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梁萬春), 혹은 양만춘(楊萬春)?” - 이름 없는 ‘무명(無名)’의 영웅...

in #kr-movie6 years ago

“안시성주(安市城主)? 양만춘(梁萬春), 혹은 양만춘(楊萬春)?”

  • 이름 없는 ‘무명(無名)’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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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성황리에의 수식이 따라 붙는 영화 <안시성>이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 별 관심이 없이 시큰둥하다. 이 작품들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되는가의 논란도 그다지 중요치 않다. 문제는 이들이 만들어진 배경의 문제일터이고, 그 배경이란 흥행성과 상업성을 목적으로 역사적 상황이나 사건을 단지 차용한 철저한 픽션이기 때문이다. 단지 즐기고 소비되면 그만이지 그것이 사실일 것이라고, 진실이라는 것이라고 우기는 아둔함만 없다면 별 문제될 이유는 없다. 더 정확히는 그 역사 내러티브가 과연 타당하고 정당한 것인가의 여부일 뿐이다.

현재까지 450만이 넘게 봤다는 영화 <안시성> 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오로지 주인공인 ‘양만춘’에게 공식 역사서사에의 이름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당대 동북아 패권을 가늠하는 일전이었던 645년의 ‘안시성(安市城) 전투’였건만, 전투 주역의 이름이 부재하다는 건 요상한 일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나 당나라의 공식 역사서들인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에도 싸움의 전개과정은 소상히 기술하고 있건만 ‘당태종’ ‘이세민’에 맞선 고구려의 장수 이름은 그저 ‘안시성주(安市城主)’로 나와 있을 뿐이다. 후세인들이 모든 동북아 역사를 통틀어 ‘정관의 치(貞觀之治)’이라고 부를 정도로 칭송했던 부국강병의 상징으로 번영기를 구가했던 당태종이었다. 그런 그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겼던 고구려 장수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다는 건 솔직히 아이러니다.

패배를 안겨준 당사자이기에 최종 승자였던 그들의 치욕의 주역을 지울 수도 있었겠지만 패배 기록은 남겨놓고 해당 성주를 고의로 누락했다는 건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리고 중국의 정사(正史)들이 그렇게 쪼잔하지도 않고 나름 철두철미한 구석이 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이 안시성주의 이름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안타까워했으니 입맛에 맞게 사료를 편찬했던 김부식이라도 원래 쏘스가 애초 없었던 모양이다.

안시성주의 이름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야 ‘카더라 통신’으로 이름을 갖게 됐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에 왔던 명나라 장수에 안시성주는 ‘양만춘(梁萬春/楊萬春)’이라고 했고, 이를 들은 ‘윤근수’가 기록한 걸 몇 십 년 후에 ‘송준길’이 다시 기록했다. 당시 명 장수가 출처를 인용했던 사서들은 전해지지 않은 책들이고, 애초 있었는지도 불확실하다. 그러던 차에 근대계몽기에는 다양한 역사 서사물들이 출현했다. 계몽운동의 하나의 방략으로 이념, 즉 민족주의가 투영된 <이순신전>, <을지문덕전>같은 전(傳)이나 야담(野談)등이 신문, 잡지에 게재되었고 <양만춘전>도 그 중 하나였다. 그리고 한말의 관료이자 역사학자였던 ‘현채(玄采)’가 1909년에 지은 오늘날 국정교과서격인 ‘신찬초등소학(新纂初等小學)’ ‘양만춘’의 이름이 실리기도 했다. 윤근수에서 비롯된 불확실한 정보와 지식이 수백 년을 거치면서 공식화되는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안시성주, 편의상 ‘양만춘’은 왜 본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이유는 애초부터 여러 상황과 조건 때문에 이름을 쓸 수 없는 존재가 아니었을까. 이름도 기억될 수 없는 상황이란 그가 이주민계열의 장수일수 있다는 이야기다. 남북조시대에 북조의 선비족 북위정권은 나중에 수나라 ‘문제’가 되는 한족 양견에 의해 권력을 탈취 당한다. 선비족들은 그래서 대거 고구려에 귀순했다는 설이 있다. 그들 무리중 하나가 ‘울지씨(尉遲氏)’들인데 울지가 ‘을지(乙支)’가 되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은 그들의 일족이었다는 주장이다. 을지문덕이나 안시성주나 아무리 사료가 빈약하기짝이 없는 고대사라고 할지라도 출신이나 배경에 대해 알려진바 없이 전란의 와중에 갑자기 돌출하여, 그것도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이들 존재에 대한 당연한 의문이기도 했다.

반론도 만만치 않지만 충분히 개연성은 있다. 북조의 선비족 왕조들과 관계는 우호적이었으며 인적, 물적 교류도 빈번했으리라 생각된다. 이들은 그들을 축출한 중국의 수당으로 이어지는 한족 중심의 통일왕조에 상당히 적대적이었을 것이다. 가령 시대가 좀 앞서지만 ‘고운(高雲)’이라는 인물은 고구려계로 추정되며 ‘후연(後燕)’의 실력자였다가 왕위까지 오른 인물이다. 또한 북위(北魏)의 침략으로 후연을 이었던 북연이 망하게 되자, 당시 고구려의 ‘장수왕’은 북연 왕 ‘풍홍(馮弘)’을 구원했다. 장수왕은 장군 ‘갈로맹광(葛盧孟光)으로 하여금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북연의 수도인 용성(龍城)의 주민들과 지배층을 호위해 고구려로 데리고 나오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그 시대의 집단망명이나 이주는 특별하고 색다른 모습만은 아닌듯 싶다.

