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의 승리

in #kr-movie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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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지의 승리’ ”

영화역사상 가장 논란의 되었던 인물과 작품을 단 하나만 단연 꼽으라면 ‘레니 리펜슈탈(1902~2003)
’과 그녀의 기념비적인 다큐멘터리 <의지의 승리(1934)>일 것이다.

<의지의 승리>는 1934년 히틀러의 나치당의 ‘1934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기록한 작품이다. 나치당은 1927년부터 뉘른베르크에서 전당대회 개최했다. 히틀러가 집권에 성공한 1933년부터 레니 리펜슈탈에 <신념의 승리(1933)>, <의지의 승리(1934)>, <뉘른베르크 1935(1935)>, <뉘른베르크 축제(1937)> 등을 차례로 제작했으나 단연 백미는 <의지의 승리>다. <의지의 승리>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기록물인 1부 <민족의 제전>과 2부 <미의 제전>으로 이루어진 사상 최초의 올림픽 기록영화 <올림피아(1938)>와 더불어 영화역사에서 촬영과 표현기법의 ‘혁명’을 이룬 작품들로 평가된다. 문제는 히틀러와 나치독일의 미화와 찬양에 동원되었다는 것이다.

1934년은 히틀러와 나치당에게는 권력을 완전히 장악한 중요한 의미의 해였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히틀러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밀려 30% 득표로 낙선했지만 히틀러와 나치당의 비약적인 영향력 확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결국 나치당은 제1당이 되었고, 히틀러는 1933년 1월 총리가 되었다. 그는 즉각 의회를 해산하고, 반대당을 탄압하며 나치당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수밖에 없는 총선을 실시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이른바 ‘전권위임법’을 통과시켜 그와 나치당에게 권력을 되도록 만들며 독재체제를 수립한다.

1934년 6월에는 나치의 2인자이자, 히틀러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나치돌격대’ 대장 ‘에른스트 룀’을 제거한다. 나치돌격대(SA)는 나치 산하의 군사조직이었지만 나치당 조직과 위협할 만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즉각 ‘총통’에 취임함으로써 그의 권력체제를 드디어 완성한다.

1934년 9월 4일부터 나흘동안 나치 전당대회를 뉘른베르크에서 개최하고 대대적으로 선전함으로써 히틀러 권력의 완성을 대내외에 선포했다. 뉘른베르크에서는 1927년부터 나치 전당대회가 매년 열렸다. 그 이유는 뉘른베르크가 허명뿐이었지만 ‘신성로마제국’시대의 각 지역 선제후들이 모여 ‘제국의회’를 열었던 상징적인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독일 국토의 중앙부에 위치하여 각지의 사람들이 몰려들기가 용이했다.

1902년생인 레니 리펜슈탈은 처음에는 무용수로 활동했다. 그러나 불의의 부상으로 무용수 생활을 접고 영화감독 ‘아르놀트 팡크’에 의해 발탁되어 영화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팡크는 스튜디오 촬영을 배격하고 ‘자연’을 비롯한 직접적인 야외촬영에 의미를 뒀던 감독이었으며, 극영화보다는 기록영화에서 각광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팡크에게 촬영기법 등을 전수받은 리펜슈탈은 독립적으로 영화사를 차려 활동했지만 아직 무명에 불과했다.
1932년 히틀러의 연설에 감동받은 그녀는 히틀러에게 직접 편지를 보냈다. 이때 대중을 향한 선전물이 필요했던 히틀러와의 조우가 그녀의 인생을 바꿔 놨다. 권력욕망의 히틀러와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얻고자 했던 리펜슈탈의 욕망이 결합한 것이다. 물론 리펜슈탈에게 탁월한 재능이 있음을 히틀러는 간파했음 간과할 수는 없다. 히틀러가 프로파간다로서의 영화의 힘을 무한 신뢰했던 궁극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히틀러의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 속에서 히틀러의 연인이었다는 설까지 들으며 리펜슈탈은 그녀의 재능을 만개했다. 그녀는 30대의 카메라와 120명의 기술자를 거느리고 음흉하고도 웅장한 규모로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영상을 통해 지금까지도 가장 막강한 프로파간다 영화로 평가 받은 악명 높은 대작을 만들어 낸 것이다.

