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안타깝게도 이별에는 내성이 생기지 않아요

in Korea • 한국 • KR • KO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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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이별에는 내성이 생기지 않아요

요아(@hyunyoa)




일기에 이런 글을 적은 적이 있었다.

연애는 하면 할수록 더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 같다, 이별도 견디면 견딜수록 내가 더 성장하는 것 같고. 그러니 난 몇 번의 연애와 몇 번의 이별을 경험하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이 되어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몰라.

라고.

그런데 사실 그건 이별의 고통을 까맣게 잊은 철딱서니 없는 내가 실없이 웃으며 적은 문장에 불과했다. 불과 석 달 전의 나는 현 연인이 남편이 될 거라 믿었고, 2년 뒤면 우리는 함께 부산에 내려가 광안리 근처의 신혼집에서 커피를 홀짝일 줄 알았다고 확신했다. 사실 확신이란 건 하자마자 비웃듯이 흩어져 버리는 것인데도 나는 또 그 녀석에게 속았다. 이번엔 배신감까지 느꼈다. 드디어 안정적인 연애를 하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정말 꿈에 그리던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면 아직 나는 내가 원하던 이상형이 되지 못했으므로 부족한 연애를 하는 걸까 하는 물음도 들었다.

이별을 맞고도 웃으며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을 한 번 더 존경했다. 나는 미숙한 어른인지라 점심에 밥 먹고 나서 산책하다가 울었기 때문이다. 억지로 울려고 한 건 아니지만 무슨 만화처럼 그냥 걷고 있는데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같이 걷던 동료가 그런 나를 보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나는 그 사람보다도 더 어쩔 줄을 몰라 눈물을 자꾸 닦았는데 눈물은 확신 그 녀석처럼 나를 비웃듯 쏟아 내렸다. 말릴 수 없는 눈물이 잔뜩 떨어지고 나서야 역시 이별에는 내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첫 이별도 아닌데 왜 이렇게 슬프지" 라고 말했더니, 동료는 "당연해" 라고 대답했다. 공모전에서 떨어질 때는 내성이 조금씩 생기는 것도 같은데 이별은 그 사이와 사이의 기간이 길어서 그런지 망각할 때쯤에야 훅 다가오는 것만 같다. 이별에 내성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이 때문이 아닐까. 자주 겪지 않으므로.

헤어진 이유는 재회하기 힘든 치명적인 것이었으므로, 차단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 그러나 그 고민을 하는 것조차 미련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오랜 고민 끝에 구태여 차단을 할 수도 없을 방법을 택했다. 번호를 지우는 것이었다. '번호 지워봤자 뭐해, 어차피 다시 또 기억해서 연락처에 저장하고 친구를 추가하면 주소록에 뜰 텐데' 싶겠지만 나는 사귄 지 반년이 넘었는데도 휴대폰 번호를 확실히 외우지 못했다. 그러니 연락처를 지우면 아무리 원해도 다시 친구 목록에 추가시킬 수 없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 걸 항상 염두하고 반성문과 헤어진 이유를 잘 써야 한다. 그래야 전화를 안 할 수 있다.

그의 생일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숫자도 외울 수가 없었다. 휴대폰 번호나 주소는 굳이 외우지 않아도 평소에 티 날 기회가 없지만, 문 앞에 서서 비밀번호를 몰라 주춤거릴 때, 분명 25일에는 무슨 일정이 있었댔는데 없는 줄 알고 만나자고 말할 때, 그럴 때면 분위기는 순식간에 갑분싸가 되기 일쑤였다. 관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도무지 숫자를 외울 수가 없었고 나는 그게 내 머리의 숫자 할당량이 전부 차서 과부하가 걸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헤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숫자를 외우지 못했던 이유는 내 정신과 몸이 나도 모르게 방어 기제를 발동시켰기 때문이 아닐까.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생일이 왔을 때, 우리가 만났던 날이 일 년 주기로 돌아올 때, 연락처를 지워도 머릿속에 타투가 그려진 듯 빽빽하게 새겨지면 반드시 고통이 따라오니 애초에 내 뇌는 연인의 일정을 기억하려 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중학교 때 외웠던 연인의 연락처는 머릿속에 있는데 지금 연인의 연락처를 모른다는 건 말도 안 되니까.

나는 쿨한 척하는 미련 덩어리이므로 오늘도 문자를 보냈다. 헤어지고 이틀밖에 안 지났는데 일 년만에 연락하는 사람처럼 "이제 이성적인 상태가 되었으니 밥을 먹고 헤어지자"는 문자를 보냈고, 전송 완료 문구가 뜨자마자 깨달았다. 오늘도 무언가 그가 미리 말해두었던 일정이 있는 날이었을지도 몰라. 나는 결국 나의 잘못을 시인해야 했다. 연애는 하면 할수록 느는 게 아니라, 점점 마음의 문이 닫히고 만다. 상처를 받기 싫어 이기적인 사람을 자처한다. 내 시간과 내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만일 같은 날에 그와 내 일정이 겹쳐졌다면 중요도를 판가름해 나의 일정이 더 효율적이라고 믿는다. 아마도 그게 그에게 상처를 주었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만 그도 그의 일상을 천천히 전달하지 않았으므로. 대화보다 블로그에 자신의 일상을 기록했으므로. 나보다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에게 비중을 두었으므로. 나는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사람처럼 대했으므로.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일정이 아닌 자신의 일정에 추를 두었던 거겠지. 가장 단단하고 무거운 것으로.

이별은 죽을 만큼 힘들어도 죽지 않고, 밥이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가도 이내 잘 삼키는 걸 안다. 그러니 내성이 생기지 않는 이별이더래도 저번처럼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다.

행복했던 시절이 그리운 건 어쩔 수 없다. 4일 뒤인 내 생일에는 숲이 보이는 카페에서 혼자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여기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하며 읊조릴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럴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 궁극적인 나의 목표는 연인이 없이도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죽을 만큼 힘들어도 혼자 견딜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이렇게 독한 마음을 먹다가 오늘처럼 갑자기 눈물이 떨어지더라도 금세 인정하는 어른이 되어야지. 이별에는 내성이 없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 토닥이며 말이다. 잘 지내라는 말은 하지 않을 거야. 내가 더 잘 지내고 말 거다. 생일도 나 혼자서 아주 아주 잘 지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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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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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엔 약이없어서 내성도없어요

 4 years ago (edited)

시간이 약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ㅎ.ㅎ..

 4 years ago 

이젠 이별과 이별하세요

이별의 고통을 알려면 여자친구부터 구해야겠습니다.

 4 years ago 

외로움은 잠깐이지만 편안함은 영원하다는 말이 있죠 ☺️

토닥토닥.. 시간이 더디지만 효과좋은 묘약으로 작용하기를 바랍니다. 기운내세요~!

 4 years ago 

마음이 가면 또 연애를 하게 되겠지요, 그때까지는 갈구 닦으렵니다 ☺️ 감사해요 !

 4 years ago 

힘내요..

헤어진 연인에게도 힘들겠지만, 행복을 빌어주고,
시간이 지나서 되돌아봤을 때,
그때 헤어졌던 것이 오히려 잘 됐다는 생각이 들도록,
더 행복하고 내실로 가득 찬 인생을 살길 바래요..

 4 years ago 

오늘도 유스미님의 음악과 편지로 마음이 토닥여지네요.
넵. 내실로 가득 채우기 위하여 열심히 살구, 좋은 사람이 되려고요!
유스미님 덕분에 동화 작가가 될 수 있었어요. 감사해요 유스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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