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릭 바스티아 연재 (1)] 바스티아는 누구인가?

in #kr-newbie6 years ago (edited)

안녕하십니까? @jin90g 입니다.
오늘부터 제 석사 논문 "프레데릭 바스티아의 [경제적 조화]에서 교환개념"의 내용을 기반으로 장기 연재에 들어갑니다. 프레데릭 바스티아.... 는 음......... 뭐 요즈음 경제학 복잡하고 어렵잖아요? 이 사람 책 읽으면, 당시 철학의 형태로 살아 숨쉬던 고전기 경제학들의 형태와 쟁점들을 살펴볼 수 있어서 이것저것 도움이 될 것 으로 생각됩니다.
더불어 한국사람 입장에서는 조금 뭐랄까.... 신선한 정치경제학 이야기가 더러 있을 것입니다.

주석은 논문 원문에 모두 기록돼 있습니다만... 인터넷 글로 옮기기 어려워 대부분 생략... 출처도 약식으로 기록합니다. 제 논문은 꽁짜라서 네이버에서 검색해 들어가면 누구나 다운받다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지루한걸 어떻게 한번에 다 봅니까...
여기서 내용 짤라서 필요한 것만 뽑아보는것도 편리할 것 같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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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바스티아는 누구인가?


2월 혁명 당시 활동했던 공화파/자유주의자 정치가
(왼쪽이 프레데릭 바스티아, 오른쪽은 알폰스 드 라마르틴)

관세 철폐자, 천재 경제평론가, 오스트리아 학파의 선구자, 다른 사람들이 클로드 프레데릭 바스티아(Claude Frédéric Bastiat 1801-1850)를 부르는 이름들이다. 바스티아는 우리에게 낯설다. 물론 우리가 프랑스의 세세한 역사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더 큰 이유는, 바스티아가 말하는 정치경제적 자유가 우리에게 낯설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선거를 통해 통치자를 선출한다. 언론의 자유를 누리며, 헌법이 보장하는 ‘다양한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가? 정부는 여전히 우리에게 세금을 걷는다. 그 세금은 우리의 뜻과 상관없이 사용된다. 징병제는 나라의 청년들을 강제로 데려가 정당한 보답 없이 일하게 만든다. 정부는 국민들에게 명령하고, 국민들을 강제하고, 심판한다. 반면에 바스티아는 정부의 간섭 그리고 자유를 제약하는 모든 억압을 비판한다. 그래서 그의 정치경제학은 우리에게 낯설고, 허황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우리가 그를 더 알아보려 하지 않았던 이유이다.

그래서 필자는 논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프레데릭 바스티아의 생애와 역사적 배경을 먼저 소개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살아온 생애를 보다 상세히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그의 정치경제학 이론을 쉽게 오해하지 않을 것이며, 그가 왜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을 택했는지도 알 수 있을 테니까. 흥미롭게도, 그가 살았던 프랑스의 상황은 지금 우리나라와 여러 면에서 닮았다.


자크 루이 다비드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A. 나폴레옹의 유산

바스티아의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은 나폴레옹에 대한 정반대로서 시작되었다. 그는 혁명의 시대를 살았다. “1789년에서 1848년 사이에, 프랑스는 세 번의 군주정, 두 번의 공화정, 한 번의 전제정치를 가졌다.”(Baugus, Brian. 2008)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부터 공화주의자에 아나키스트까지, 다양한 정치세력이 권력을 놓고 정치 투쟁을 벌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았던 세력은, 나폴레옹 같은 사람이 프랑스를 다시 위대하게 만들 거라는 생각, 훗날 보나파르티즘(Bonapartisme)이라 불리는 국가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었다. 실로 혁명의 시대는 다른 한편 나폴레옹의 시대이기도 했다.

바스티아는 나폴레옹 1세(Napoleon I)의 시대에 태어나 나폴레옹 3세(Napoleon Ⅲ)의 즉위를 앞두고 죽었다. 전 유럽을 휩쓴 나폴레옹 전쟁은 프랑스 국민들의 마음속에 영광을 안겨 주었지만, 그와 동시에 프랑스를 전 유럽으로부터 고립시켰다. 특히 대영제국(Great Britain)을 견제하기 위해 선포된 대륙봉쇄령은 프랑스 정부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외국 상품의 수입을 대대적으로 금지하는 나폴레옹의 새로운 관세법 덕분에, 품귀 현상이 프랑스의 지배적인 경재문제로 부상했다. 이 문제는 바스티아의 죽음 후에도 한 동안 지속되었다. 항구도시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바스티아는 대륙봉쇄령 직접적인 피해자였다. 부모를 여읜 후 친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던 바스티아는, 17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삼촌의 무역회사에서 일하면서, 보호무역주의의 해악을 직접 체험하고 관찰하며 자랐다.

