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막1장] 독서쟁이 75 - 언어의 온도(이기주 저) 79_하늘이 맑아지는 시기

in Steem Book Club5 years ago

nature-3474826_1920.jpg

어느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목격한, 사소하다면 사소한 광경이다. 버스에 몸을 실으려던 찰나였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 서넛이 눈에 들어왔다.
무리 중 가장 우락우락하게 생긴 한 명이 길고양이를 발견하고는 부리나케 달려갔다. 그는 점퍼 주머니에서 뾰족한 물체를 꺼냈다. 앗, 해코지하려는 건가?
아니었다. 사내는 먹다 만 식빵 조각을 고양이에게 건넸다. 고양이는 발뒤꿈치를 들고 한 발 한 발 인기척, 아니 묘기척 없이 다가와서는 잽싸게 빵을 낚아채 달아났다.
몸을 돌려 도망치는 속도나 어찌나 빠른지 내 눈이 녀석의 동작을 따라가지 못할 정도였다. 사내는 엵ㅂ은 미소를 지으며 고양이의 뒷모습을 바라봤고, 녀석도 도망치다 말고 사내를 힐끔 돌아봤다.
그리고 잠시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럴 리 없겠으나 그 모습은 마치 고양이가 사내에게 정중히 경의를 표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 쫄쫄 굶었는데 이제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됐어요, 하고 말하는 듯했다.

별일 아닌 것 같지만 내겐 꽤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달력을 보니 오늘은 절기상 '청명'이다. 맑을 청에 밝을명이다. 하늘이 차츰 맑아지는 시기를 뜻한다.
아, 그래서일까. 오늘은 절기와 꽤 잘 어울리는 장면을, 거친 일상을 정화하는 맑은 광경을 목격한 것 같다.

Coin Marketplace

STEEM 0.04
TRX 0.33
JST 0.080
BTC 61920.54
ETH 1620.69
USDT 1.00
SBD 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