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누구를 위한 요리인가.

in #kr-daddy7 years ago (edited)

대충 삼계탕 한 그릇 만들기

여보, 기침이 심하네.
그렇지? 안 그래도 병원 갈까 싶었는데..
아니, 당신 말고 애 말이야. 그리고 요새 고기가 좀 부실해서.. 삼계탕 같은 거 어때?
사줄려고? 포장할 때 인삼주도 같이 달라 해..
아니, 당신이 좀 만들어 봐. 그 스티밋인가 블로그인가 올리기 좋겠네.

놀리는 것도 아니고 위로하는 것도 아니고.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방해하는 것도 아닌 애매한 응원자. 그리하여 아빠표 얼렁뚱땅 대충그냥 만드는 삼계탕 포스팅이 시작되었습니다. 먼저 집사람이 사다준 생닭과 황기, 냉장고에 있던 대추, 마늘, 인삼을 준비합니다. 여름에 삼계탕 끓일 때 인삼을 다 쓴 걸 깜빡했네요. 어쩔 수 없이 향은 덜 하지만 인삼없는 삼계탕을 만들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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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치킨이든 백숙이든 닭껍질을 참 좋아하는데 집사람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뭐 어쩌겠습니까. 수요자 입맛에 맞춰야죠. 맛 없는 건 괜찮지만 껍질 있는 건 안된다는데. 껍질 벗기는데 칼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건 백종원 선생님이나 쓰는거지 집에서 뭐 대충 그냥 되는대로 만들기엔 가위로 충분합니다. 손으로 껍질을 좀 당긴 뒤에 눈에 기합 넣고 잠시 '닥터K'가 되어 가위를 메스 삼아 뱃가죽과 등가죽을 2등분 합니다. 저 닭날개 부분에 덜 벗겨진 가죽은 어쩌냐고 물으신다면 그냥 닭이 팔토시 했다고 답하렵니다. 아... 팔토시? 8사토시? 12월초에 디지털노트 8사토시 할 때 좀 사둘껄. 업비트에서 오늘 399사토시네요. 그건 그거고 생닭은 이제 생닭몸통과 껍질로 하드포크됩니다. 생닭 1000g 당 껍질 100g 비율로 배당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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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 되었습니다. 냄비에 닭, 황기, 대추, 인삼, 마늘 대충 집어넣고 대충 물 채워서 불 켜고 뚜껑 닫아놓았다가 국물 색깔 변할 때쯤 먹으면 되겠죠. 여기서부터는 배고픈자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뜯어보고 덜 익었으면 투덜거리면서 다시 불을 켤 것이고 다 익었으면 알아서 떠먹을 것이고. 국물이 뽀얗게 일어났으면 삼계탕이 될 것이고, 졸아들어서누렇게 되었으면 닭백숙이 될 것이고. 그런데 제가 삼계탕인지 닭백숙인지를 끓일 때마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닭 껍질입니다. 다 끓을 때까지 기다리면서 한 줌 닭껍질로 나홀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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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일본 여행 가서 메뉴판 마음대로 짚으며 되는대로 마구 주문을 하다가 우연히 닭껍질을 먹어봤는데 아직 그 맛이 잊혀지질 않습니다. 아직도 생닭만 보면 그 껍질구이 맛이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그리움을 재료삼아 닭껍질을 구워봅니다. 불에 달궈진 팬 위의 닭 껍데기에서 무한정 기름을 채굴할 수 있으나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므로 POW 방식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거의 튀김에 가까운 상태가 되면 소금을 뿌리고 팽이버섯이나 생마늘 등을 투척합니다. 닭기름에 튀긴 마늘과 버섯. 아아 또 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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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선 계속 후라이팬과 가스레인지 소리가 나기 때문에 집사람은 아이와 씨름하면서도 내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습니다. 삼계탕이야 익거나 말거나 맥주캔을 따서 잠시 쇼섕크 옥상의 앤디듀프레인이 되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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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집사람은 아이와 씨름하며 닭을 먹일 시간이고, 저는 '아이고 오랜만에 주방에 서 있었더니 힘들다'며 먼산 한 번 쳐다보고 침대에 누워 폰을 만질 시간입니다. 밥 시간이 길어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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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야심한 시간에 포스팅을 열었을까요ㅠ.ㅠ 요동치는 뱃속을 어찌해야할지 막막하네요!!
좀전에 오랜만에 영화 "바닐라스카이"를 봤는데 포스팅을 읽고나니 영화속 대사가 떠오르네요
"신맛을 아니까 달콤한 맛에 감사할 줄 알지"
물론 전 신맛, 단맛 다 좋아하지만 @daegu님의 짧은 자유가 참 달콤하게 느껴지네요! 위트있는 글솜씨에 또 한번 웃고갑니다~ :)

감사합니다. 이 시간에 배가 요동친다면 스낵면, 진라면 순한맛, 사리곰탕면, 너구리 순으로 추천드립니다. 바닐라스카이, 오픈유어아이즈 세 번씩 봤던 영화네요. 냉동될 돈도 없지만 혹시나 제가 냉동된다가 오류가 일어난다면 저 닭껍질 튀김 완성 직전에서 자꾸 꿈이 끊길 것 같네요.

저에게 왜 이러시나요!! 안그래도 머릿속에서 라면라면라면라면 하고 있는데 ㅠ.ㅠ
그나저나 너무 어릴때봐서 그런가 몰랐는데 페넬로페크루즈가 너무 매력적이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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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쿠. 저도 되게 오랜만에 보는데 이 사람 이렇게 예뻤나요. 시간이 지나고 보면 달라보이는 게 세상에 참 많더라고요. 즐거운 한주 되세요.

어이쿠.. 여기서 또 뵙네요 이 누님👍 요즘은 뭐 하시나...

저도 닭껍질을 굉장히 좋아해요! 치킨을 먹을 때 바삭한 닭껍질을 뜯어 먹으면서 행복을 느낍니다ㅎㅎㅎ 글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담담한 문장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개그가 딱 제 취향입니다. 매일 읽고 싶어요. 대구님께서 자주 글 올려주셨으면 좋겠어요!

고맙습니다. 말주변이 없어서 여러사람 글 보고 이것저것 섞어쓰는데 재밌게 봐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즐거운 한 주 되시길^^

크리스마스도 지났으니 얼른 여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하루는 삼계탕 먹고 하루는 옥상에서 뺑끼칠 하다가 맥주 한 캔 시원하게 들이키고 싶네요.

ㅎㅎ시원한 이미지가 떠오르면서 잠시 미소지었습니다. 근데 크리스마스 다음 바로 여름이면 1년 살이 너무 재미없지 않을까요ㅎㅎ동백 질 때 사케 한 잔, 벚꽃 질 때 청하 한 잔, 여름에 뺑끼칠 하다 맥주 한 잔, 가을에 낙엽질 때 소주 한 잔, 크리스마스엔 깐풍치킨에 고량주 한 잔. 댓글쓰다 술 사러 갑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그렇죠. 시즌은 핑계일 뿐... 그저 마셔야 합니다👍 술과 함께 즐거운 밤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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