그래서 바스티아는 자유무역 운동가로서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에 첫발을 내딛었다. 성인이 된 후, 바스티아는 돌아가신 할아버지로부터 농장을 상속받았다. 그는 직접 농장을 경영하면서, 애덤 스미스나 장 바티스트 세(Jean-Baptiste Say 1767-1832)와 같은 앞선 세대 학자들의 책으로 정치경제학을 독학했고 학자들과의 토론하며 지식을 연마했다. 왕정복고 후에 샤를 10세가 언론의 자유를 정지하고 의회를 해산하는 등, 절대왕권을 부활시키려 했고, 이로 인해 7월 혁명이 일어났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영광의 3일’로 샤를 10세를 끌어내렸고, 왕관은 ‘시민왕’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에게 돌아갔다. 이때부터 바스티아는 보호무역주의를 비판하고 자유무역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831년에는 뮈그롱(Mugron)의 치안판사로 선출되었고, 1832년에는 랑드(Landes) 지방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Bastiat, Frédéric, 『국가는 거대한 허구다』, 이상률 역, 이책, 2016)

루이 필리프는 샤를 10세에 비하면 근대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자유주의를 지지하는 태도를 표방했다. “검열은 줄어들었고 소유권에 기반 한 참정권이 점차 확대되었다. 선출된 의회는 법을 입안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이것은 비록 사회적 혁명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콜린 존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프랑스사』, 방문숙·이호영 역) 그러나 루이 필리프 또한 국가주의 망령, 보나파르티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이웃나라보다 뒤처진 프랑스 산업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알제리를 정복했고,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무역 장벽은 여전히 존재했으며, 그래서 프랑스 경제는 내륙 중심으로 폐쇄되어갔다. 상거래는 줄어들었고 농민들은 자급자족을 우선시 했다. 각 계급과 파벌들 사이에 분쟁 또한 깊어져갔다.

이때부터 다양한 정치경제 사상가들이 급진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사회주의자들은 루이 블랑(Louis Blanc)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가톨릭 엘리트들은 앙시앵 레짐의 가치에 얽매여 있었다. 무정부주의자들의 흑기가 휘날리는 한편, 나폴레옹 1세의 업적과 영광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정치적 분쟁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바스티아는, 1845년 말에 자유무역협회를 조직해 적극적 정치활동을 추진했다. 물론 자유무역협회는 국가적인 지지를 받는데 실패했고, 대신 사회주의와 보나파르티즘이 사람들 사이에 더 많은 인기를 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스티아 자신은 여전히 대중적이었다. 그는 재미있는 풍자와 비유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언제나 힘이 아닌 글로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외젠 들라크루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혹은 프랑스의 모에화 "마리안느"

B. 프랑스 2월 혁명

필리프 왕정 말기, 크나큰 경제 불황이 발생하면서,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1848년 2월 22일, 선거권 확대를 위한 토론회는 정부 탄압에 발 맞춰 정치 시위로 돌변했다. 시위는 2월 혁명으로 번져갔다. 결국 왕은 실각했으며, 파리에서는 기자와 자유주의적 정치가 그리고 법률가들로 구성된 임시정부가 공화정을 선포했다. 2월 혁명은 큰 변화를 가져왔다. 루이 블랑과 사회주의자들은 적기(赤旗)를 새 공화국의 국기로 채택하려 했고, 임시정부 수반이었던 라마르틴(Alphonse de Lamartin)은 ‘황금 하프’라 칭송받는 연설을 통해 삼색기를 프랑스 공화국 국기로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성인 남자의 보통선거제도가 수립되어, 유권자가 24만 명에서 9백4십만 명으로, 전체인구의 약 4분의 1로 늘어났다. 프랑스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던 변방의 농민들도 한 가구당 한 표를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 “라마르틴은 바스티아에게 그가 사임했던 정부 요직을 제의했다. 그러나 바스티아는 그가 무엇보다도 저널리스트와 평론가가 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 선거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1848년 봄, 이때 그는 국회의 대의원 자격을 얻었다. 국회의 최우선 임무는 새 선거를 치르기 위한 새 헌법을 만드는 것이었다.”(Baugus, Brian. 2008)

바스티아는 낮은 조세부담, 자유무역, 정부 지출 삭감, 불필요한 전쟁과 식민지 개척 중단을 중심으로 다양한 정치활동을 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사실상 적색 공포로 가득했다. “무장한 노동자들의 압력에 의해 정부는 노동권을 보장하고,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를 인정하였으며, 실업자 구제를 위한 국립 작업장(ateliers nationaux)을 설립했다. 이는 파리의 실업자들을 고용하는 일종의 자선 작업장이었으나, 곧 혁명적인 폭동의 온상이 되었다.”(김복래, 『프랑스사』, 2005) 3개월 만에 작업장의 노동자들은 천 명에서 10만 명으로 폭증했다. 정부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농민들에게 부과되는 토지세를 45% 인상하는 등의 자충수를 두었다. 바스티아는 사회주의자들이 설계한 국가를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들을 희생시켜 먹고 살려고 하는 거대한 허구”
(『국가는 거대한 허구다』)라고 맹렬히 비판했다. 그리고 바스티아는 다른 시민들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사상을 보다 확장시켜갔다. 이 과정 가운데, 그는 조세와 화폐 그리고 공적자금을 통한 채용과 식민지 전쟁 등 다양한 주제를 학문적으로 다루었으며, 정부의 본래 역할이 무엇인지 또한 논하였다.

