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라비아의 로렌스’ ”

in #kr-movie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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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착각과 오해의 영웅서사 - ‘아라비아의 로렌스’에는 ‘사우디아라비아’는 없다.

한 장의 사진이 있다. ‘데이비드 린’ 감독이 1962년에 연출한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두 주역이었던 ‘피터 오툴’이 역할을 맡았던 ‘로렌스’와(원 안의 인물) ‘알렉 기네스’가 역할을 맡았던 ‘파이살 왕자’의 실제 모습들이다. 1918년 10월 오스만 제국에 지배에 대항하던 아랍저항군이 이집트에서 출발한 영국원정군과 합동작전으로 오스만 제국 통치의 핵심 도시였던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를 함락한 직후에 제1차 세계대전 전후처리를 위한 ‘파리 강화회의’가 열린 프랑스 베르사유 궁에서 찍은 사진으로 생각된다.

실제의 파이잘 왕자는 영화에서 나온 파이잘 왕자와 얼추 비슷한 모습이다. 아니 더 섬세하고 고결한 선한 느낌이다. 그러나 실제의 로렌스는 실망스럽다. 영화에서는 대단히 키가 컸던 피터 오툴이었다. 그리고 연약해보이지만 날카롭고 강인한 의지의 소유자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실제의 로렌스는 한눈에도 단구임을 알 수 있다. 지적으로 보이긴 하지만 두리뭉실하고 의지하고는 담을 쌓은 사람처럼 약간은 나사가 빠진 느낌이다. 외모로 어찌 사람을 판단하랴. 또한 키 작은 단구의 사람들을 모욕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이미지와 실제의 모습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영웅서사’의 근본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역사 소재의 영화들은 당혹스러울 때 많다. 사실과 영화적 상상력간의 긴장관계 때문이다. 사실이라고 전적으로 ‘진실’이 될 수 없으며, 사실을 넘어선 영화의 극적 상상력은 허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경계는 분명치 않다. 상상력은 단지 사실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에 대한 행간의 ‘재구성’과 미처 채워놓을 수 없었던 여백을 채워놓는 ‘창조’이기 때문이다. 재구성과 창조는 한편으로의 ‘왜곡’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에서 펼쳐진 극적 상상력을 정말 있었던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영화적 상상력이나, 문학적 상상력이나 스토리텔링에 간여한 가치관, 즉 이데올로기의 타당성이나 정당성을 살펴야 한다. 관객의 판단력과 분별력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도 사실과 영화적 상상력간의 충돌, 해석과 창조의 괴리, 그리고 관철되는 이데올로기를 여실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3시간 47분의 대작이다. 오죽하면 오늘날 두 시간 이내의 영화들이 대부분인 요즘에는 생경한 중간에 intermission이라는 휴식시간이 있었을까. 70mm 필름의 대화면에 무한히 펼쳐질 것 같은 황홀경의 사막의 풍경은 일순 압도한다. 아랍민족의 모래폭풍을 일으키며 질주하는 낙타부대와 기마부대가 연출하는 어마어마한 전투는 역동적인 움직임에 휘둥그러진 눈을 감히 깜박이지도 못하고 숨이 멎을 지경이다. 웅장한 스케일에 이 모든 장면들이 오로지 하나하나 사람들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점은 놀랍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떡칠하는 오늘날 영화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들다. 아날로그를 고집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나 좀 다를까. 다시는 인간의 집단 군무의 아름다움은 쉽게 접하지 못할 희열임은 분명하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아주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 대여섯 번은 본 것 같다. 그런데 나이에 따라 볼 때마다 당연한 것인지, 이상한 것인 감흥의 강도가 달라진다. 온통 신비한 아라비아의 풍경과 ‘영웅’의 대서사는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원초적 촉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성의 명목으로 분석이라는 게 작용한다. 달나라에 토끼가 방아 찧는 신화에 아늑함인가, 분석도구를 들이미는 이성의 불안함 중 무엇이 좋은지는 취사선택의 문제일 뿐 솔직히 단언할 수 없다. 다만 잘못된 신화는 깨져야 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신화를 만든 자들은 세계를 지배하고, 약자를 지배하려는 불온한 자들이다.