‘선전, 선동의 귀재’라는 히틀러의 문화, 선전을 총괄했던 괴벨스는 리펜슈탈과 사사건건 충돌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괴벨스는 “〈의지의 승리〉는 이전에는 제시되지 않았던 권력을 최초로 보여줌으로써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고, 대서사의 힘 있는 리듬을 뛰어나게 예술적인 것으로 표현했다”고 극찬했다.
그 동기가 어찌되었든 <의지의 승리>가 준 엄청난 충격과 파장은 부정할 수 없다. 이 영화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장대한 스펙터클이며, 통속적인 동시에 신화적이고, 기술적인 확신으로 빚어낸 어마어마한 성취였다. 리펜슈탈은 역사상 어떤 감독도 그러지 못했던 최고의 지원을 받았다. 뉘른베르크는 마치 정교한 장치를 가득 채워 넣은 거대한 스튜디오로 변신하여 세심하게 준비되었다. 그녀는 도시 중심부에 새 교각과 진입로를 건설하고 조명탑과 카메라 트랙을 설치하도록 주문했고 모든 것이 정확히 그녀가 요구한 대로 만들어졌다.

6개월 동안의 편집 작업을 거쳐 꼼꼼하게 골라낸 두 시간 분량—전체 촬영분량의 약 3퍼센트—의 이 다큐멘터리는 히틀러가 비행기를 타고 도착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인류역사상 최악의 악몽이었던 히틀러의 등극식이 완성됐다. 이 뉘른베르크 보고서는 나치 국가의 힘을 칭송하고 독일인의 생각과 감정에 대한 통제력을 한층 확고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2차세계대전후 전범재판에 회부됐지만 그녀는 무죄로 풀려났지만 여론의 시선은 늘 싸늘했다. 2003년 101세의 천수를 누리는 최후까지도 예술가로서의 본분에 충실하다 보니 실수를 했을 뿐이라는 레니 리펜슈탈의 주장은 그저 옹색할 뿐이다. 그러나 ‘욕망’이 없는 예술이 가능한가의 의문에 직면하기도 한다. 윤리와 도덕을 따지면 언제 예술을 하며 윤리와 도덕의 전복이 또 다른 예술의 가치이기도 하다. 그 방향이 문제였지만 당대의 리펜슈탈이 그 참혹한 전개와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을까. <의지의 승리>에서 히틀러에 열광하는 남녀노소 수십만의 광기는 어떤 죄책감을 가질 수 없는 보통사람들의 일상적 파시즘이 갖는 무시무시함이다. 과연 리펜슈탈은 그곳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나치즘은 현대적 야만의 징후(아도르노)일 뿐만 아니라, 정치의 미학화(벤야민)를 통한 대중 선동을 꾀한 대표적인 사례이기에 리펜슈탈은 괴벨스와 더불어 정치의 미학화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레니 리펜슈탈의 삶을 돌아보면 개인적 욕망을 위해 악마와 거래한 파우스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녀는 세계 역사상 가장 악랄하다고 여겨지는 히틀러의 나치 정권을 위해 일했고, 그 대가로 역시나 세계 역사상 가장 뛰어나다고 여겨지는 두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다. 레니의 삶은 예술가의 정치 참여, 사회적 의무, 양심의 문제 등에 관해서 수많은 논란의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리펜슈탈의 예술성에 방점을 찍었던 ‘오드리 설킬드’는 리펜스탈의 평전인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의 뛰어난 예술적 기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비평가들은 영화 자체보다 파시즘에 매혹되었다고 생각될까봐, 이 영화에 대한 찬사를 오랫동안 억눌러왔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말했듯이 ‘지성을 겸비하지 못한 감성은 미개하고, 감성을 겸비하지 못한 지성은 야만적이다’
그렇다면 리펜슈탈은 야만적인가, 또는 미개한가.
혹은 시대를 잘못 만난 예술가의 비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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