양만춘이 선비족 또는 아니면 또 다른 민족 출신이 가능성은 분명히 있다. 고구려가 다양한 민족들과 교류했고, 광범위한 혼종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점은 사료자체가 절대 부족한 고대의 동북아 역사에서 상식적으로 설명 가능한 추정이다. 또한 이 안시성계는 642년 ‘영류왕(榮留王)’을 무참히 살해하고 쿠데타로 집권한 ‘연개소문(淵蓋蘇文)’ 세력과 반목했다. 반목했다는 것만으로 양만춘이 선비족이나 이민족 계통이라는 근거는 될 수 없으나 기록이 전혀 없으니 추론의 타당성으로 헤아릴 수밖에 없다. 안시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한 선비족 등의 이주민 계열로 영류왕을 지지하고 연개소문을 반대하며, 당의 패권주의도 반대했던 것이 양만춘이 자신의 진정한 이름을 남기지 못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이름이라는 문제가 결정적인 문제가 아닌 이상은 양만춘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중요한 건 당시 동북아시아 정세와 요동지역이 차지하는 정치적, 경제적 위상일 수 있다. 중국에서 통일정권이 출현한 후 수와 당에 걸쳐 거의 70년 동안 집요하게 고구려를 침공했다. 타협가능성은 애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중국 패권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치고는 수와 당의 입장에서도 원정 실패에 따른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결국 원정 실패가 수나라 정권이 몰락하는 하나의 이유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렇게 끈질긴 원정을 왜 감행했을까. 5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당대의 시공간에 요동이 갖는 정치적, 경제적 위치와 역할, 의미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당대의 요동은 동으로는 중국의 농경 정착세력, 서로는 말갈이나 숙신 등의 반농반목의 내륙세력, 남으로는 백제나 왜와 같은 해양세력, 북으로는 돌궐, 철륵, 설연타, 거란 등 유목민 세력이 교차하는 최대의 지리적 요충지이자 온갖 다양한 민족의 이동과 물산이 집결하고 교역이 이루어지는 중계무역의 최대 허브라는 것이다. 그것을 관장하는 고구려는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취했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각 거점마다 거대한 고구려성들을 쌓은 천리장성이라는 것도 그래서 축조했을 것이다.

사실 ‘광개토왕’ 이후 고구려에 관계된 각종 기록에는 오늘날 황해도와 평양을 중심으로 한 평안도, 만주의 요동에 대한 기사만 빈번할 뿐 그 이전보다 고구려의 영역이라는 여타지역 동만주나 북만주, 옥저나 동예의 땅인 함경도 지역의 기사는 훨씬 줄어든다. 그건 고구려 세력 중심이 평양-요동 벨트에 치중되었음의 반영일 수 있다. 6세기 신라의 진흥왕은 세력 확장으로 점령한 뒤 영역의 징표로 세운 함경남도의 황초령, 마운령에 순수비를 세웠다. 신라가 강성해진 건 맞지만 옛 옥저, 동예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관심이 멀어진 관계로 무주공산에 무혈 입성했다는 가능성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중화팽창주의, 패권주의의 동북아 질서의 구축은 고구려가 독점하는 막대한 이익의 요동 중계무역의 탈취가 기본 목표였을 것이다. 당시 고구려 인구는 멸망 당시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약 69만호다. 어림잡아 300만에서 350만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그 정도의 인구를 먹여 살리려면 어느 정도의 생산력이 필요할까. 더구나 추운지역으로 농업생산 활동이 어려울 한반도 북부와 만주에 걸친 고구려의 토지생산력은 빈약했을 게 자명하다. 그 부족분 내지 그 이상을 중계무역을 통해 획득하여 국가로서의 존립기반을 유지하지 않았을까. 신라가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한강유역, 옛 옥저와 동예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상실했어도 고구려는 그렇게 타격을 받은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요동의 경제력은 어느 정도 수준이었을까. 역시나 확인할 길은 없다. 다만 당태종의 원정군이 고구려의 요동 핵심거점인 ‘요동성(遼東城)’을 공략에 성공했을 때 포로로 잡힌 병력수가 약 1만 명, 남녀민수가 4만 명, 비축되어 있던 식량이 무려 50만 석이라고 한다. 도량 단위가 오늘날과 비교해서 어느 수준인지 알 수가 없고, 액면 그대로 그 숫자규모를 받아들이긴 어렵지만 요동성의 경제규모가 상당했었음이 짐작 가능하다. 토지생산력이 빈약한 고구려에서 이 50만석의 어마어마한 식량들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역시 신빙성이 그다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당시 안시성 인구는 10만에 달했다고 한다. 그 수치를 곧이 곧대로 인정하지 않더라도 고대 성곽도시로서는 요동성 다음으로 꽤 번창한 도시였을 것이다. 또한 당태종의 20만 병력에 완전히 포위된 채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지원군조차 궤멸되었어도 90일 이상을 버텼다. 더구나 철수하는 당나라 군대에 카운터어택의 추격전까지 벌였다. 자체 병력이나 비축한 식량 등 물자가 그만큼 충분했다는 반증이 아닐까.
최북단의 ‘부여성(扶餘城)’으로부터 남쪽 요동반도의 끝에 있는 고구려의 수군기지가 있었을 ‘비사성(卑沙城)’까지 고구려가 선의 개념이 아니라 거점 중심의 천리장성을 건설한 것은 단지 방어용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오래전의 일이지만 이 일대로 답사를 간 적이 있다. 가장 중심인 요동성은 오늘날 요령시(遼陽市) 내부에 존재하여 오랜 세월의 부침 속에 흔적을 도저히 찾을 수 없다. 규모가 요동성보다는 작았다는 근처의 ‘백암성(白巖城)’은 규모의 흔적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요동성보다 규모가 작았다고 하나 웅장한 석성의 면모를 자랑한다. 요동성이나 백암성이나 요동에 건설된 다른 고구려성들의 상당수는 산성이 아닌 평지성들이다.