주인공인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1888~1935)’
는 실제로 특이한 인물임은 분명하다. 특이하다는 건 ‘비정상적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의미다. ‘정상적인’ 주류사회에서는 돌발변수다. 문제는 정상적 주류사회과 비정상적 돌연변이를 어떻게 받아 들이냐의 문제가 그 사회의 안정성의 척도를 반영한다. 사색가이자 몽상가라고 해야 하나. 그는 어렸을 때부터 생각에 빠져있었고, 남들이 관심이 갖지 않는 주변 유적들에서 시간을 보냈다. 또한 사색과 몽상의 교차와 느낌을 얻는 탐사의 경험을 글로 담았고 탁월한 문장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그의 비정상성이 아라비아에서의 성공의 중요한 요소였음을 은근히 끊임없이 주입한다.

그는 옥스퍼드를 졸업할 무렵 그렇게 세계 4대 문명 발생지 중에 하나인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수천 년 유적지들을 답사한다. 오늘날 이라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20세기 들어 그렇게도 강고하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은 더욱 쇠락해 가고 있었다. ‘청년 투르크 당’이라는 소장 장교들을 중심으로 한 신진세력이 ‘술탄’이 지배하는 제국을 쇄신하겠다고 나섰지만 무너져 가는 제국의 쇠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지배의 균열에 정정불안은 계속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핵심 통치 지역인 그 찬란했던 영욕의 메소포타미아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생명조차 위협할 수 있는 치안부재의 메소포타미아 유적 답사를 강행한 로렌스가 느꼈을 감격과 감동은 새로운 신세계로 인도하는 천사의 영접이었을 것이다. 그는 오리엔트 세계를 탐문하는 역사학자였고, 지리학자이자 지정학자의 길을 걸었다.

그러던 그가 전쟁에 휘말렸다.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오스만 제국은 영국의 적인 독일의 추축국 편에 서고 말았다. 오랜 숙적이었던 러시아가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국 편에 있었던 것도 이유였고,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의 오랜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로렌스도 입대하였다. 대졸자 대접으로 중위로 임관하여 육군정보부로 부임했다. 그의 임무는 이집트와 오늘날 이스라엘 중간의 ‘시나이 반도’의 황무지와 사막의 지도를 그리는 작업이었다. 일개 서생이자 학자에 불과했던 그가 전쟁과 전투에서 놀라운 지도력을 발휘하며 탁월한 전술, 전략을 펼쳤다는 건 애초 불가능한 판타지였다. 그 가당치 않은 판타지가 필요했던 건 전쟁에서 영웅이 절실했던 영국 제국주의의 책략과 전쟁 여론을 선도할 언론이었다.

아랍세계의 역사와 문화에, 그리고 지정학까지 정통하다는 이유로 로렌스는 1916년 아라비아 지역으로 파견된다는 내용은 영화와 거의 똑같다. 그러나 ‘지정학(地政學)’이라는 학문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순한 지리학이 아니라 해당 지역의 정치와 문화, 사회, 경제 등을 포괄하는 학문으로 모든 정보가 망라된다. 타 국가를 침략을 위해선 가장 선결되어야 정보였다. 특히 제국주의 시대에 그 역할과 의미가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광개토대왕비’도 그렇다. 1880년경에 만주 집안의 한 농부가 토지를 개간하다가 이를 찾아 낸 것인데, 이후 1883년에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사코 가게아키(酒勾景信)’ 대위가 묵본(墨本)을 입수해 귀국하면서 학계의 논쟁이 시작되었다. 사코 대위는 왜 만주를 떠돌고 있었을까. 일본의 만주진출이 본격화된 것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였다. 본격적인 침략에 선행된 지정학적인 정보수집 차원의 사전정지작업이었던 것이다. 나치독일과 히틀러의 핵심 이론가로 나치독일의 침략의 정당성을 제공했던 ‘카를 하우스호퍼’도 지정학자였다.

