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번째 남자 - 야구, 그 위대한 기념비의 역사”

in #kr-movie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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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본 기억이 있는 야구를 소재로 한 ‘19번째 남자’이라는 영화가 재탕되더군요. 1988년 작으로 당대를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들인 케빈 코스트너, 수전 서랜던, 팀 로빈스 등 배역은 호화진영입니다. 그러나 그다지 흥행요소가 없었던지 국내에선 극장개봉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대세였던 이 잘 생긴 케빈 코스트너가 나왔는데 말입니다. 이후 케빈 코스트너는 엄청난 제작비를 들이며 자신이 제작, 주연한 ‘워터월드’의 참담한 흥행실패로 쪽박을 차며 하향곡선을 긋지요. 그의 일생의 대표작으로 꼽는다면 스스로가 감독과 주연을 맡아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 등 7개 부문을 휩쓴 ‘늑대와 춤을’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겠지만 저는 인디언 학살 정당화의 문법적 변종인 ‘늑대와 춤을’보다도 단연코 미국사회의 내부모순을 직시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했던 ‘퍼펙트 월드’입니다.

수잔 서랜던은 제가 가장 좋아했던 여배우 중에 한 사람이랍니다. 이 여배우의 매력은 한마디로 ‘슬픈 퇴폐’라고 할까요. 그 품에 마냥 안기고 싶은 모성에 대한 희구를 자극하지요. 그 속에서 발산되는 은근한 농염의 향취는 실제로 그녀와 섹스를 하고픈 충동을 일게 한답니다. 헐리우드에는 극강의 여배우들이 즐비하지만, 먼 동네의 이야기일 뿐 스크린 내부와 외부를 혼동하는 경우는 별로 없지요. 현실 속에서 마주칠 수 있는 캐릭터의 구현이라는 점에서 그녀는 훌륭한 배우입니다. 그녀의 출연작 중에서 제목은 기억안나지만, 하층의 나이 많은 웨이트리스로 분하여 연하의 촉망받는 상류층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영화도 있었지요. 또한 아시다시피 몇 년 전 결국 파경에 이르렀지만 ‘19번째 남자’에 같이 출연했던 12살 연하의 팀 로빈스과는 커플이었다는 점도 그런 느낌을 더욱 줬던 것 같습니다.

원제가 ‘Bull Durham’인 ‘19번째 남자’는 야구가 배경이지만, 메이저리그가 아닌 마이너리그라는 점이 오히려 끌립니다. 더럼 불스는 바로 마이너리그 팀 이름입니다. 메이저리거들의 연봉은 가히 상상을 초월합니다. 뉴욕 양키즈의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10년간 2억7천5백만 달러 역대 최고액을 기록 중이지요. 류현진 소속팀인 LA 다저스의 에이스이자 메이저리그 최고투수로 평가되는 클레이튼 커쇼는 25살의 젊은 나이를 감안하여 벌써 12년간 3억6천만 달러라는 경이적인 몸값이 이야기된다고 하는군요. 그리고 메이저리그의 최소연봉은 50만 달러로 정해져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에 진입만 할 수 있다면 누구나 그 정도의 연봉은 보장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마이너리그는 메이저리그와는 하늘과 땅 차의 처우와 봉급을 받습니다. 메이저리그는 비즈니스석 타고 원정경기를 가고, 별 다섯 개짜리 호텔에서 숙식하지만 마이너리그는 버스타고 돌아다니며, 햄버거로 때우며 모텔에서 잡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압박하는 것은 적자생존의 정글의 법칙입니다. 마이너리그는 트리플A, 더블A, 싱글A, 루키리그 등 단계별로 나누어져 각각의 리그 경기를 갖습니다. 이것을 이른바 ‘Farm System’이라고 합니다. 유망주들을 키워 메이저리그로 공급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각 구단별로 수백 명의 마이너리거들이 우글대며, 메이저리거가 되기 위한 치열한 생존게임을 벌여 나갑니다. 그렇다고 메이저리그에 진입한다고 해서 성공을 보장받는 것도 아니지요. 능력치를 검증할 단 몇 번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곧장 마이너리그로 떨어진답니다.