그러나 사회문제는 더욱 심화되어갔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구할 수 없어서 고충이었고, 국립 작업장의 노동자들은 세금으로 살아가면서도 공공연히 반정부적 언사를 표하며 일반 시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계급간의 갈등은 심화되어갔고, 신문들은 비난조의 기사를 쏟아내었다. 결국 제헌 의회는 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국립 작업장을 폐쇄했다.

그러자 6월 23일,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들이 국립 작업장 폐쇄를 계기로 봉기했다. 제헌의회는 점거 당했고, 의원들은 인질이 되었다. 국방장관 카베냐크(Louis-Eugène Cavaignac) 장군은 의회 요청으로 정부 수반이 되었다. 그는 병력을 소집해 폭동에 맞서 싸웠고, 유혈이 낭자한 3일의 시가전 끝에 6월 봉기를 진압했다. 역설적이게도, 그가 소집한 병력들 중 일부는 사회주의 공동체에 통합되지 않았던 젊은 실직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당연하게도 임금을 지불한 정부와 기타 부유한 시민 동지들 위해,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에게 공격당한 동포들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

봉기 진압 끝에, 제헌의회는 당시로서는 매우 민주적인 헌법을 제정하는데 성공했다. 나라를 휩쓸었던 적색 공포도 비교적 해소되었다. 비록 카베냐크 장군 또한 비난받았으나,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비난을 받아 의회에서 축출되었다. 남은 것은 새로운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뽑는 일이었다. 그러나 새 정부의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자, 프랑스 제2공화국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선거권 확대로 새로운 유권자가 된 농민들은 사회주의자들과는 또 다른 방향의 극단적 성향을 보였다. 한편으로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국립 작업장 때문에 입었던 크나큰 피해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후보를 택할 수 없었다. 왕당파들은 사분오열되었다. 공화파 후보 카베냐크 장군은 동족상잔이라는 흠결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농민들은 황제 나폴레옹 1세의 조카였던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Louis Napoleon Bonaparte)에게 몰표를 던졌다. 나폴레옹과 같은 대담한 인물이 사회주의를 철저히 억압하고, 나아가 사회 질서와 나폴레옹 시대의 영광을 되찾아 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왕당파는 그가 반-공화파라는 이유로 투표했고,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을 억압한 카베냐크 장군에 대한 반감에 따라 그를 뽑았다. 바스티아는 루이 나폴레옹을 또 다른 국가주의 망령으로 보고 낙선 운동을 펼쳤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제헌 의회는 새로운 정부의 압력에 자신들이 고립되고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의원들은 의회를 해산하고 새로운 선거를 치르기로 했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온건-공화파와 자유주의자들은 대거 낙선하게 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전국단위 정당 운동을 통해 부활했고, 농민을 비롯한 왕당파들은 또 다시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재산을 침해당할까 두려워 더욱 더 보나파르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바스티아는 이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어 재정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었다. 이때도 그는 정부지출의 삭감, 낮은 조세부담, 자유무역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반대파들의 요구에 밀려 번번이 좌절되었다.”(『국가는 거대한 허구다』)

한편 바스티아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다. 그는 폐결핵 때문에 휴양해야했고, 의회 활동을 잠정적으로 중단해야 했다. 대신 그는 휴양 중에 자신의 정치경제학 이론을 학문적으로 보다 정교하고 세련되게 다듬었다. 프랑스 청년들에게 자신의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을 유산으로 남기기 위해서였다. 바스티아는 생애 마지막 1년 동안 자신의 저작들 중 가장 유명한 「법」,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리고 『경제적 조화』Ⅰ을 출간했고, 『경제적 조화』Ⅱ의 초안을 작성했다. 1850년 12월 24일, 건강 악화를 이기지 못한 그는 휴양을 위해 찾아간 이탈리아 로마에서 숨을 거두었다. 2년 후에 제2공화정의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은 친위 쿠데타를 통해 의회를 무력화했고, 두 번의 국민 투표를 거쳐 세습 제국을 수립, 제2제국 황제에 등극했다.(농민들의 지지를 통해 황제가 된 ‘나폴레옹 3세’는 ‘농민 황제’라 불리기도 했다. 로저 프라이스, 『혁명과 반동의 프랑스사』, 김경근·서이자 역)


