공주님께
아빠좀 안아 드려요 토닥토닥도 해주고

어디요???
전 사진을 올렸는데요 ㅎㅎㅎㅎㅎ

감성자극하지 마세요
개그 보면서도 눈물나요 ㅠㅠ

전4학년때 어머니를 보내드렸습니다
바로 엊그제가 제사였죠
에효~~

저랑 비슷한 경험이 있으시군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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