영화에 묘사되는 로렌스의 아랍세계에 대한 애정과 아랍의 독립은 부차적이었다. 그의 목표는 영국, 즉 제국주의 이익관철이 일차적이었고, 제국주의 첨병 노릇이었으며, 그는 그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그리고 그가 아랍저항군과 함께 활동했던 기간은 영화에서는 오랜 시간처럼 느껴지지만 불과 2년뿐이었다. 1918년의 다마스쿠스 점령으로 그의 역할은 끝났던 것이다. 1916년에 고작 중위에 불과했던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그때는 대령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그는 분명 ‘영웅’이었지만 영국 제국주의의 영웅이었으며, 필요에 의해 언론에 의해 ‘창조’된 영웅이었다.

탁월한 문장가였다는 로렌스는 우리나라에서도 완역된 <지혜의 일곱 기둥>이라는 자서전을 남겼고, 또한 우리나라를 비롯한 수많은 어린이들이 그에 대한 영웅담과 위인전을 읽었다. 타자를 자기중심으로 규정하는 소위 ‘오리엔탈리즘’은 그렇게 강화됐고, 그 중심에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있었다. 영화 속에서 수많은 죽음들을 목도하며 끊임없이 ‘인간적’으로 고뇌하는 로렌스의 모습은 영웅서사에서 늘 빠지지 않는 전형적인 극적 장치다.
그렇다면 실제나 영화에서의 로렌스의 명분이었던 오스만 제국의 압제로부터 아랍세계의 자유와 독립이 쟁취되었을까.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는 로렌스의 힘으로 다마스쿠스를 점령한 아랍저항군이 서로간의 반목과 분열로 독립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것처럼 묘사된다. 또한 흔히 범하는 착각과 오류는 ‘알렉 기네스’ 맡았던 파이잘 왕자를 비롯하여 그의 측근들이었던 ‘오마 샤리프’가 맡았던 ‘알리 족장’이나 ‘안소니 퀸’이 맡았던 ‘아우다 아부 타이 족장’ 등 아랍인들이 오늘날의 아랍의 맹주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 주역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나오는 아랍인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하고는 전혀 무관하다.
이것은 역사적 과정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연합국인 영국과 프랑스는 1916년 이른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어 전후 오스만 제국을 분할통치할 계획을 이미 수립하고 있었다. 또 다른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러시아에게는 이스탄불을 비롯한 오늘날 터키 땅을 주고, 영국은 아라비아 반도와 페르시아, 이라크, 현재는 이스라엘 영토인 팔레스타인 지역을, 프랑스는 레바논과 시리아를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제국주의는 아무것도 아랍인들에게 보장해 주지 않았다. 영국은 유대자본의 지지와 지원을 끌어내기 위한 ‘벨포어 선언’을 통해 ‘시오니즘 운동’을 점화시켜 본격적으로 영국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결국 이 계획에 따라 영국군과 아랍저항군이 점령한 시리아에 프랑스군이 진주한 건 1920년 4월 파이잘 왕자를 국왕으로 한 ‘시리아 왕국’이 선포된 뒤였다. 그러나 진주해있던 영국군이 팔레스타인으로 철수하자 불과 3개월 만에 새로 진주한 프랑스군의 공격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영국은 1921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영국 보호령의 ‘이라크 왕국’을 만들고, 그를 허수아비 왕으로 앉힌다. 1932년 이라크 왕국은 영국의 승인 아래 정식 독립국이 되지만 파이잘 왕은 1933년 스위스에서 갑자기 사망한다.