마이너리그에는 구단의 주목을 한껏 받으며 정성을 다해 키우는 애송이 유망주들이 있는 반면에, 마이너리그 팀들을 전전하며 세월을 파먹고 만 노장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19번째 남자’에서 케빈 코스트너는 그렇게 마이너리그에서 잔뼈가 굵어버린 포수 포지션의 선수입니다. 그에게 야구는 메이저리거로서의 꿈보다 평생 해왔던 일이기에 어쩔 수 없이 하고 있는 체념의 언어입니다. 그런 그에게 구단에서 특명이 떨어지지요. 160km의 강속구를 뿌려대지만, 제구력은 도대체 엉망이며, 어리숙 하기가 짝이 없는 얼간이 타입의 신출내기 유망주 팀 로빈스를 조련하라는 것이지요. 이들 사이에 수잔 서랜던이 등장하여 애정의 삼각관계를 연출합니다. 수잔 서랜던은 독특한 캐릭터입니다. 제대로 교육까지 받은 그녀는 비록 시골 하찮은 대학이지만 강의도 하며 지역신문에 칼럼까지 기고하는 여자랍니다.

야구를 기록하는 것이 취미인 그녀에게 야구는 종교와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신성한 의식이 수반되지요. 그녀의 의식이란 더럼 불스에 새로 들어오는 젊은 유망주들을 침대에서 몸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19번째 남자’란 그 의식의 역사이며, 그녀가 야구와 일체가 되는 방식이지요. 사실 스포츠 스타와 섹스는 어쩌면 불가분의 관계인 욕망의 전쟁터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나 돈이라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개입되면 더욱 그러하지요. 대표적으로 무수한 여인들과 성관계를 맺어 섹스중독 클리닉에서 치료까지 받았던 타이거 우즈가 그랬으며, 60년대 NBA농구의 전설적인 센터였던 월트 체임벌린은 후에 무려 1000여명의 여성과 성관계를 맺었다고 술회하기도 했지요. 러시아 출신의 세계적 슈퍼모델 이리나 샤크를 애인으로 둔 바람둥이로 소문난 법적 총각 호날두는 이미 애 아빠이기도 합니다. 하룻밤 인연으로 만난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가 출산을 해버린 통에 친자확인소송 끝에 막대한 위자료를 지불해야 했지요. 하루아침에 로또당첨을 꿈꾸는 불나방 같은 인생들이 가로등 불빛과 어울리면 그 산만하고 부잡스러운 잔영이 오히려 적적함을 유발합니다.

‘19번째 남자’에도 스타가 될 성 싶은 유망주를 사냥하려는 꽃다운 나이의 여인이 나오기도 하지요. 수잔 서랜던은 불나방 같은 그녀들과는 추구하는 것이 차원이 다른 부류로 보입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공허하다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공허를 어떻게 치장하는가의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수잔 서랜던은 애초에는 젊은 유망주들을 자신이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세상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메이저리그 스타의 아내나 연인으로서 말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아마도 그녀의 서너 번째 남자 정도에서, 젊은 유망주들을 소유할 수 없음을 깨닫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절망의 공허였을 그 순간에 그녀는 야구를 종교화, 절대함으로써 자신의 깊숙이 낙인이 되어버린 상처를 봉합하지는 않았을까요. ‘나는 너희들을 소유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을 뿐이야’ 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면서요.

그것은 체념의 또 다른 얼굴이기도 하지요. 그녀만의 체념의 방식은 니체 식으로 표현하자면 ‘기념비적 역사’로 만들어갑니다. 기록의 스포츠인 야구에서 더럼 불스의 기록들을 일일이 관전하며 기록하고, 19명의 남자들에 대한 기록들을 그녀의 기념비에 새기며 말입니다. 그 기념비는 체념으로부터 도피하고, 체념에 대항하는 수단이지요. 다시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이미 오래전에 지나간 순간들 중 최고의 것이 내게는 아직 생생하고 밝고 위대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이 진정 최고의 순간인가에 대한 의문은 들지 않을까요. 그것이 자아로 믿어왔던 것의 고집스런 독선이거나 상처와 아픔으로부터 도피면 말입니다.

