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m TV #7. 한 연쇄살인범의 이야기

in #kr-movie6 years ago (edited)

A short summary in English is to be found at the end of thi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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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영국의 에세이 작가 토마스 드 퀸시(Thomas De Quincey)는 1823년 블랙우드 매거진(Blackwood's Magazine)에 기고한 글에서, sympathy(공감)가 '동정(연민)'의 뜻으로 사용되는 세태를 비판한다. 본래의 뜻은 [(그 어떤 감정이든 간에) 남의 감정에 이입하는 것]인데, [불쌍히 여기는 것]의 의미로 와전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드 퀸시가 비판했던 이러한 경향은 현대에도 고스란히 전달되었고, 우리는 sympathy를 공감과 동정 두 의미로 다 사용하고 있다. 두 가지 뜻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sympathy의 본연의 뜻을 공유하면서 '동정, 연민'의 뜻은 없는 empathy(공감, 이입)를 강조하는 경우도 곳곳에서 보인다.

물론 혼동의 여지가 없다면 굳이 sympathy의 사용을 기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용어상의 혼동과 별개의 차원으로 한 개인의 입장에서, 스스로 느끼는 것이 (남의 슬픔이나 불행에 대한) '공감'인지 '동정심'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을 것이다.

한 영화에서, 자신을 우위에 놓고자 하는 '동정심'과는 구분되는 '공감'의 표현을 목격한 적이 있다. 정확히는 '공감'의 연기라고 해야겠지만, 어차피 그 찰나를 정확히 현실에서 목격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본다. 여하튼, 그것은 실존했던 연쇄살인마에 관한 영화였다.

나는 역대 범죄자에 대한 다큐멘터리나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평온한 일상에서 그런 일은 매체로만 접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성악설 신봉자라서인지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차피 있었던 현실의 재연이기도 하지만, 뭔가 개별적인 사건을 넘어서서 인간 본연에 대한 현실로 다가온다.

오늘 얘기를 꺼낸 영화는 1995년도에 HBO에 의해 제작되었는데, 일명 '로스토프의 백정(the butcher of Rostov)'이라고 불리는 안드레이 치카틸로(Andrei Chikatilo)를 검거한 수사관의 이야기이다. 정확히는 그 주제에 대해 작가 로버트 컬런(Robert Cullen)이 연구해서 출간한 책을 토대로 하는 영화다. (물론 책부터가 당사자들의 증언과 기록에 의존하기 때문에, 스스로 미화한 부분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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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용 영화 Citizen X(시민 X)의 DVD 표지

평소처럼 기대감(?)을 안고, '로스토프의 백정' 영화를 보려고 앉은 어느 날이었다. 나치 수용소의 최고지휘관에게나 붙여지는 '백정'이라는 별명이라니! 수많은 이들을 죽인 안드레이 치카틸로에 대해 기본적인 사항들 외엔 알지 못하던 때였기에, 호기심이 컸다.

그런데 영화가 시작한지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주인공 남자가 울기 시작했다. 그는 사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검시관이었고, 보고서를 음성 녹음으로 작성하고 있었다. 연쇄살인마에 희생된 그런 류의 영화에서 그때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 들었다.

영화 크라잉 게임(The Crying Game)으로 유명한 스티븐 레이(Stephen Rea)가 연기해서였을까, 피해자의 고통과 그 주변인들이 느낄 슬픔에 대한 '공감'의 장면으로 보였다. 그리고 내가 이런 소재에 대해 그토록 많은 매체를 보면서도, 한 번도 진짜 희생자 입장에 제대로 이입해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그렇다고 범죄자에 이입했다고 하긴 힘들지만, 은연중에 그런 반응을 유도하는 작품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사실 희생자의 존재를 그 정도로 의식하게 된 경우도 처음이었다.

굳이 보들리야르나 누군가의 표현을 꺼낼 필요 없이, 나는 화면 속에서 재연되는 끔찍한 현실을 그간 거의 무감각하게 보아온 것이었다. 실화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대부분 '스릴러' 형태를 띠고 있고, 거기에서는 말 그대로 '스릴'과 또 한번의 성악설 입증에 따르는 정체 모를 쾌감이 있을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평소의 내 취향을 기준으로 하면 너무 감성적인 장면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시민 X는 내 '범죄영화 취미생활'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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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레이, 도널드 서덜랜드

스티븐 레이는 빅토르 부라코프(Viktor Burakov)를 연기한다. 그는 검시관이지만 원래 수사관을 지망했었다는 이유로 로스토프 지역에서 거듭 일어나는 연쇄살인의 수사를 지휘하게 된다. 당국에서 대중에 연쇄살인마의 존재를 알리기 꺼려하고, 실패해도 쉽게 잘라낼 수 있는 인물을 원했기 때문이다. 부라코프는 순진하고 열정적이다.

