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 빠진 자들에게

in #kr-movie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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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 빠진 자들에게 ”

한 사건을 두고 그것을 관찰·경험하는 주체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인식하고 해석하는 경우를 가리켜 ‘라쇼몽 효과(Rashomon Effect)’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엉터리 개념이다. 라쇼몽 효과를 누가 처음 언급했는지 출처조차 불분명하다. 원작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원작 소설인 <라쇼몽>, <덤불속>이나 이 둘의 스토리를 합쳐 영화 <라쇼몽>을 만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인식에는 ‘주체에 따른 각각의 해석’이 중요한 포인트가 아니었다. 인식의 다양성을 강조한 의미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 전제가 아닌 전부라고 강조되었을때 통일성과 상호침투의 관계를 맺지 않는 다양성은 자칫 이해관계가 상반된 강자와 약자의 입장을 동일하게 처리하는 결정적 우를 범할 수 있다.

영화든 소설이든 <라쇼몽>은 자기 이해관계에 따라 각자 ‘기억의 정당화’의 문제라기보다 이런 이해관계의 기억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자기의 욕망충족이나 이익 추구에서 출발한 ‘기억’은 ‘실존’, ‘생존’이라는 문제 앞에서 ‘선와 악’의 도덕과 윤리조차 ‘부질없음’을 강력한 메시지로 전한다.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과 고통의 지점은 각각 다를 수밖에 없지만 내가 가장 큰 절망을 느낀 영화는 쿠르드족 출신 이란 감독 ‘바흐만 고바디’의 <거북이도 난다(2004)>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 영화를 공유해줬던 사람들의 반응이 대부분 시큰둥한 걸 보면 각자 느끼는 절망의 지점은 역시 다른가 보다. 그런데 내 아는 누군가가 절망에 빠졌다고 한다. 나는 주저 없이 이 영화를 추천해줬다. ‘실존’과 ‘생존’의 현실 앞에 놓인 ‘절망’이 아니라면 그 ‘절망’은 사치스럽다.

올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나디아 무라드’는 이라크 내 소수민족 ‘야지디족’ 출신이다. 야지디족은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아리안족’ 계통의 ‘쿠르드족’의 일파로 일반적으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또한 달리 독특하다. 쿠르드어를 사용하지 않고, 이슬람을 믿는 쿠르드족과는 달리 독자적인 자신들의 종교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IS가 이들의 집단거주 지역을 점령하면서 이단이자 악마로 규정받고, 여성들의 성노예화 등 악랄한 박해를 받았다.

쿠르드족은 이라크, 이란, 터키, 시리아 등에 약 3000만~4000만이 산다고 한다. 이들은 이슬람교를 신봉하지만 ‘세속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이슬람 세속주의를 이해하는 가장 첩경은 여성의 사회참여로, 쿠르드족 여성들은 얼굴이나 신체를 가리는 히잡이나 부르카 등을 착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군대에서 남성과 같이 총을 들고 싸운다. 이슬람교라지만 민족주의 경향이 농후하고 야자디족처럼 전통신앙과 토착신의 요소들이 이들에 믿음에 가미됐다.

쿠르드족들은 IS와의 전쟁까지 몇 세대에 걸친 수십 년 동안 전쟁의 와중에 살아야만 했다. 여러 나라에 분산된 탓에 이라크, 이란, 터키 등은 틈만 나면 이질적인 이들을 탄압했고, 쿠르드족 무장세력에 대한 토벌의 전쟁을 벌였다. 이들의 현대사의 삶은 전쟁과 죽음뿐이었다. 쿠르드족들이 모여사는 이라크 북부의 최대도시 ‘모술’은 IS가 점령했다가 최근에야 이라크 정부군과 쿠르드 민병대에 의해 장기간의 치열한 격전끝에 탈환됐다.

<거북이도 날다>는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있기 직전이 배경이다. 1991년 1차 걸프전쟁 이후 이라크 북부는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 정부 대신에 그들로부터 화학무기 공격까지 당해 수천 명이 학살되는 등 모진 박해를 받았던 쿠르드족이 자치권을 행사했다. 그곳에는 이라크 쿠르드족들 뿐만 아니라 터키에서 쫓겨난 쿠르드 난민들도 몰려들어 대규모 난민 텐트촌을 형성하여 가난에 찌든 헐벗은 삶을 살고 있다. 수십년 간 계속되는 전쟁으로 생산 활동들은 만무했고, 원래 이라크에 살던 쿠르드족이나 터키에서 쫓겨난 난민들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먹고사는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하여 지천에 깔린 지뢰 제거작업에 나선다. UN이 비용을 들여 현지인을 고용한 지뢰 제거 작업을 엄청난 매설된 지뢰의 양을 소화 못하는 현지 용역은 UN에서 받은 처리비용의 1/10만 주고 다시 어린 아이들에게 위험천만한 작업을 맡긴다. 생활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 위해 아이들은 장비도 없이 오직 맨몸으로 목숨을 건 지뢰 제거작업에 뛰어든다. 그러나 아이들 중에는 작업 중 지뢰가 폭발하여 손과 발이 없는 아이들도 꽤나 된다. 목숨까지 잃은 아이들도 부지기수지만 생존문제 직면한 아이들은 스스로 지뢰작업을 자처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상황이다. 평화를 위하여 UN이 돈을 댔지만 아이들은 생명을 담보로 노동하는 기막힌 현실이 연출된다.

