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잇, 팍스넷 그리고 팬덤

1990년대말 주식투자를 하셨던 분들이라면 팍스넷(paxnet)이라는 전설적인 투자 커뮤니티를 기억하실 겁니다. 정말 대단했었죠. 홈트레이딩시스템(HTS)이 대중화되면서 인터넷으로 주식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토론하는 투자 커뮤니티는 절정의 인기를 끌게 되죠. 국내 인터넷 기업 가운데 최초로 골드만삭스로부터 500만달러를 투자받을 정도였으니까요.

요즘 스팀잇을 연구하다 보니 팍스넷이 부쩍 많이 떠오릅니다. 팍스넷에서 오가던 종목 토론이 스팀잇에선 암호화폐 종목 토론으로 대체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죠. 둘의 차이가 있다면 팍스넷은 토론의 장이라는 그릇 역할만 한 반면 스팀과 스팀달러라는 자체 종목을 보유한 스팀잇은 그릇과 내용물 역할을 함께 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팍스넷이 2016년 증시에 상장되면서 그릇과 내용물 역할을 함께 하기 시작했지만 이미 그릇의 수명은 다한 상태죠.

그렇게 잘나갔던 팍스넷은 2002년 박창기 대표가 보유지분 67%를 SK텔레콤에 매각(260억원)한 이후 줄곧 하향세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SK텔레콤에 이어 KMH, 파빌리온프라이빗에쿼티 등 주인이 수시로 바뀌면서 팍스넷은 쇠락을 거듭하고 있죠. 근데 팍스넷을 버렸던(?) 박창기 대표가 블록체인 전문가가 돼서 화려하게 복귀한 것은 정말 무릎을 치게 만드는 대반전 드라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스팀잇에선 스타와 팬덤 간에 일어나는 문화 현상도 종종 목격됩니다. 팬들이 십시일반 돈을 거둬 지하철 등에 광고를 거는 일이 대표적이죠. 최근 스팀잇에서도 이런 현상이 포착됩니다. 스타가 더 유명해지는게 곧 내가 잘되는 것이라는 강한 유대감이 스티머들에게 엿보이는 거죠. 스타가 뻘짓만 하지 않는다면 팬덤과의 관계는 대체로 오래 지속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요즘 스팀잇에선 공동 창업자였던 네드 스콧과 댄 라이머의 갈등이 스티머들 사이에 큰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번 다운보팅 사건 뿐만 아니라 애초에 둘의 갈등이 왜 시작됐는지 히스토리는 잘 모르겠지만 보이그룹의 메인보컬과 메인랩퍼가 대판 싸운 뒤 한 명이 그룹을 탈퇴한 것에 비유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어쩌면 진짜 중요한 건 이 두 사람이 아니라 이들을 추종하는 팬덤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보이그룹 팬들은 저마다 좋아하는 멤버가 따로 있기 마련이죠. 스티머들 역시 네드와 댄의 팬이 분명 따로 있을 겁니다.

팬덤이 분열되지 않고 똘똘 뭉쳐 한 쪽 스타를 전폭적으로 지지한다면 위기는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운이 좋으면 동방신기와 JYJ처럼 원조 스타와 떨어져나간 스타가 모두 잘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죠. 최악의 시나리오는 팬덤의 분열과 대립이겠죠. 하여튼 네드와 댄의 갈등은 이래저래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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