그에게 직접 지시를 전달하는 상관은 군 소속으로, 미하일 페티조프(Mikhail Fetisov)라는 현실주의적인 인물이다. 페티조프는 고전 전쟁영화 더티 더즌(The Dirty Dozen)에서 바보 같은 일병 역할을 맡았던 도널드 서덜랜드(Sutherland)가 연기한다. 영화의 묘미는 사실 이 두 사람의 콤비라고 볼 수 있다.

연쇄살인마 안드레이 치카틸로는 1978년에 첫 살인을 하고 1990년도까지 계속해서 50명 이상의 여자와 10대 아이들을 잔혹한 방법으로 죽였다. '로스토프의 식인종'으로도 알려져 있는 그는 1980년대에 한 번 용의자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다. 피해자들의 시신에서 발견된 정액에서 검출된 혈액형이 AB형이었던 반면, 혈액형 검사로는 A형으로 나오는 특이체질이었기 때문에 용의자 범주에서 일찍 제외되었던 것이다.

그런 결정적인 방해요소를 제외하고서라도 충분히 열악한 상황에서 수사가 이루어졌다. 가령, 사건에 관련된 정보를 정리할 수 있게 컴퓨터를 제공해달라고 요청해야 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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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시민 X의 배경이 된 책 Killer Department의 표지

냉전이 끝난 후에나 FBI의 협조와 완전한 공개수사가 가능해졌고, 끈질긴 추적과 사복 경찰 투입 작전을 통해 치카틸로를 검거할 수 있었다. 부라코프-페티조프 팀 이외에 큰 활약을 한 사람은 대학에서 연구하는 정신과 의사 알렉산드르 부카노프스키(Alexandr Bukhanovsky)였는데, 살인범의 프로필을 상당히 정확하게 추론해냈고 결국 그것이 치카틸로의 자백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국내 자료에서 언급하는 이사 코스토예프(Issa Kostoyev)는 치카틸로의 체포 후 심문을 담당했고, 책과 영화에서는 수사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은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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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쇄살인범 치카틸로를 연기한 제프리 데먼(Jeffrey DeMunn)

'로스토프의 백정' 치카틸로는 마치 소설처럼 불우하고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또래들의 놀림을 자주 받았다고도 한다. 공부에 매진했지만 모스크바 대학에 진학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고, 지방에서 학위를 취득해서 초등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된다. 그는 사춘기 시절부터 성 불능으로 인해 문제적 행동을 보여왔었는데, 결국 학교에서 수많은 성추행과 수상한 행위로 인해 해고를 당하게 된다. 그럼에도 당원이어서 그랬는지, 먹고 살기엔 지장이 없었던 것 같다. 길에서 거듭 여자나 아이들을 돈이나 먹을 것 등으로 유인해내는 패턴으로 범행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치카틸로의 실제 모습, 특히 잡힌 후 법정에서 미친 척을 하는 모습은 상당히 기이하고 무섭다. 그래서 여기엔 첨부하지 않기로.

앞에서는 스티븐 레이가 연기한, 희생자들의 아픔에 대한 깊은 공감을 이야기하였는데, 이 영화는 또 다른 각도에서 '공감'을 생각하게 한다. 치카틸로는 분명 불행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인물이었다. 시민 X는 주눅든 성 불구자 치카틸로, 직장에서도 영 무능한 치카틸로의 모습도 보여준다.

하지만 "그랬군" 정도의 반응에서 그치게 된다. 그 이상의 어떤 sympathy는 (공감이든 동정심이든) 느끼기 어렵다. 심지어 치카틸로가 정신과 의사의 보고서 낭독을 듣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지만, 그리고 시청자마다 다르겠지만, 아마 동정심이든 공감이든 느끼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치카틸로의 그런 모습뿐 아니라 범행할 때의 모습도 상당히 적나라하게, 그러면서도, 범죄자를 '영웅시'하는 사소하고도 흔한 설정들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글의 맨 앞에서 토머스 드 퀸시를 언급했었다. 사실 sympathy에 관한 내용은 각주에 불과했지만, 그 글의 주요 논지도 이 포스팅의 주제와 무관하지 않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Macbeth)에서 맥베스 부부가 범행을 결심하는 순간이야말로 '사람이 악마로 변하는 시점'으로 보았다. 극단적이고 이 시대에는 맞지 않는 언어이지만, 과연 다른 것보다 덜 현실적인 표현이라고 잘라 말하지는 못하겠다.

종종, 한 사람의 범죄를 일종의 사회적 산물로 보는 주장을 보게 된다. 그에는 물론 여러 근거가 있겠지만, 어쩌면 사람의 행동 동기를 '악'으로 치부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한 켠에 있을지도 모른다. 악이라는 개념이 너무 단순하다고 느껴서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객관적인 연구가 가능하지도 않고 통하지도 않는 미지의 영역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없는 것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개인의 범죄가 결국 개인의 책임이냐, 아니면 (일부나마) 사회의 책임이냐에 대한 문제에 관해서는 개인마다 자기만의 해답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에 책임을 묻기 위해 동정심을 지나치게 유발하려 노력하거나, 엉뚱한 방향으로의 '공감'을 유도하거나 간접 경험을 은근슬쩍 제안하는 방식의 재연은 불필요, 아니 부적절하다. 잘생기고 액션을 잘 하는데다가 패밀리맨으로 분한 배우가 '정의'의 편으로 나오는 식의 서사도 사실 비슷하다. 멋진 주인공에 '빙의'하는 재미를 주려면 픽션으로도 마음껏 할 수 있으니까.