케빈 코스트너 역시 자신의 기념비를 갖는 인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나이가 든 퇴락한 선수에 불과했지만, 일말의 메이저리거가 되는 기념비를 마음 한구석에 품었을 것입니다. 사실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 이지요. 그러나 사람으로서 당연한 마음이지만 현실은 마음에 품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습니다. 네 주제에 감히 라며 윽박지르기가 일수지요. 구단에서 유망주 팀 로빈스의 조련을 맡겼을 때 잘하면 그 공을 인정받아 메이저리거가 어쩌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번 일만 성공하면 승진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어느 월급쟁이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메이저리그라는 또는 직장이라는 체제의 기념비는 승자이기 이전에 패배자가 이미 상정되는 부비트랩을 잔뜩 깔아놓은 것을 은폐하지요. 그래서 인간다움이라는 것은 어느새 실종되기 마련입니다.

수잔 서랜던은 이미 케빈 코스트너가 유망주 시절 만났던 여인이었습니다. 이들은 해후하여 서로에게 끌리는 미묘한 호감을 다시 갖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념비를 위해 호감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아니 이미 익숙해져버려 그래서 낯설게 된 그러한 감정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이겠지요. 케빈 코스트너는 어벙한 애송이 팀 로빈스에게 수잔 서랜던을 양보하지요. 수잔 서랜던은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팀 로빈스를 침대에서 가르치지만 문득 밀려오는 ‘회의’만큼은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회의,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찬란한 순간이 아닐까요. 회의는 자기 자신에게 ‘잘 살고 있니’, ‘제대로 가고 있니’ 스스로 묻는 거지요. 이 순간의 물음은 파괴적입니다. 지금까지의 견고하게 가꾸어 온 나의 일상의 관계망을 일거에 와해시킬 수 있으니까요. 회의를 억지로 외면했을 때는 그 잔혹한 역동의 여운은 평생 동안 마음 한구석에서 창백한 얼굴로 환영처럼 떠다닙니다. 회의는 누구한테나 찾아오지만, 회의의 주인공이 되는 건 매우 쉽지 않은 일이지요.

‘19번째 남자’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백전노장 케빈 코스트너와 신출내기 팀 로빈스라는 이질적인 요소가 갈등하며, 충돌하고 결국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려간답니다. 수잔 서랜던은 이들을 잇는 가교의 역할이구요. 케빈 코스트너와의 호흡을 통해 위력적인 투수로 거듭난 팀 로빈스는 드디어 메이저리그부터 호출을 받고 또 다른 성공을 위해 떠나지요. 그러나 케빈 코스트너는 구단으로부터 방출통보를 받습니다. 더 이상 쓸모가 없기에 용도 폐기가 된 것이지요. 케빈 코스트너가 가졌던 일말의 기념비는 효율성을 지고의 가치로 여기는 거대한 시스템의 합리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지요. 그는 배제된 자의 모습으로 쓸쓸함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팀 로빈스도, 케빈 코스트너도 떠난 수잔 서랜던은 지금까지 자신의 삶의 방식에 갈등합니다. 심중을 마구 헤집는 회의의 마술에 제대로 걸린 것이지요. 심야의 폭우를 뚫고 차를 몰아 케빈 코스트너의 집을 찾아가는 길은 18개의 기념비가 빗물에 씻겨 가는 자기해체의 혼돈이었을지 모릅니다. ‘자기에 의한 기념비’가 결국 ‘자기가 아닌 기념비’라는 형용모순이 벅찬 가슴을 마구 두들기며 교차했겠지요. 서로가 그토록 갈구하던 기념비가 공허해지는 순간 그들은 자유를 느낍니다. 촛불들로 온 욕실을 밝히며, 욕조 안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맨몸뚱이로 서로의 빈 공간을 채우는 일체가 될 때 만끽하는 희열의 자유 말입니다.

케빈 코스트너는 다시 마이너리그의 다른 팀으로 이적하여 선수생활을 지속합니다. 그리고 그는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마이너리그 홈런 신기록’의 기념비를 쌓아 올립니다. 수잔 서랜던은 그의 기념비를 나직이, 향기 가득한 차를 음미하듯 기록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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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보고 갑니다! 자주봐요 @jin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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