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야브기다’ 차(茶)의 성공과 실패.

in #kr-newbi7 years ago (edited)

부지당(不知堂)의 차 이야기 13.

“일본의 다도(茶道)같은 차 형식이 우리는 와 없습니꺼?”
차 강의 두 번째 날에 어떤 학생이 물었던 이 질문은 내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습니다. 당시는 나 역시도 그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차를 공부하는 모두가 그 답을 찾기가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오죽하면 효당(曉堂)이 초의(草衣: 1786~1866)를 비롯한 다산(茶山)등 조선의 선비들을 동원하여 그들의 차 생활을 빗대어 ‘한국의 차도(茶道)’라 소개했겠습니까?

우리에게 정말 차(茶)를 마시는 일정한 형식이 없었던 것일까요? 그렇다면 우리 생활속에 있는 ‘다반사(茶飯事)’ ‘다모(茶母)’ 차례(茶禮)와 같은 낱말들은 무어란 말입니까?
우리는 금수강산의 모든 초목(草木)을 재료로 다양한 방식으로 약(藥)이나 음료(飮料)로 만들어 마셔왔고, 이런 것들을 우리는 차(茶)라고 했습니다. 예컨데 오미자, 구기자, 뽕잎, 오갈피, 감잎 등 수많은 종류의 식물을 차로 만들었고, 여기에 녹차도 그중 한가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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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같은 차 생활을 수천 년이나 지속해 왔던 우리가 왜 갑자기 일본의 다도를 배우겠다고 줄을 서는 일이 벌어지고, 이제는 중국 차(茶)까지 밀려와 비싼 돈을 주고 사먹는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모릿재로 돌아온 나는 이같은 일이 벌어지는 데는 분명 숨어있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보았습니다. 해서 난 차와 관련된 자료와 여러 가지 논문들을 주의깊게 살펴보았습니다. 그 결과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실체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간 중국과 일본이 자기 차를 팔아먹기 위해 피터지는 전쟁을 벌려왔고, 한국인들은 그런 것도 모르고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듯이 개피를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이야기가 믿기지 않는 분을 위해서 설명을 좀 더 해 보겠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우리 금수강산에는 수많은 초목들이 자라고 있고, 이들을 재료로 차를 만들어 먹었던 생활문화가 있었습니다.(여기서 이같은 식음료에 왜 차(茶)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는지는 다음에 거론하겠습니다.)

따라서 차는 우리에게 일종의 식품이었기 때문에 여기에 형식이 필요할리가 없었지요. 그러나 중국과 일본은 달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차나무 잎만을 차(茶)의 주인공으로 삼아야 했습니다. 왜 그랫을까요?

여기에는 일본과 중국의 속사정이 각자 다릅니다. 일본의 경우는 국가적 차원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다도를 보급하려 했고, 그에 적합한 재료가 필요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는 사정이 더 복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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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차나무만을 차라 주장하게 된 원인은 중국 땅이 갖는 특수성 때문일 것입니다. 중국은 대부분의 땅이 평원으로 되어 있고, 황하(黃河)와 양자강(揚子江)의 젖줄로 먹고 살아왔던 나라입니다. 따라서 농업이 주된 생산 수단이었고, 그러자니 수확을 유지하려면 어쩔 수 없이 하천이나 지하수가 오염될 수밖에 없어 정수된 물이 아니면 마시기 힘든 상황이되었습니다. 또 음식물도 기름에 튀겨 먹어야 안심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같은 식생활 형태에서 오는 비타민 부족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가 중요한 화두(話頭)가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차나무 잎이라는 구세주를 만나면서 문제 해결의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수십억의 인구에게 차를 공급하기 위해 거대한 차밭이 만들어졌고, 찻잎의 특성 때문에 다양한 맛과 향기를 가진 차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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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다양한 종류의 맛과 건강음료로써 수천년의 역사를 가진 우리 차와 차나무 잎만으로 만들어진 것 중에 우리 차가 대용차 정도로 평가절하 되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나는 이것을 어떤 작전 세력들이 개입하여 만들어낸 의도적인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왜 그리 의심을 갖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보게습니다.

그러자면 먼저 차나무 잎이 가진 특성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선 찻 잎은 법제 방식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집니다. 다음으로 차를 우려내는 사람의 실력에 따라 맛과 향(香)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여 큰 돈을 만질 수 있습니다.
이같은 차의 특성을 활용하여 제일 먼저 시동을건 것은 일본(日本)이었다고 봅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그들의 다도(茶道)는 약 250년전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만들어진 산물(産物)입니다. 처음에는 찻잎도 귀했고 다기(茶器)들을 구하기도 힘들었기 때문에 무사계급이나 상류층만이 즐기는 문화였습니다. 하지만 메이지 유신(1868년)때에 이르자, 다도는 일본인들의 생활 문화로 자리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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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되자 급격히 늘어나는 찻잎을 확보하는 것이 다급해졌습니다. 한반도나 중국에서 차 씨를 구하여 심어보았지만 일본의 토질상 차나무가 잘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같은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스기야마(杉山彦三郞;1857-1941)’란 구세주가 나타납니다. 그는 종자개량을 통해 ‘야브기다’란 종자(種子)를 개발함으로써 녹차 잎의 부족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 종자는 뿌리가 줄기보다 길게 자라는 기존 차나무와 달리 뿌리가 옆으로 퍼지면서 비료만 주면 잘 자랐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야브기다 종은 한반도를 점령한 일제에 의해 전남 보성에도 이 차나무가 심어지게 됩니다. 자신들에게 필요한 녹차를 공급받기 위해서 겠지요. 결국 패전으로 본토로 쫒겨 나갔다가 한일 교류가 시작되면서 이들은 남한에 다도를 보급시키기 위한 치밀한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는 다도가 남한에 보급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먼저 한국의 경제 사정이 좋아지는 것을 기다려 일본 문화에 향수를 가진 사람들을 중심으로 차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대기업의 지원까지 받으며 한국사회 전반에 다도 바람이 불도록 했습니다. 결국 보성 차밭이 다시 규모를 확대시키고 제주도에 거대한 다원이 만들어지면서 다도는 한국인들이 익혀야 할 필수 교양정도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에서도 차를 가르치는 학과도 개설되면서 다도를 배우려는 열풍이 한국 사회를 휩쓸게 됩니다.그러자 녹차의 소비량이 폭팔적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같은 황금기는 단명으로 끝나고, 한국의 녹차 산업이 폭 망하게 되는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이 내용은 다음에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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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내용과 사진 다 소중한 것들이네요!!!
근데 보팅해도 왜 액수는 안 나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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