적어도 실화를 배경으로 한다면, 희생자에 대한 '공감'을 표현하고, 범죄자의 범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그에 대한 '공감'의 유도는 자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사실, 같은 치카틸로 사건에 대해서 만들어진 몇 영화들에 대해 크고 작게 느낀 사항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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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치카틸로에 관해 만들어졌지만 문제의식이 많이 다른 영화, 이블렌코의 포스터. 언젠가 이 영화에 대해서도 쓰게 될 수도.

어쨌든, 영화 시민 X는 그 전까지 내가 보아온 연쇄 살인범에 대한 스토리텔링의 (의도된) 선정성을 새삼 실감하게끔 해주었다. 같은 측면에서 여운을 남긴 실존 연쇄살인범 소재 영화가 하나 더 있는데, 그 얘기는 언젠가 다음에 해보기로 한다.

For @sndbox: This post is my review for the TV movie Citizen X, as well as an article on how I think real crime should be treated as a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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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무서운게 사람인듯 싶어요 ㅠㅠ

사회에 책임을 묻기 위해 동정심을 지나치게 유발하려 노력하거나, 엉뚱한 방향으로의 '공감'을 유도하거나 간접 경험을 은근슬쩍 제안하는 방식

생각해보니 보통 이런방식 같아요.
저는 배우와 연기력 전개방식에 더 몰입을 했었던듯요^^

넹 아무래도 일단 영화이니까요...내용이 실화일 경우 그 재연되는 과거를 조금씩 생각해보는 정도?는 해본 것 같네요.

실제 있을수 잇는 일이라 더 무서워요

네 일어났으니 또 일어날 수 있겠죠!

생각해보니... 영화나 드라마보며 공감한적이 없는것 같네요.
그게 범죄자던 피해자던 관계 없이요.
모두 다 제 3자 입장에서 관찰하는 느낌으로 본 것 같습니다.

몰입이 덜 돼서 그런걸까요?

음...저도 거리를 멀리 두는 편이지만, 누구든 자기 일처럼 몰입할 수는 없으니까요. 몰입의 정도와는 별개로, 있었던 일을 각색, 재연할 때 희생자가 제일 관심 밖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새삼 한번 상기했다고나 할까요.

일반적으로 피해자는 사건 전개를 위한 소품같은 느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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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쵸. 짤 어쩔ㅠ

옛날 영화나 드라마 제목을 보면 직설적인게 많은 것 같아요.
아무리 그래도 '백정' 이라니... +.+
비유나 은유는 고이접어두는 크라쓰... 보통이 아닙니다. -.-;

ㅋㅋ제가 치카틸로 별명을 자주 언급하긴 했는데 제목은 시민 X입니다. ㅋㅋㅋ ㅋ

아 제가 잘못 인지했나보군요. ^.^;
백정이라 단어를 써서 제목을 지었어도 전위적이고 괜찮았을 것 같은데 말이죵. -.-+

네, 괜찮은 듯? 그런 책 제목 많이 본 것 같아요.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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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팀 해놓고 천천히 읽어 볼께요.

넵, 감사합니다. :)

성악설과 성선설을 모두 믿어요. 누군가는 악하게 태어나고 누군가는 악하게 태어난다고 믿습니다.

저도 스릴러 영화를 좋아하는데 이제까지 희생자의 아픔과 비극에 대해서 깊은 공감을 느낀적이 없었는데 .. 이런 관점을 제시해주는 영화도 있군요.

전 인간은 기본적으로 악하고, 개개인들이 그걸 극복하는 것도 선으로보다는 사회적, 개인적 규율을 통해서 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하죠. ㅎㅎ종종 글에 쓰지만 개인적 규율 중에서 가장 강한 것은 자존심이라고도 생각...

영화들은 대부분 그런 것을 느끼지 않도록 설계된 것 같아요. 스릴러의 본질에 방해된다고 생각할 수도요.

신선한 시각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역쉬~

감사합니다. ㅎㅎ

아...먹는 얘기가 없는데...난 왜 요기에 있징......난 누구..요긴오디...

흠. 러시아 배경 영화 얘기이니 러시아 식의 페스츄리? 파이
사진을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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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상태를 보니 기름에 튀기는 페스츄리 같은데....안에 뭐가 들었는진 모르겠지만 한 입 깨물면 파삭하는 소리와 함께 이빨에 촉촉한 물컹함이 전달될 것 같은 느낌이....거기에 기름의 고소함과 밀의 고소함이 함께 어우러져서 소확행을 줄 것 같은 비주얼이네욤.

손수 이런 좋은 음식 사진까지 ㅋㅋ 이런 친절하신 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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