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희경의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in #jjangjjangman6 years ago

진희는 세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여자이다. 그때는 그랬다. 세 여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남자에게 하는 말, ‘능력 있는 놈.’ 하지만 세 남자를 동시에 사랑하는 여자에게 하는 말, ‘미친 X.’ 요즘 세상에는 이런 이야기가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그것만 봐도 분명 세상은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 방향성은 좋은데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서로에게 생채기를 남기는 이야기들로만 가득하다. 상처의 극단적 배설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소설이라기보다 수필에, 회고록에 가깝다. 아니면 지난 시간의 상처의 기록에 그치거나. <82년생 김지영>처럼. 그러니 담론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서로에 대한 비난으로만 나타난다. 자신의 상처만 보이니까. <92년생 김현우>라는 글이 나올 필요가 있지 않을까?(참고로 현우는 그 당시 가장 흔한 이름이란다.) 그래야 담론이 된다. 담론은 서로 다른 생각의 길항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찾아가는 길이다. 그런데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 남자 소설가들은 대체로 긴 침묵에 빠졌다. 요즘, 소설은 별로 읽지 않는다. 시를 읽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소설을 읽을 때가 있었다. 90년대 소설. 특히 윤대녕, 공지영, 은희경, 전경린, 김형경, 신경숙까지... 장편보다는 단편이 좋았다. 그 뒤에는 오랜 시간 김훈에 풍덩 빠졌다. 오랜만에 다시 은희경의 소설을 잡았다. 어쩌면 읽어야 할 책의 목록보다 읽은 책의 목록이 더 소중할 때도 있으니까. 그 시간과 장소, 그리고 사람을 반추할 수 있으니까. 장편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1998년이니까 벌써 20년은 넘은 작품이다. 어떻게 세 남자를 동시에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그 당시 생각했었다. 사람보다는 사랑을 사랑하는 것이기에 세 명의 애인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이 신기했다.

‘사랑은 운명이다’는 사고에 대해 은희경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오히려 자유롭게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사람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므로 애인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며, 그럼으로써 순정이니 운명적 사랑이니 하는 사랑에 대한 일체의 환상을 깨부술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랑에 있어 가장 커다란 병균은 사랑에 대한 환상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환상이 하나하나 깨지는 것이 바로 사랑이 완결되어가는 과정”이다.

집착 없이 살아오긴 했지만 사실은 아무리 집착해도 얻지 못할 것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짐짓 한 걸음 비껴서 걸어온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 받지 않으려고 주변적인 고통을 견뎌왔으며, 사랑하지 않으려고 내게 오는 사랑을 사소한 것으로 만드는데 정열을 다 바쳤는지도 모를 일이다. (은희경,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부분)

혼자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길을 걸어가는 가장 큰 이유도 결국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이다. 만남은 결국 시간을 공유하고 기억을 만들고 집착을 만든다. 특히 다른 성(性)과의 만남은 더 많은 집착을 유도한다. 떠나는 시간을 잡지 못하는 것처럼 떠나는 사람을 잡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무리 집착해도 얻지 못할 것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짐짓 한 걸음 비껴서 집착이 없다고 표현한다. 사랑은 언제나 온다. 다가오는 사랑에 두려워하고 스스로 진단하고 그래서 힘들어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슬픈 풍경이다. 다가오는 사랑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랑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야할 풍경이다.

사람은 언젠가는 떠난다. 그러니 당장 사람을 붙드는 것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훼손시키지 않고 보전하는 것이 더 낫다. 그것은 내가 끊임없이 사랑을 원하게 되는 비결이기도 하다. 사람은 떠나보내더라도 사랑은 간직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사랑을 할 수가 있다. 사랑에 환멸을 느껴버린다면 큰일이다. 삶이라는 상처를 덮어갈 소독된 거즈를 송두리째 잃어버리는 것이다. (은희경,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부분)

어느 소설가는 변하지 않는 유일한 진실은 변한다는 그 사실뿐이라고 했다.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삶에는 많은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이 여유를 만들고 또 다른 사랑을 만든다. ‘만다라.’ 끝은 시작을 항상 내포하고 있다. 떠난다는 사실은 필연적으로 다른 만남을 예비한다. 중요한 것은 떠나고 만나는 그 상황에 집착하지 않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그 사람과의 사랑 그 자체에 집착하지 않는 일이다. 이미 변함이 전제되어 있기에 사랑에 집착하는 순간 사랑은 환멸로 다가온다. 그 순간 우리 삶에서 사랑이 사라진다. 그건 아주 슬픈 일이다. 그래도 사랑만이 삶이라는 깊고 오래된 상처를 소독해 줄 유일한 거즈니까 말이다.

이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상대가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지 아닌지 따져보는 데에 사랑할 시간을 다 써버리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사랑은 누가 선물하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오는 운명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사랑을 하고 안하고는 취향이며,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은 엄연한 능력이다. (은희경,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부분)

대부분의 사랑은 그렇다. 확인하고 검증하는 과정에 모든 것을 건다. 그렇게 확인하고 검증하는 과정을 지나면 사랑은 사라진다. 그냥 사랑하라. 확인하지 말고 , 계산하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그 시간에 그냥 사랑하라. 뜨겁게 그냥 사랑하는 것은 정말 엄연한 능력이다.

좋은 길을 가르쳐 주는데도 나쁜 길로 접어들게 되고, 직접 겪고 나서 후회하게 돼 있는 것, 또 그런 다음 다른 사람에게 그 길로 가지 말라고 쓸데없는 안타까움을 갖게 되는 허무한 재귀가 인생인 모양이다. 잘못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해야 하는 일이 있고, 벗어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가까이 죄어드는 운명이 누구에게나 있다. (은희경,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부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렇게 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자체로 불가해한 존재이며, 불편한 존재이며, 불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잘못된 길을 선택하고, 알면서도 쓸데없는 안타까움을 갖는다. 벗어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다가가고 싶은 아이러니. 그게 사랑을 앞에 둔 모든 존재들의 쓸쓸한 풍경이다.

사랑을 얻기 위해 한숨짓고, 얻은 다음에는 믿지 못해 조바심을 내고, 결국에는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스스로 피폐해지는 과민한 사랑,.. 어쩌면 그것은 나의 기질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의존적이고 어리석은 방식으로 타인에게 사랑을 구하고 싶지 않았다. (은희경,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부분)

스스로 피폐해지는 과민한 사랑은 이제 버려야 한다. 이런 마음이 사랑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왜곡하지는 말라. 여전히 사랑은 고귀한 감정이며, 아름다운 정서이며, 영원한 진리이다. 당신이 부정한다고 사랑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부끄러워해야 하는 존재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을 부정하는 바로 당신이다. 단지 사랑을 사랑하라. 사람을 사랑하는 순간, 사랑은 스스로 피폐해진다.

파티에서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남자들과 춤을 추고 있다. 여자는 유혹의 눈길을 보내는 남자들에게 손을 내준다. 남자는 중얼거린다. 그래 좋아.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마지막 춤만은 나를 위해 남겨둬야 해. (은희경,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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