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emit과 함께하는 한국사이야기 45) 공민왕 - 고려의 마지막 개혁을 꿈꾼 왕 / Korean history

in #kr-history6 years ago

안녕하세요 @eunhaesarang입니다.

오늘 나눌 고려의 마지막 개혁을 꿈을 꾸웠던 공민왕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려 31대 임금 공민왕은 중국에 머물면서 원의 멸망이 멀지 않음을 직감했습니다.

그는 귀국길에서 '반드시 고려를 개혁하리라'고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귀국길에는 그를 환영하는 행사가 열렸는데 이연종이란 신하가 "국왕의 단상에 왕이 변발을 하고, 오랑캐 복식(호복)으로 오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직언을 하게 됩니다.

왕은 흔쾌히 "그대 말이 맞다."라고 하고 즉시 변발을 풀어헤치고 원나라 옷을 벗어버렸습니다.

작은 사건이 개혁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희망.png

공민왕은 이듬해 개혁 조서를 발표합니다.

모든 정부 기관이 5년마다 중요 정책을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고 대신들과 정치와 사회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서연을 부활시켰습니다.

이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려고 의도였습니다.

토지와 노비 제도를 개혁하라는 지시도 내렸습니다.

원에 의지하는 권문세족들이 토지와 노비를 모두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밥줄은 끊어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전략이었습니다.

이 개혁을 지지하는 신하들이 있었는데 신진사대부들입니다.

이들은 대부분 지방 향리나 하급 관리들의 자제들이었는데 성리학을 배웠고, 과거 시험을 통해 괸리가 된 사람들입니다.

명분과 도덕을 특히 중요하게 여긴 젊은 지식인들로 원을 반대하고 명과 가까이 지내려 했고 부패한 권문세족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공민왕은 개혁을 통해 권문세족을 하나씩 제거하게 됩니다.

그러자 위협을 느낀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기철은 그토록 강하게 개혁을 밀어 붙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그대로 두면 개혁의 칼날이 자신들의 목을 겨냥할게 분명했기 때문에 기철은 다른 친원파 귀족들과 함께 공민왕을 끌어내릴 음모를 꾸몆는데 이사실을 왕이 먼저 알게 됩니다.

왕은 먼저 반격할 생각으로 1356년 연회를 연다며 권문세족들을 궁으로 초대를 하게 하였고 기철과 권겸은 별 의심 없이 입궐을 했는데 왕의 지시를 받은 병사들이 그들을 철퇴로 죽이고 이어 다른 친원파들을 대대적으로 숙청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내부 정리를 끝내고 원과의 대결에 본격 돌입하게 됩니다

222.jpg

공민왕은 우선 원의 연호와 관제를 폐지하고 내정간섭 기구인 정동행성도 없애버립니다.

원의 화주(평남 영흥군)에 설치한 식민통치기구 쌍성총관부도 되찾아옵니다.

요동지방을 공략해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기도 했습니다.

기철의 죽음을 알게 된 기황후가 복수를 위해 군사를 보냈지만, 이 또한 막아내게 됩니다.

이 무렵 고려 변방은 아주 혼란스러웠어. 북쪽에서는 홍건적이, 남쪽에서는 왜구가 기승을 부렸지만 무인들이 잘 막아냈는데 그때의 인물들이 최영과 이성계로서 국민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되었죠.

하지만 모든 침략을 막을 수는 없었겠죠.

1361년에는 홍건적의 침략에 개경이 함락되었고 왕이 급히 안동으로 피난하기도 합니다.

당시 공민왕을 호위했던 김원명이 한 승려를 소개를 했는데 바로 그가 신돈입니다.

개혁을 피로를 느낀 귀족들의 반발이 심한 시기였는데 더 강력하게 개혁을 밀어붙일 인물이 우직하고 총명한 신돈은 적임자였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신돈에게 개혁의 지휘권을 주기로 하고 1364년에는 그를 사부로 삼아 가까이에서 정치 자문을 받기 시작합니다.

1365년 부인 노국대장공주가 아이를 낳다가 사망하게 되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 아주 커서 이때부터 부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불교에 전념하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정치개혁이 그에게 큰 성취감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혁이 중단되지는 않았습니다.

제2의 정치 개혁을 한 인물이 신돈입니다.

오늘은 고려의 마지막 개경을 꿈꾼 공민왕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은 신돈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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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엄청난 대국이었던 원나라의 영향력을 지우려햇던 공민왕 멋있습니다.
그런데... 동성애자라는 말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말년에 조금 문란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민왕이 동성애자라는 설은 있는데 정확한지는....

이때 만난 인물이 신돈이 었군요. 기철이 철퇴를 맞아 죽은줄은 몰랐네요. 아무래도 조심성이 있었던 인물이었다면 저렇게 쉽게 왕궁에 들어가지 않았을텐데 누이의 힘으로 권세가가 되다보니 휘두를 줄만 알지 영악한 머리는 없었나 봅니다.^^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기철은 조금 아둔했던 인물인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숟가락 하나 얹은 거죠

가끔씩 이런 역사 단편 이야기 읽는것도 도움되겠네요!!

정성어린 글 잘 읽고 갑니다!! 앞으로도 많이 써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세요

공민왕이 천하의 호걸이었는지 남색가였는지 알 수가 없네요. 신하들을 척살한 왕은 대체로 평가가 안 좋은 것 같아요. 그래도 역사의 한획은 그은 것만은 분명하네요.11세기 강감찬, 12세기 윤관, 13세기 정중부,최충헌, 14세기 공민왕 이렇게 획을 그어봅니다 ^^

정중부와 최충헌이 한획을 그은것은 맞으나
무신정권 하에 지금으로 군사정권하이니 ...
아직도 연세 많은 분들은 전두환 시절이 편했어 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구요

잘 읽고 갑니다 역사글은 닥봇!

ㅎㅎ 감사합니다
otac 능력이 부러울 따름입니다

개인적 아픔이 없었더라면 고려를 다시금 중흥으로 이끌 수 있었을텐데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하는 고려의 왕입니다 ㅠㅠ

그렇죠
어떻게 보면 조금 안타까운 왕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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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공민왕때 왜구를 막은 것이 최영과 이성계군요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더니 이후 길이 갈리긴 하지만
역시 계기가 있어야 국민적 지지도 얻게 되는 군요 ;D

시대가 영웅을 만드는것 같습니다
지금 평온시대에도 많은 영웅이 많는데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그런 말을 하더라구요
지금도 어려운 시기는 많는것 같은데 난세가 아니길은 다행인것 같아요 ㅎㅎ

2018년에는 두루 평안하시길!

오늘도 이렇게 찾아주셔서 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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