<나폴레옹 3세, 매력남, 병인양요, 만국박람회, 2의 남자>

C. 국가주의와의 사투

우리는 바스티아의 생애와 프랑스 제2공화국의 짧은 역사를 살펴보았다. 프랑스는 나폴레옹 1세가 남긴 유산, 국가주의에 물들어있었다. 바스티아에게 사회주의·공산주의는 다른 형태의 국가주의, 또 다른 누군가의 보나파르티즘에 불과했다. 정부의 힘이 전지전능하여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위대한 정치가가 민중을 이끌어 영광으로 인도할 거라는 생각. 국가가 명령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 바스티아는 이처럼 국가를 맹신하게 만드는 생각들, 나폴레옹 1세가 남긴 유산과 싸워나간 것이다.

또한 바스티아는 국가주의가 법의 타락을 심각할 정도로 부추기는 모습을 비판했다. 법이 약탈의 도구가 되면, 정의와 불의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공권력은 가장 효율적인 약탈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사람들 사이의 정치적 투쟁이 가속화된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정치권력을 쟁취해야 하고, 혁명이 끝없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생각의 연쇄는 누군가의 이득이 누군가로부터 약탈한 것이라는 것을 전제한다. 바스티아는 시장 거래가 본질적으로 약탈적이라는 생각과도 싸워야 했다.

바스티아가 경계한 나폴레옹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그 힘을 잃지 않았다. 우리는 지난 20세기 동안 파시즘, 민족주의, 사회주의, 군국주의 등 다양한 형태의 국가주의를 경험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이웃나라의 국가주의 사상 때문에 식민지 생활을 겪기도 했지만, 우리 안의 국가주의 때문에 나라를 반으로 갈라야 했다. 오랫동안 정부 관료들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고, 수많은 정치가들이 타락했다. 이 모든 국가주의 중에 지금까지 살아남아 번영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는 정부 공권력으로 많은 것을 해결하려 한다. 우리는 정부가 경제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규모 공공사업으로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육과 의료를 무상으로 제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민들로 하여금 국산품을 쓰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부자들이 약탈해간 재산을 몰수해 모두에게 분배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부가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을 도외시한 채, 보다 착하고 훌륭한 사람에게 통치를 맡기려 한다. 그러나 그는 단지 또 다른 나폴레옹일 뿐이다.

사람은 실수하기 마련이고, 그래서 국가주의 망령 또한 언제라도 우리를 다시 사로잡을 수 있다. 바스티아는 이 망령이 우리를 다시 사로잡지 못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정부 간섭이 쓸모없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시장거래가 약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결함을 개선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서로 교환하고 연대하며 협력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모든 정당한 욕구가 자연적 조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그리고 오직 자유가 정치경제적 문제의 해답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바스티아의 정치경제학은 나폴레옹의 유산, 2월 혁명, 그리고 국가주의와의 사투라는 맥락 속에서 잉태되었다. 그래서 바스티아는 정부의 인위적 조작이 부분적으로 필요하다는 선에서 타협할 수 없었다. 그는 국가주의가 근본적으로 부당하며, 자유로운 교환이 근본적으로 정당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이를 위해 바스티아가 택한 방법은 자유로운 교환이 정부와 법에 앞서 존재하고, 자연법에 따라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정부 또한 교환의 자연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바스티아가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통해 교환을 정당화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바스티아의 『경제적 조화』를 중심으로 그의 시도를 검토할 것이다. 바스티아의 핵심 주장은 ‘모든 정당한 욕구의 조화’이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 교환 개념이 그의 핵심 주장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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ㅎㅎ 4화부터 보게되서 1화부터 이제 읽기 시작합니다! ㅎㅎ

경제학에 관심이 많이 있긴 하지만 태생이 공돌이인지라 ㅎㅎ 그래도 교양서를 많이 읽었고 쉽게 써주셔서인지 백프로는 아니지만 80프로 정도 이해가 되는군요 ㅎㅎ

배운 내용으로 이제 곧 다시 한국에 올 프랑스 친구에게 한번 질문(?)해 봐야겠군요 ㅎㅎ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정치가가 지금 프랑스에서 과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을지 조금 불안하기도 하네요^^

기자님 안녕하세요.^^ 최근에 바스티아에 대한 기자님의 글을 한번 읽고 싶었는데 이렇게 좋은 글을 게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스팀잇에는 플랫폼에 맞게 호흡 잘라서 올릴 생각입니다. 글 머리에도 말씀드렸듯이. 해당 글의 주석 포함 원본은 RISS 혹은 네이버 검색으로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현재 글에서 궁금하거나 미묘한 것에 대해 질문해주시면 연구한 범위 안에서 답변드리겠습니다.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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