주인공은 이 어린 친구들이다. 16살쯤의 오빠 ‘헹고’와 13살쯤의 소녀 ‘아그린’, 두어 살 남짓한 남동생 ‘리가’는 형제들로 부모들은 터키 군이 마을을 폭격할 때 죽었다. 더구나 헹고는 지뢰를 제거하는 일을 하다 두 팔을 잃었지만 여전히 입만으로 지뢰작업을 하여 동생들을 힘겹게 부양한다. 그에게는 특출한 능력이 있어 앞을 내다보는 예지력이 있다. 헹고 나이쯤의 ‘위성’이란 별명의 특별한 친구도 있다. 위성은 손재주와 넉살이 좋아 위성안테나 설치를 전담하는 등 어른의 존재가 이런저런 이유로 부재한 공동체에 어른스럽게 마을 대소사를 처리해 나간다. 또한 위성은 어린 아이들의 대장 노릇을 하며 지뢰작업도 작업배분하고 지휘한다. 위성은 어여쁜 아그린에게 첫 눈에 반해 이 척박하고 살벌한 땅에 피어난 한 떨기 꽃처럼 살가운 연정을 품는다. 그러나 아그린은 그런 위성의 마음을 선뜻 받아주지 못한다.

세 형제들에게는 비밀이 있다. 아그린의 부모를 죽였던 터키 군들이 마을로 쳐들어와 이 어린 소녀를 강간해 버린 것이다. 아그린은 터키 군의 만행에 그만 임신을 했고, 리가를 출산하여 동생으로 가장했던 것이다.

열세 살 소녀가 어찌 그런 슬픔과 체념, 절망의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바흐만 고바디 감독은 사실성을 부각하기 위하여 아역 배우를 비롯한 모든 배우들을 현지 캐스팅했다. 아그린의 연기는 실제 이 소녀가 살아왔던 짧지만 험한 역정이 고스란히 배어있기에 가능했으리라. 13살 아그린에게는 감당해 낼 삶의 무게를 이미 넘어섰다. 누가 이 소녀에게 견디며 살아가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아그린은 자신의 의사, 의지하고 전혀 무관하게 왜곡된 세계가 만들어낸 동생이자 아들인 리가를 떼어버려 이 암담한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을 뿐이다.

나머지 손과 팔, 다리를 잃은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은 해맑다. 해맑기에 조그만 도발해도 총탄이 쏟아지는 잔인한 삶의 환경은 더욱 절망적으로 느껴진다. 미군이 쿠르드족을 학살하고 탄압한 사담 후세인 정권에 대해 침공하자 위성은 칠판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간이 학교에다 또래 무리를 이끌고 시장에서 사온 기관총을 설치한다. 위성은 배워야 한다는 선생님의 말을 단호히 거부한다. 총을 들고 싸워야 한다는 게 이 소년이 체득한 ‘살아감’, ‘살아남’의 생존방식인 것이다. 그러나 아그린은 자신을 바짝 엎드리고 고개를 움츠린 거북이라고 생각한다. 거북이는 날 수 없지만, 아그린은 훨훨 날고 싶은 욕망은 그저 먹먹하기만 하다.

영화는 이 가혹한 절망을 해결하지 않는다. 절망은 증폭됐고, 더욱 가중되어 지속될 뿐이다. 마침내 이라크를 침공한 미군이 이라크 북부 쿠르드 지역에 마치 해방군처럼 입성하는 날, 아그린의 오빠 헹고는 예언을 한다. ‘미군이 들어와 오랫동안 이상한 일들이 생길 거라고’...그 예언은 결국 맞아떨어졌다.

<거북이도 난다>는 ‘바흐만 고바디’의 또 다른 작품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2000)>과 더불어 사실주의와 부조리한 현실의 극한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본이래 더 이상 ‘절망’이라는 말을 쉽게 함부로 내뱉지 않게 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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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t's good and excellent :)

내용을 알고 보니 이 영화에 손이 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언제부턴가 아픈 내용을 굳이 감당하고 싶지 않더라구요. 이런 식으로 외면하고 살아가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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