이라크 왕국은 1958년까지 존속했다. 파이잘 왕의 손자였던 ‘파이잘 2세’가 통치하다가 1958년 왕정을 타도하는 군부 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 과정에서 파이잘 2세를 비롯한 왕가 일족이 몰살당했다. 그 후 이라크는 공화국이 되었지만, 권력투쟁과 부침 끝에 1979년 ‘사담 후세인’이 집권하게 된다.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에서의 파이잘 왕자는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실제도 새로운 점령지에서 ‘입헌군주제’를 표방하는 등 서구화된 인물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의 야욕과 영국에 대해 오판하고 있었다. 1919년 1월에 파이잘과 유대인 지도자인 ‘하임 바이츠만’과 아랍-유대 협력을 위해 ‘파이잘-바이츠만 합의’에 서명했다. 이 때 파이살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정착을 지지하는 영국의 약속인 ‘벨포어 선언’을 수용한 것이다. 파이잘에 입장에서는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인 이주가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따라 시리아에서의 지배권을 확보한 프랑스를 견제해 줄 것이라 믿었지만 그의 오판이었을 뿐이다.

20세기 초중반의 아랍세계는 ‘하심’ 가문과 ‘알 사우드’ 가문의 양대 유력 가문을 중심으로 펼쳐졌다. 오스만 제국 술탄에 의해 임명된 당시 이슬람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관할하는 이른바 총독격인 ‘샤리프’는 ‘하심’ 가문의 ‘후세인 빈 알리’였다. ‘고귀한 혈통’이라는 의미의 ‘샤리프’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자손들로 넓은 이슬람 세계 각 지역의 정치와 종교의 지배자들이었다. ‘후세인 빈 알리’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탈피하기 위하여 영국의 지원을 받아 독립전쟁에 돌입했다.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인 ‘알리 빈 후세인’과 둘째 아들 ‘압둘라’, 그리고 셋째가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나오는 ‘파이잘’이었다.

막내아들인 파이잘은 영국에 의해 이라크 왕국의 왕이 되었다면, 둘째 아들 압둘라는 1921년부터 영국의 보호국이 된 ‘요르단’의 국왕으로 취임한다. 요르단은 1946년 완전 독립한다. 이 시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이스라엘의 독립문제가 아랍세계의 치열한 쟁점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다른 아랍지도자들과 달리 유일하게 그는 이스라엘의 독립에 호의적이었으며, 아랍세계에 의해 거부되었던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국가와 아랍국가의 분리 건국에 찬성하기도 했다. 친서방적으로 아랍의 맹주가 되고자했던 1951년에 팔레스타인 청년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암살된다. 오늘날 이스라엘 건국에 압둘라와 파이잘 형제가 직간접적으로 커다란 역할과 공헌을 한 셈이다.

장남인 알리 빈 후세인은 메카에 남아 아버지 ‘후세인 빈 알리’를 계승하여 메카와 메디나 등 아라비아 반도의 주요 도시를 포괄하는 ‘헤자즈 왕국’을 통치했다. 바로 이때 등장하는 것이 ‘알 사우드’ 가문이다. 알 사우드 가문은 당시 ‘리야드’를 중심으로 한 ‘네지드 왕국’에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18세기 말에 이슬람의 세속화에 반대하는 이슬람 사상가 ‘와하브’가 출현하여 이른바 이슬람 원리주의인 ‘와하비즘’을 제창한다. 와하비즘은 이슬람 창시자인 ‘무함마드’만을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알 사우드’ 가문의 완전한 통치를 인정하는 대신에 신에 대한 전적인 권한을 행사하는 일종의 거래의 합의 속에 성립됐다. 그래서 ‘와하브 왕국’이 만들어졌으며 19세기 초반 와하브 왕국은 오스만 제국의 바그다드를 함락하는 등 위세를 떨친다. 그러나 와하브 왕국은 오스만 제국의 대대적인 토벌에 가문의 핵심인물들이 이스탄불에서 처형당하고 잔존 세력은 변경으로 쫓겨나가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들이 다시 세력을 결집하기 시작한 것은 ‘이븐 사우드’를 중심으로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오늘날 쿠웨이트 지역으로 쫓겨나 있던 알 사우드 가문은 1902년 오스만 제국의 지지를 받는 오랜 숙적인 ‘라쉬드 가문’으로부터 리야드를 점령한다. 아라비아 반도 동쪽의 리야드를 거점으로 네자드 왕국을 만들었던 이븐 사우드 역시 오스만 제국을 축출하기 위해 영국의 지원을 받았다. 하심 가문에 로렌스가 있었다면 알 사우드 가문에는 유명한 작가와 동명이인인 ‘윌리엄 셰익스피어 대위’라는 인물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1915년 셰익스피어 대위가 라쉬드 가문과의 전투 중에 전사함으로서 영국과의 관계가 냉랭해졌고, 영국은 하심가문과의 관계에 더 주력하기 시작했다.

