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뻔한스티미언:세가지색] 여행 3색 세트

in #kr-funfun6 years ago (edited)

나의 여행기억 3색 세트.

1. 초록색

난 초록색 여권을 보면 설렌다. 그래서 내 책장에는 쓸데없이 여권이 보기 좋게 세워져있다. 특히나 내가 어릴 때와 비교해서 강력해진 우리나라의 국력을 여권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맛있게 끓인 라면을 냄비채로 올려두어도 멀쩡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최근 5년간은 휴가를 길게 낼 형편이 되지 않아서 여권에는 만만한 일본국 상륙허가, 출국 도장만 가득하다. 그 덕에 초록색 여권을 보면 일본 어느 골목에서 먹은 교자만두와 라멘, 카레덮밥과 생맥주, 타코야키와 호로요이, 규동과 생맥주, 나베와 사케가 번갈아가며 떠올라 배가 고플 때도 있다. 어머니는 내가 일본 여행을 다녀올 때마다 한숨을 쉬신다. '일본 좀 그만 가라.'
20180429_105706-horz.jpg


2. 똥색

똥색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황금색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이 오묘만 색은 결혼 전, 혼자 일본의 시코쿠 순례길을 걸었던 기념품이자 앞으로 완성해야할 여행과업이다. 일본 본토는 큰 섬 4개로 이루어져있는 데 그 중 가장 작은 섬, 시코쿠에는 순례길이 있다. 우리로 치면 원효대사쯤 되는 스님이 당나라 유학을 다녀온 후 섬을 한 바퀴 돌면서 창건한 88개의 사찰을 순례하는 코스다. 1번 사찰에서는 순례객 기본 장착 세트를 판매하는데 삿갓, 손바닥만한 천을 덮은 지팡이, 흰 색 겉 옷 정도가 필수템이라고 한다. 제주 올레길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다소 쓸쓸하고 외로운 길이다. 예전에는 죽기직전의 환자, 노인들이 소원성취를 바라며 순례길에 많이 올랐고 길에서 혼자서 죽게 되면 지나가던 순례객들이 그 자리에서 망인의 흰 색 겉옷을 수의로, 삿갓을 관 뚜껑으로 삼아 얼굴에 덮은 후 지팡이를 묘비 삼아 땅에 꽂은 후 명복을 빌고 지나갔다고 한다. '납경장'이라는 책을 사서 사찰마다 들러 확인을 받는 스탬프 랠리라고도 볼 수 있다. 한자를 읽지 못하는 편은 아니지만 정자체가 아니면 알아볼 수가 없기에 납경장에 뭐라고 적혔는지는 알 수 없다. 납경장의 황금색을 보고 있으면 더운 여름 날, 사찰에서 풍채 좋게 멋있게 늙은 스님이 글을 쓰는 걸 보면서 느낀 바람의 맛이 자주 떠오른다. 아이가 더 크면 나 혼자, 또는 아이를 데리고 88번절까지의 순례를 마치는 게 작은 꿈이다.

20180429_105240-horz.jpg


3. 검정색

아이가 태어나기 전 아내와 함께 갔던 큐슈 여행에서 산 티셔츠다. 귀국 비행기를 서너시간 앞두고, 후쿠오카 중심가의 지하상가 어디쯤에서 이 동네에서만 살 수 있는 무언가를 사서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티셔츠의 질로 따지자면 8천원짜리쯤 될만한 티셔츠를 2,500엔 정도를 주고 샀는데 밖에 입고 다니기엔 무리지만 잠옷으로, 속옷으로 한 번씩 입으면서 회전초밥의 맛이 떠올라 기분이 좋다. 큐슈아재가 된 느낌도 든다. 티셔츠 등짝에 시뻘건 글씨로 써 놓은 Nekketsu, Goukai의 뜻을 찾아보니 열혈, 호쾌라는 한자가 나온다. 후쿠오카 사투리쯤이 아닐까 생각만 해 봤는데 지역색에 대한 말인가보다. '경상도 싸나이 의리!' 뭐 이런 느낌인가.
20180429_105127-horz.jpg


Sort:  

Good luck out there

Thank you.

시코쿠 순례길 이야기 흥미롭네요.
시코쿠앤 여행이 아닌 관광으로 추천할만한 장소도 있나요?

비행기삯이 오사카나 도쿄 방면에 비해서 비싼데 비해 특징적인 관광스팟은 적은편이라 추천하고 싶진 않네요.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시코쿠의 중심지는 한국의 경산 정도, 그 외 지역은 한국의 청송, 군위, 의성 같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8월 중순에 '아와오도리'라고 시코쿠 섬의 도쿠시마현에서 열리는 축제는 강추합니다.

여권을 냄비받침으로 쓰신다니 후덜덜 하십니다. ㅋㅋ 여권에 찍힌 도장 보는 재미가 쏠쏠하네요. 다양한 색으로 채우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요. 일본 입국도장은 좀 재미없는 색이라 아쉬워요.ㅎㅎ 두번째로 쓰신 순례코스.. 당나라 유학이란 말을 보고 든 딴 생각인데, 전 예전 분들 순례, 여행 얘기를 들으면 상상을 하게 돼요. 비행기도 없던 시절인데 어떻게 다녀왔을까, 하는 상상이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감사합니다. '해유록'에 보면 조선 선비가 통신사의 일행으로 뽑혀 일본으로 가는 준비를 하면서 했던 고민들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여행 중 사망할 경우를 고려하여 출발 전에 여러 가지 준비를 한다거나 배멀미에 하늘이 노랗게 보인다거나 하는 내용이요. 아마 당나라 유학을 다녀왔던 분들은 더더욱 목숨걸고 가지 않았을까 싶네요. 스티커가 일본의 입국도장을 대신하는데는 저도 심히 유감입니다ㅎㅎㅎㅎㅎ

삼색이 전부 일본이야기네요 ㅎㅎ
저는 예전에 일본갈려고 여권만들었는데 다른일로 못가고
올해엔 대만갈랬더니 또못가고ㅠㅠ
저는 외국이랑 인연이 없나봐요.ㅎㅎ

외국 땅 밟아본 곳이 별로 없어서요. 한 번 잘 다녀오니 만만한게 일본이라.. 비행기삯도 싸고 볼거리도 많은편이라 그냥 라멘, 오코노미야키, 초밥만 먹고와도 만족스럽더라고요. 당일치기로 대마도 다녀온 적도 있습니다. 일본 외 다른 나라들도 장기여행으로 가고 싶은데 여건이 맞지 않네요. 올해는 대만 아니더라도 괜찮은 해외여행 성공하시길 기원합니다ㅎㅎ

Coin Marketplace

STEEM 0.18
TRX 0.16
JST 0.030
BTC 68051.59
ETH 2632.70
USDT 1.00
SBD 2.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