이런 거대석성을 쌓을 수 있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사람과 물자를 동원할 수 있는 경제력이 수반되지 않았다면 설명이 불가능하다. 평지에 거대한 성을 쌓고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이 거주했다는 건 단지 방어목적뿐만 아니라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안시성은 오늘날 ‘영성자성(英城子城)’으로 추정되는 성으로 잔해와 영성자성임을 알리는 팻말들만 남아있다. 안시성은 평지와 산악지대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 성을 지나야 고구려의 중심지인 ‘국내성’이나 ‘평양성’을 갈 수 있는 길목이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안시성은 자연적으로 험준한 요새였으며 주변에 무기와 각종 생활용품들의 주원료인 철광석 산지와 곡창지대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노천철광이 있어 오늘날까지 그 채굴이 이어져 한때 중국의 심장이라는 동북공업지대의 자원의 핵심 공급지였다.

안시성에서 10만의 인구가 복작대며 살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얼핏 든다. 안시성의 ‘安市’는 만인이 만나는 시장을 의미하지 않는가. 안시성의 이런 동력은 668년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 부흥운동’의 중심지로 생명을 면면히 이어나갔다.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에 의해 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안시성이 함락된 건 671년의 일이었다. 과연 안시성민들은 이미 망해버린 고구려 왕조에 충성하기 위해서 줄기차게 저항했을까. 그들이 이룩한 자립적 삶과 생활의 장을 사수하려는 고단하고 치열한 애착의 육중한 반영이 아니었을까.
1400년 전에 존재했던 고구려를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단일한 한민족의 역사’의 이해하는 건 영화 <안시성>이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이 역사적 ‘사실’이나 ‘진실’로 여기는 것보다 더 위험하고 아둔하다. 역사 속의 인간들은 때로는 역동적으로 때로는 정적이지만 부단히 움직이며 서로 다른 문화 정체성의 집단들과 교류하거나 투쟁하면서 혼합된 새로운 정체성들을 만들어 나간다. 1400년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유지되어왔다는 발상은 속좁은 환상에 불과하며 패쇄적인 사고관과 세계관은 무수한 배제와 박탈의 폭력으로 기능한다.

고구려사는 한국사나, 중국사에 소속된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지역사’, ‘변경사’로 접근하고 파악해야한다는 주장에 적극 동의한다. 안시성 전투가 벌어졌던 요동이라는 지역은 농경문화, 유목문화, 남방문화, 북방문화 등이 ‘혼합’되고 ‘다양성’이 결집되면서 독특한 자기정체성을 구축하고 실현하는 공간이었다. 이 점이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안시성주’의 정체성이며 새로운 질적 세계의 재구성 속에서 더 나은 삶의 방향으로의 확장을 도모했을 것이다.

편협하고 협소한 일국사의 관점과 감성으로 그 역동적 면모를 가둘 수는 없다. 고구려-당의 전쟁의 와중에 스스로 기록을 남기지 못했던 당시 몽골고원의 강자라는 투르크계 민족인 ‘철륵(鐵勒)’이나 그 부족중 하나로 당나라의 뒤통수를 때로 철군에 이르게 했던 ‘설연타(薛延陀)’를 누가 기억을 할까. 그들도 당대의 엄연한 주인공들이었는데 말이다.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동아시아의 모든 국가들과 민족들에게 각각 고구려에 관한 지분은 존재한다. 그것이 ‘고구려性'이고 ‘고구려史’다.

그러나 한국 역사학계의 한국사, 동양사, 서양사라는 분업적 구조와 주류 한국사의 배타적 헤게모니 속에서 그런 풍부한 양상과 면목들을 과연 확인할 수 있을까. 개인적 바람으로는 지식과 학문의 총체성과 철저한 ‘인문주의’의 관점과 접근이 요구하지만 현실은 난망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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