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현실 감각으로부터 멀어지는 일

in Korea • 한국 • KR • KO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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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한 번은 동화 작가님들과 합평을 한다. 합평이란, 서로가 쓴 동화를 읽고 느낀 점을 말하며 이렇게 바꾸거나 저렇게 고쳤으면 하는 얘기를 나누는 시간이다. 문예창작과를 나왔으니 이제는 온갖 비평을 들어도 속수무책으로 마음 쓰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단점을 듣는 건 장점을 세 번 들어야 그나마 상쇄될까 말까 한다고 하던가. 평소 독자님께 글에 대한 칭찬을 받아도 동화는 다른 분야여서인지 가독성이 낮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다.

내용이 이상하게 흐르는 것도 괜찮고(뭐가 괜찮아!), 주인공의 매력이 떨어지는 것도 잘 넘길 수 있지만(아냐, 사실 못 넘겨),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한 마디에 마음이 옹졸해졌다. 가독성이 낮다니, 글이 안 읽힌다니, 문장이 부족하다니……. 몇 년을 공부했는데 이런 기본적인 개선점을 들었어……. 안다. 빠르게 끝내야 하는 단편보다 진득하니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적는 장편이 내게 더 맞는 장르라는 걸. 그런데 아직도 장편을 하나 끝내지 못한 이유는 장편을 쓸 때마다 점점 현실 감각이 살아나서다. '이거 쓰는 데 이만큼의 시간이 들면 자기소개서는 쓰지 못할 텐데', '이거 쓰는 데 이만큼의 음식을 먹어야 하면 돈이 필요한데……' 하고 혼자 싸우다가 줄거리를 구상하기 전에 그만 나가떨어지고 만다.

원하는 걸 진정으로 거머쥐기 위해서는 진득하니 한 길을 걸어야 한다지만 요즘에는 짧은 시간을 투자하고 더 큰 수확을 받을 수 있다는 '주식', '코인', '스마트 스토어 사업'이 자꾸 눈에 들어와서인지 장편은 소위 말하는 가성비가 떨어지는 장르라고 여겨진다. 차라리 원고지 30매라는 짧은 단편을 쓰고 작가가 되는 게 낫지 않을까. 어차피 책을 읽는 아이들은 줄어들고(아냐 사실 어른들도 줄어든다), 동화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림도 잘 그려야 하는데(나는 그림을 못 그린다), 흐흐, 그나마 남은 글마저 안 읽힌다는 평을 받았……(네, 이렇게 땅굴을 파는 게 제 본연의 모습입니다).

훌륭한 작가들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시기에 오로지 자신만 믿고 집필한 덕에 성공을 거머쥐었다지만, 왠지 나는 키보드에 손을 올리자마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결국 빵과 커피를 책상 위에 놓고 한입씩 먹어야만 손가락이 움직인다. 배가 고파야 글이 잘 써진다는 건 다 거짓말이다. 하지만 너무 배고픈 나머지 배고프다는 사실을 잊을 때, 그때 간혹 찾아오는 집중은 현실을 잊게 만드니 어른의 말들이 어느 정도는 맞을 수 있겠다.

에세이는 감정을 묵혀두고 쓰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다만 이번에는 감정을 묵히지 않고 어젯밤 비평 사건을 겪고 아침에 땅굴을 파는 과정을 모두 적었다. 작가가 아닌 저자가 되기 위해서는 현실 감각으로부터 동떨어져야 한다.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트렌드에 밀리는 걸 조급해하지 않고, 진득하니 한 길을 걸어가는 일. 마케터로서의 자아를 고이 접고 오직 나를 믿는 일. 이 시기에 자신을 믿고 꿋꿋하게 창작하는 모든 창작가가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이 글은 창작가를 향한 경외심을 담은 편지다. 자, 현실 감각에서 잠시 벗어나 볼까요. 아, 저부터 벗어나라고요? 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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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ears ago 

자신의 단점을 듣는데 기분 좋은 사람이 어딧겠어요.
그래도 그 시기를 넘기고 성장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3 years ago 

지금은 그 시기를 넘는 중입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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