알 사우드 가문의 이븐 사우드는 1925년 하심가문의 큰 아들 알리 빈 후세인이 통치하고 있던 ‘헤자즈 왕국’ 침공하였다. 그리고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를 점령하여 ‘네지드-헤자즈 왕국’을 수립하고 순식간에 아랍의 맹주로 등장한다. 알리 빈 후세인은 막내 동생인 파이잘의 이라크 바그다드로 도망쳤다. 1927년 제다협정으로 영국으로부터 지위와 독립을 인정받았고, 1932년 국명을 바꾸어 오늘날의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선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건 하심 가문에 비해 외세에 대해 대단히 배타적이고 독립적이며 전통 이슬람주의를 고수하던 이븐 사우드의 사우디아라비아가 1933년 미국과 영국 기업들에게 석유개발권을 허가함으로서 현실적인 타협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 오늘날 폐쇄적인 내정에 외교에 관한한 친미, 친서방이라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이중성을 낳았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는 웅장한 대서사임은 분명하다. 역사를 살아가는 한 인간의 고뇌로 충만하다. 그러나 그 고뇌조차 가공되고 창조된 영웅서사의 한계를 극명히 드러낸다. 고작 2년 동안 활동했던 로렌스가 유구한 아랍세계와 아라비아의 역사를 만든 게 아니다. 그는 영국 제국주의의 일익을 담당하는 선봉으로서의 ‘스파이’였을 뿐이며 그의 아랍세계에 대한 이해는 서구인의 조악한 시선에서 아랍인들을 대상으로만 여기는 오리엔탈리즘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1962년 개봉 당시에 관람료 지불하는 관객들은 대부분 서구인이었을 테니까.

더욱 심각한 문제는 서구에 의해 오염된 아랍세계의 질서였다. 그들은 그들의 제국주의 욕망에 따라 아랍세계를 분해했다. 이라크,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이 나뉘었으며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독립했지만 인도양과 페르시아만, 홍해의 해안을 따라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카타르, 바레인, 오만, 예멘 등의 소국들로 나뉜 채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가 차례로 독립했다. 이슬람 원리주의인 ‘와하비즘’ 수용한 사우디아라비아조차도 서구의 석유자본들과 밀월관계를 맺으며 동반자가 기꺼이 됐다. 아랍의 신흥 지배계급들은 사우디의 경우처럼 서구자본과 결탁하여 이익을 공유하는 길을 택했다. 무엇보다도 2000년 전에 아랍세계를 떠나 어떤 연고권도 주장할 수 없는 이스라엘이 돌아오게 만들었다.

이스라엘-아랍 간의 중동전쟁, 이라크-이란 전쟁,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이라크 전쟁, 알 카에다의 테러리즘, 시리아 내전, 이슬람 극단주의 IS의 창궐, 예멘내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학살 등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피비린내 나는 아랍 현대사의 근본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현재는 영국의 역할이 미국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자신의 삶과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고, 되지 못하게 만든 아랍의 역사가 오늘의 비극으로 끊임없이 재생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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